IN GAME[연재중단]

번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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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GAME

NO. 13

W. 설하

죽을 것 같다. 흙바닥을 뒹굴며 나는 생각했다. 실수로 얻어맞은 팔뚝이 욱신거렸다. 멍이 들려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다시금 온몸으로 바닥을 굴러 매섭게 나를 향해 날아오는 막대를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오른쪽 다리 부근을 빗나간 막대가 애꿎은 바닥을 긁었다. 어째서 군사학부가 악명으로 유명세를 떨쳤는지, 온몸으로 절절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누구라도 이 혹독하기 짝이 없는 훈련을 받아본다면 '악명'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반박할 순 없으리라. '모두에게 평등한'이라는 설립 이념에 걸맞게 신분의 고하나 성별 따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군사학부에 속해있는 모든 학생들은 온종일 따가운 볕 아래서 땀방울을 흘리며 몸을 혹사시켜야만 했다. 구르고, 얻어맞고, 탈진 직전까지 내몰린다. 물론, 내가 공녀라는 이유로 그 훈련에서 배제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방심하다 교관에게 옆구리를 얻어맞은 채 바닥을 굴렀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 몇 번이고 헛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온몸은 땀에 절어버린 지 오래고, 호흡이 모자란 탓에 얼굴 또한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모로 보나 귀한 신분의 영애로 보이진 않으리라. 집중하라는 교관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자마자 다시금 날아오는 막대에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몸을 움직여 그것을 피해야만 했다. 몇십 분 동안 쉴 틈 없이 반복되던 훈련은 교관이 휴식을 외침과 동시에 종료되었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몸을 옮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흙바닥 위로 몸을 뉘었다. 혹사당한 몸뚱어리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괜찮냐?"

"…괜찮아."

"너 얼굴은 곧 터질 것 같은데,"

"…너도거든? 물이나 좀 줘 봐…,"

김태형이 들고 있던 물통을 내밀었다.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누운 채로 물을 반쯤 비워냈다. 까슬까슬하니 메말라있던 목구멍이 그제야 개운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을 꼴딱꼴딱 삼키며 숨을 고르는 나를 향해 김태형이 제 물통에 남은 물을 뿌려주었다. 잔뜩 익었던 피부가 서서히 식어갔다. 그제야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들며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겨났다. 훈련생 중 대부분의 이들이 나와 다를 바 없이 더러운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개중에는 뒤집힌 속을 참지 못한 채 먹은 걸 죄다 게워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땀 내나는 광경을 눈에 담고 있자니, 이 독한 훈련을 받고도 저렇게 멀쩡히 서 있는 김태형이 신기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여전히 일어선 채로 내 얼굴에 무성의하게 손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꽤 거칠었던 호흡이 완전히 안정된 것을 보아하니 그 짧은 시간 동안 완전히 호흡을 가다듬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망할, 이래서 재능 있는 것들이란, 여전히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그나마 '율리아'의 재능이 받쳐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공녀의 지위를 가지고 살아온 만큼에나 운동이나 검술 따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 한 번 제대로 받은 적 없는 몸뚱어리가 군사학부의 훈련을 따라갈 만큼의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녀의 재능은 입증된 셈이었다. 무리 없이 훈련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인 덕에 이론수업이 진행되는 2주 내내 아카데미 곳곳에 퍼져있던 '오르테 공녀는 부정입학자다', '공녀가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위해 아끼던 보석들을 처분했다더라'하는 소문들까지도 싸그리 잠재울 수 있었다.

[플레이어 : 율리아 비안 오르테 / ? 혜 ?]

스탯 : 체력 (LV. 17) / 운 (LV. 측정불가)

/ 민첩 (LV. 13) / 지능 (LV. 13) / 힘 (LV. 16)

