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GAME[연재중단]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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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G에이그리고

22호

W. 설하

[율리아에게,

서부는 날이 꽤 덥다고 하던데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공작령은 비교적 시원한 편이라 모두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참, 알엠이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더라. 직접 편지를 쓰기엔 알엠이 요즘 많이 바빠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 말이야. 아무튼, 잘 지내고 있지? 혹시라도 별일이 생긴다면 연락하는 것 잊지 말고.

…… 중략 ……

늘 말하지만, 혹시 위험하거나 급한 상황이 일어나면 숨길 생각은 하지도 말고 바로 알려야 한다. 위험한 상황과는 최대한 멀어지는 게 가장 좋고. 또, 혹시라도 다른 지역으로 갈 일이 생기면 미리 전보를 보내는 것도 잊지 말고. 혹시 모르니 혼자 돌아다니는 위험천만한 짓은 최대한 삼가주길 바란다. 또…,

…… 중략 ……

…어쩌다 편지가 이렇게 길어졌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지? 별일 없기를 바란다. 항상 몸조심하고, 여건이 된다면 답장은 꼭 해주길 바라. 네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말이야. 재촉하려는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네가 여건이 될 때…. 그래도 답장은 꼭 해줬으면 좋겠네. 지난번에 네가 답장하는 걸 잊어먹는 바람에 한 번에 공작 저의 사람들이 쓴 편지 23통을 보내야 했던 사건이 잊히질 않아서 말이야. 모쪼록 잘 지내고, 공작 저로 돌아오는 날 보자꾸나. 잘 지내렴, 동생아.

진 비안 오르테.]

[진에게

나는 잘 지내. 편지에 잘 지내냐는 질문을 대체 몇 번이나 쓴 거야? 아무튼 걱정할 일 하나 없이 엄청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제발, 걱정하지 마. 알엠 오라버니에게도 안부 전해줘. 참, 공작님이랑 공작부인께도. 공작 저 사람들 모두한테도!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난 다섯 살 먹은 애새끼가 아니라 열여덟이나 먹은, 그것도 곧 성인이 되는 어엿한 학생이라는 걸 좀 기억해 주면 좋겠는데. 제발, 5장이나 되는 편지 중 4장이 잔소리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전정국 카일로스랑 뷔가 배가 찢어져라 웃더라. 난 얘네의 광대가 되는 건 사절이니까 다음 편지부터는 잔소리는 제발 생략 좀 해줘. 제발. 꼭.

율리아가.]

[율리아에게

가족으로서 타지에서 생활하는 동생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보니 자꾸 잘 지내냐는 물음이 튀어나오는 것 같네. 그런 김에 이번 편지에서도 어김없이 물어볼게. 잘 지내고 있니? 얼마 전에 서부의 여름 축제에 참여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네가 보내준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고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더라. 잘 지내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면서. 그런 김에 사진 좀 더 많이 보내줘.

그리고 잔소리는…, 걱정되는 마음에 말이 자꾸만 길어지다 보니…. 아무튼 네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이번에는 잔소리는 좀 줄여보도록 할게. 간단히 몇 개만 먼저 말하자면, 우선 먹을 것이나 수상한 사람은 최대한 경계하고…,

…… 중략 ……

이제 곧 수도로 간다지? 수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지낼 거란 소식은 들었다. 알엠도 수도에 있으니 곧 얼굴을 볼 수 있겠네. 오랜만의 재회가 되겠어. 아카데미 개학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건 알지만, 시간 나면 공작 저에도 꼭 들러주면 좋겠구나. 쉬다가 나랑 같이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고. 아무튼 간에, 몸 건강히 지내다 오렴. 다음 편지는 수도로 보내는 편지가 되겠구나. 나중에 보자, 동생아.

진 비안 오르테.]

[진에게

오라버니가 사진기를 챙겨준 덕에 꽤 괜찮은 사진들을 많이 건졌으니까 이참