물론, 시스템이라는 아주 훌륭한 변수를 이용한 덕도 없잖아 있었다. 무려 체력 스탯을 17레벨까지 올려두었으니, 어지간한 일반 남학생들보다 내 체력이 더 좋을 터였다. 굳이 스탯 포인트를 소모해 레벨을 올리지 않아도, 기본 스탯들은 군사학부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다 보면 알아서 레벨이 오르곤 했다. 나도 체력 레벨을 무려 10레벨이나 올렸지만, 같은 훈련을 받은 김태형과 전정국은 벌써 체력 스탯의 레벨이 20이 넘었단다. 아주 조금, 분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죽겠다, 옆에서 교관에게 마지막까지 실컷 굴려지던 전정국이 나와 김태형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국에서 고귀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황태자도 아카데미 안에서는 별 수 없다. 흙먼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얼굴에, 땀범벅이 된 훈련복,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까지. 나와 별다를 바 없이 엉망진창인 전정국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물통에 남아있던 물을 그의 머리 위로 부어주었다. 쏟아지는 시원한 물에 더러워진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은 그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퀘스트는, 아직도?"

"아직 보상 정산 중."

"그런가, 오래도 걸리는군."

하긴, '협력' 퀘스트가 종료된 지 3일이나 지났으니, 이런 반응이 돌아올 법도 했다. 퀘스트가 종료되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퀘스트 진행률을 100%로 올릴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헛수고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캐런 케틀린이라는 아주 큰 장애물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협력을 구하는 방법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완강히 거부하며 나를 마주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탓에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지은 차였다. 사실 플레이어가 3명이나 죽은 시점에서부터 진행률을 100%로 채우는 것은 포기한 셈이니, 큰 미련도 없었다. 그 뒤, 진의 힘을 빌려 캐런을 자퇴 처리한 후 공작령으로 보내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알엠에게 캐런의 구속과, 그녀가 수상쩍은 행동이나 말을 할 시 바로 알려달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고, 알엠은 기꺼이 그러겠노라 하는 답신과 함께 캐런이 무사히 공작령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 답장을 받은 것이 무려 3일 전, 퀘스트가 종료되었음에도 또 다른 메인 퀘스트는커녕,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탓에 우리는 의도치 않은 휴식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렇다 해도 군사학부의 훈련은 피해 갈 수 없었지만.

"그래서, 알아낸 게 있나? 그 이상 현상에 대한 것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또 마냥 손 놓고 멍하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우리는 '뭐라도 하자'라는 전정국의 말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었다. 어쨌든 우리의 세계는 이곳이 아니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마음 편히 쉬는 것조차 부담에 가까웠다. 하지만 길잡이 역할을 하던 시스템이 없는 플레이어는 형편없을 정도로 무력했다. 시스템이 플레이어들의 가장 큰 조력자라는 박지민의 말을 뼈저리게 실감한 순간이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발견한 단어 하나,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

당신은 '메를린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제국을 비롯한 대륙에 나타나는

'이상 현상'에 대하여 알아내야 합니다.

'이상 현상',

단어를 가장 먼저 찾아낸 것은 전정국이었다. 우리가 메를린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유가 이 '이상 현상'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면, 지금부터라도 이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 조사해보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그의 말에 나를 비롯한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과적으로 실패에 가까웠는데, 그 이유라 함은-,

"아니, 이상 현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범위가 너무 커."

나는 뉘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역사만 100년이고, 왕국 시절까지 더하면 1,000년에 가까운데, 그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이상 현상'을 찾아내는 건…, 사실, 그리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지.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고."

"……."

"당장 우리가 원래 있던 세계만 해도 '이상 현상'이라 이름 붙여진 사건들이 몇 개야, 어떤 이상 현상인지 아는 게 없으니 솔직히 나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어."

"…역시 그런가?"

침묵이 맴돌았다. 무력함 앞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듯, 두 사람의 얼굴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마저 일으켜 세우고는 옷에 엉망으로 달라붙어있던 흙먼지를 대충 털어냈다. 그러고는 내 앞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로 손을 뻗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손에 이게 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바라보는 그 얼굴이 답지 않게 무해해 보였다. 풋,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는 게 좋겠지. 일단…,"

"…?"

"그 땀 내나는 옷부터 갈아입는 게 어때?"

"…뭐?"

"이만 가서 쉬자고, 이것들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래? 어느새 텅 빈 훈련장을 턱짓하며 내가 말했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훈련생들은 오늘 치 훈련이 끝났음을 알리는 교관의 말을 듣곤 가쁜 숨만 정리한 채 숙소로 돌아간지 오래였다. 그제야 흙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저들의 꼴사나운 모습을 눈치챈 것인지 두 사람이 내밀어진 내 손을 붙잡았다. 후들거리는 팔로 겨우 두 사람을 일으켜 세운 내가 먼저 기숙사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밀었던 두 손에는, 여전히 두 사람의 손을 꼬옥 붙잡은 채로.

IN GAME

[메인 퀘스트 : 협력]

보상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Y / N

메인 퀘스트가 다시금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의 일이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훈련으로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기숙사에 들어서던 차에 나타난 새파란 창이 그 시작을 알렸다. 망설임 없이 'Y'를 누르자, 새파란 창이 닫힘과 동시에 또 다른 창이 열렸다.

[메인 퀘스트 : 협력]

플레이어 : 율리아 비안 오르테 / ? 혜 ?

-진행률 : 57%

-수령 가능한 보상이 2 개 있습니다.

<보상 목록>

· 아카데미 [자료] 열람권 (획득 불가)

· 스킬 : 집중 포격 (획득 불가)

· 스킬 : 난사

· 랜덤 아이템 박스

2 개의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눈을 홉뜬 채, 보상 목록을 살폈다. 스킬? 하는 의문 어린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보상 수령을 선택하자, 손바닥 부근에서 옅은 빛이 맴돌았다. 주먹 쥔 채 내리고 있던 손을 쫙 펼치자,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 위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상자 하나와, 파란 선들이 마구잡이로 새겨진 돌 하나.

[스킬석 : 난사]

소비 아이템

사용 시, '블래스터' 전용 스킬,

[난사]

를 배울 수 있습니다.

[랜덤 아이템 박스]

소비 아이템

사용 시 무작위 아이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설명서를 읽어내려가던 눈이 찌푸러졌다. 스킬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 당최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랜덤박스는 침대 위로 던져둔 채 손바닥의 반 정도 되는 크기의 스킬석을 들여다보았다. 마구잡이로 새겨진 파란 선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새어 나왔다. 소비 아이템, 어떻게 사용하라는 걸까. 손에 쥐어보기도 하고, 구석구석 스킬석을 살펴보기도 했으나 반응이 없던 차에, 파삭-, 하며 무언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엥? 뭐…,"

스킬석을 쥐고 있던 손에 아주 약간 힘을 줬을 뿐인데, 펼쳐본 손 위에 있던 스킬석이 바스러졌다. 동시에 희끄무레하던 빛무리가 선명해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새로운 알림 창이 열렸다.

[알림]

[스킬 : 난사]를 획득합니다.

잠시간 멍하니 서있었던 것 같다. 바스러진 스킬석 조각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기숙사를 가득 메우던 빛이 사그라들고 나서야 나는 상태 창을 열어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 율리아 비안 오르테 / ? 혜 ?]

직업 : 블래스터

칭호 : 이름을 잊은 자

·

·

·

스킬트리 : 난사 (LV. 1)

상태창의 새로이 생겨난 스킬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상세정보 확인, 을 중얼거리자 기다렸다는 듯 스킬에 대한 정보가 간략히 요약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직업 전용 스킬 : 난사]

일정 범위 내의 적군에게 마력탄을 무작위로 발포합니다.

-패시브 스킬 : 명사수

에 의해 명중률이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 : 불릿 부스트

에 의해 공격 속도가 5%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 : 인피니티 불릿

에 의해 마력탄의 개수가 무한대로 설정됩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글자들을 읽고 있자니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시스템, 그러니까 박지민은 이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세계라 말한 적 있었다. 차원이 다를 뿐, 내가 있던 세계와 다를 바 없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 그 말을 바꿔 생각해 보면, 나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게임과 비슷한 형태로 시스템을 이용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시스템이 플레이어들에게 익숙한 '게임'의 형식을 빌려온 것일 뿐, 정말로 플레이어들이 게임 속에 들어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스킬이라니, 그간 잠깐이나마 즐겨 했던 RPG 게임들의 현란한 스킬들을 떠올리자 더더욱 말도 안 된다는 생각만이 가득 들어찼다.

나는 서랍장에 숨겨두었던 두 개의 리볼버를 집어 들었다. 꾀죄죄한 몰골을 정리할 새도 없이 기숙사 방 문을 박차고 나섰다. 훈련이 시작됨과 동시에 개인에게 배정된 개인 훈련장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스킬이 사용되는 원리 따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던 나는 직접 스킬을 사용해 볼 심산이었다. 뭐든지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낫다 하지 않던가, 훈련장엔 충격을 완화시켜 흡수하는 마법이 쳐져 있으니, 총알을 얼마나 쏴대든 간에 그 벽에는 흠집 하나 남지 않으리라.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훈련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직은 낯선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땀에 축축하니 젖은 손을 바지에 대충 문질러닦은 나는 두 개의 리볼버를 고쳐 쥐었다.

[스킬 : 난사]를 사용합니다.

뭐랄까,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닌대도 이보다 소름 끼치진 않으리라. 알림 창이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내 몸은 내 통제를 벗어난다. 몸이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내 의도는 단 한 줄도 반영되지 않은, 무차별적인 '난사'가 시작되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감각은 생경하리만치 선명한데도, 그것이 내 통제 하에 움직이는 것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두 손에 쥐었던 리볼버에서 무수한 탄환들이 쏟아져나갔다. 총의 성능을 고려해 보았을 때, 절대 그만한 위력을 낼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총알들은 빠르게 쏘아져나간다. 벽에 수많은 탄환들이 박히는 것이 생생하게 보였다.

끔찍했다.

스킬, [난사]의 사용이 종료됨과 동시에 나는 훈련장 바닥에 덜컥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바닥으로 리볼버 두 개가 덜그럭, 떨어졌다. 나는 바닥에 축 늘어진 내 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들어왔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밭은 숨을 내뱉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른쪽 손을 꽉 움켜쥐어 보았다. 멀쩡하게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임을 확인한 순간에 완전히 긴장이 풀렸다.

"소름 끼쳐,"

벽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총알들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스킬을 쓴다는 것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말도 안 되는, 끔찍하리만치 더러운 기분을 선사했다. 내 몸이되 내 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그래, 마치 누군가가 조종하는 인형이 된 것처럼, 기계적으로 총을 쏴대는 것이었다. 빈말로도 달갑다 할 수 없을 만큼 싫은 느낌이었다.

바닥에 무너졌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입술을 짓씹어가면서도 나는 다시 두 개의 리볼버를 손에 쥐었다. 다시 [난사] 스킬을 사용했다. 또다시 끈에 달랑달랑 매달린 인형처럼 내 몸의 통제권이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로 넘어간다.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허공을 향해 탄환을 난사한다. 그렇게 몇 번을, 수십 번을 나는 반복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기분도, 다른 누군가가 내 몸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듯한 그 소름 끼치는 느낌에 적응해보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조금만 생각해도 답이 나올 문제였다. 스킬은 곧 시스템이며,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스킬'이라는 권한을 부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플레이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에 우연은 없을 것이다. 세계를 구해라, 그런 거창한 목표를 달성할 영웅으로 의도치 않게 점찍힌 탓에 내가 '율리아'가 되어야 했던 것처럼, 나는 어쩔 수 없이 '스킬'들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떠올린 답에 가까웠지만, 결코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답이었다. 입술을 짓씹어가며 스킬을 사용했을 때의 감각을 몸으로 익혔다.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난사] 스킬을 써가며 그 감각을 몸에 새겼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이 스킬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

[메인 퀘스트 : 수색]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협력]을 완료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로의 진입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관련 퀘스트가 자동 부여됩니다….

크레아 제국 : 북부 지역의 수색을 시작합니다.

제국 북부 지역은

'이상 현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배치된 지역을 수색하여 '이상 현상'의 원인을 조사하고,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제국 북부지역의 수색을 완료하십시오.

-주의-

아카데미의 [자료] 열람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자료]를 먼저 열람할 것을

권장 드립니다.

플레이어 : 율리아 비안 오르테 / ? 혜 ?

배치 지역 : 메를린 북쪽 숲

[조건 1] '매개체'를 찾으시오.

[조건 2] 조건부 공개

[조건 3] 조건부 공개

성공 보상 : ???

실패 시 : 플레이어 사망

메인 퀘스트 창을 허공에 띄워둔 채로 교관의 말을 듣던 내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전정국과 김태형의 반응 또한 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일주일간의 실기 수업을 끝으로 신입생들은 실습이 끝날 때까지 실기수업을 중단합니다. 실습 기간 동안의 수업은 오전 이론 수업으로 대체되며, 오후 수업 시간은 실습을 위해 사용할 것을 권장 드립니다."

"……."

"군사학부 학우들의 실습 내용을 발표합니다. 메를린 북쪽 숲의 마물을 토벌하는 것이 이번 실습의 주된 내용이며, 마물의 '핵'을 반드시 수거해오셔야 합니다. 학생들은 최소 3명, 최대 6명의 조를 개별적으로 편성할 수 있으며, 반드시 조별로 실습에 참여해야 합니다."

"……."

"잡은 마물의 종류와 핵의 개수에 따라 점수가 분배되며, 부정행위를 한 조는 적발 시 실격 처리를…,"

실습에 대해 설명하는 교관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러들으며 내가 물었다. 너네도 북쪽 숲 담당이니, 하는 내 말에 전정국과 김태형 둘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실습지와 메인 퀘스트 수행 장소가 일치하는 것이 우연이겠냐고. 일부러 실습 기간에 맞춰 퀘스트를 부여한 것이 틀림없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메를린 북쪽 숲은 온갖 가지 마물들이 들끓기로 유명한 숲인 만큼에나, 위험요소가 많다고 판단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군사학부의 실습 기간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시키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머지 두 사람은?"

"그 둘은 경제학부라며, 실습이 있을 리 없지."

"우리랑 다른 장소에 배치됐을 가능성이 더 크겠군."

"아무래도 그렇겠지?"

앞사람을 방패 삼어 가며 우리는 교관의 눈을 피해 소곤거렸다.

"실습은 총 2주간 진행되며, 오후 6시를 기준으로 북쪽 숲 입구가 폐쇄됩니다. 다음 날 정오에 출입구가 다시 개방되며, 정해진 시간 외 숲에 들어가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실습 치고는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또한, 북쪽 숲 깊은 곳으로의 출입은 절대 허가할 수 없습니다. 1학년은 숲의 초입 부분에서 실습을 치러주시면 됩니다. 경게마다 결계와 표식이 있으니 유의해서 이동해 주십시오."

"뭐가 위험해?"

"또한, 이번 실습에선 개인 활동 또한 엄격하게 금지됩니다. 반드시 3인 이상 동행할 것을 권장 드립니다."

"우리가 무슨 용병도 아니고, 마물을 때려잡으라니…,"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곤거렸다. 교관의 설명에 따르면 개인행동이 금지되는 것과 정해진 시간 외 숲의 출입이 금지되는 것 외에는 딱히 제재라 할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학생들끼리 마물을 토벌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상 또는 안전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다는 점이 내 불안함을 키웠다. 이런 내 반응에 전정국과 김태형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되려 내가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었다. 너넨 걱정도 안 돼?

"군사학부 입학시험이 괜히 어려운 것도 아니고…, 훈련도 그렇고 하루 종일 땡볕에 사람을 굴리는 게 괜히 그러는 줄 알아?"

"아니, 훈련이라고 해봤자 겨우 일주일 동안 받은 게 끝이잖아. 못 따라오는 사람도 많았고,"

"김태형의 말이 맞다. 못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데도 실습을 그대로 진행한다는 건 다른 의미로도 해석되지 않나?"

전정국의 말에 나는 눈을 끔뻑이며 머리를 굴렸다. 다른 때는 머리를 잘만 굴리더니, 이런 데서는 이상하게 돌이 된다며 투덜대는 김태형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아, 하는 단말마의 감탄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물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엄청 강하지는 않은가 봐?"

"그렇지. 교관이 말했다시피 숲 깊은 곳으로 가지 않는 이상 우리 능력 밖의 마물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괜한 걱정이었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전정국은 한번 픽 웃고는 말았다.

"원하는 사람끼리 합의 후, 명단을 제출하시면 됩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전정국과 김태형, 그리고 내가 한 조가 되었다. 마치 그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양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김태형은 이름을 휘갈겨 적고는 교관에게 종이를 제출했다. 전정국도 당연하다는 듯, 김태형의 행동에 딱히 제재를 걸지 않았다. 

조를 제출한 이후에도 전정국과 김태형은 다른 학생들에게 같은 조로 활동하자는 제의를 몇 번 받았다. 이미 조를 정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그 제안들을 죄다 거절했지만, 지위가 지위이니만큼, 실습이 목표가 아닌 단순히 그들에게 말을 섞을 기회를 노리는 이들이 전정국과 김태형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기야, 전정국은 황태자라는 신분에다가, 검술 실력도 알아주는 천재로 손꼽힌다. 김태형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도 불과하고 뛰어난 실력 탓인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아카데미 내에서야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 뿐이지, 학생들이 은연중에 신분을 따져가며 친분을 만드는 것까지는 아카데미의 소관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저기서 카일로스 님, 반테 님, 하며 전정국과 김태형에게 엉겨 붙는 사람들을 감흥 없는 눈으로 구경할 뿐이었다.

"…저, 저, 율리아 공녀님…!"

"…응?"

내게도 저들과 같이 함께 조를 만들지 않겠냐는 제의가 있긴 했다. 나는 내 앞에서 우물쭈물 대는 다섯 명의 소녀들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은 조에 하심이…! 하는 말을 내뱉으면서 연신 전정국과 김태형을 흘긋거린다. 혹시 저들과 말을 섞기 위해 내게 접근한 걸까?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정작 전정국과 김태형을 바라보는 소녀들의 눈빛에는 뭐랄까, 약간의 적의에 가까운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의문을 숨긴 채 그들에게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알다시피, 나는 이미 일행이 있어서."

"아…,"

내가 전정국과 김태형을 콕 집어 얘기하자, 다섯 소녀들의 눈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명백한 거절의 의사가 담긴 내 대답에도 그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자꾸만 내 앞에서 우물쭈물, 몇 번이고 망설이는 모습이 훈련 때 교관을 피해 날아다니던 이들의 모습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무슨 할 말이 남았나 싶어 왜? 하며 그들을 빤히 바라보자, 저들끼리 눈짓을 몇 번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가장 끝에 있던 소녀 하나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혹시! 저희의 도움이 피, 필요하시다거나 하면, 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도움? 어떤?"

"그,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괴, 괴롭힘을 당하시고 계신다거나…!"

소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나는 한동안 그녀가 한 말을 되짚어보아야 했다. 그러니까, 대충 해석하자면 이런 뜻인가? 내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저들이 도와줄 수 있다는, 뭐 그런…. 괴롭혀? 누가? 누굴? 그리고 소녀들이 연신 흘긋거리고 있는 대상에게로 내 시선이 닿은 결과,

크흡, 나는 차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난데없는 내 웃음에 놀란 소녀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지만, 나는 터져버린 웃음을 진정시키느라 그들에게 변명의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바들바들 떨어대는 내 모습에 소녀들이 작게 소곤거리는 것이 들렸다. 어떡해…? 어, 잘못 말했나 봐…, 하는 그 중얼거림을 듣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아, 귀여워, 어떡해. 웃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진정시켰다. 어쩐지 전정국과 김태형을 보는 눈빛이 뜨겁더라니,

이들의 말을 해석하자면 대충 이러한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김태형과 전정국의 횡포에 못 이겨 억지로 같은 조에 이름을 넣은 것이라면, 기꺼이 저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그래도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면 제국의 둘뿐인 공녀 중 하나인데,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가 있나 싶어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정국이 황태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걱정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야. 호의는 고맙게 받을게."

"정말요?"

"응, 친해, 우리."

그 '우리'가 누굴 지칭하는지는 그녀들 또한 쉽게 알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괜찮아, 하는 내 말에 소녀들이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소녀들을 안심시켜 돌려보낸 나는 얼굴 가득 핀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왜 정신 놓은 것처럼 혼자 실실 쪼개고 있냐는 김태형의 시비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이나. 나는 저 멀리서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저토록 순수한 호의를 받아본 것이 얼마 만인지, 괜스레 마음이 울렁이는 것도 같았다.

"너넨 앞으로 인상 좀 펴고 다녀라."

아무튼, 이건 모두 저 인상 더러운 두 놈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난데없는 내 핀잔에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그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허겁지겁 내 뒤를 따르는 두 개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리슬쩍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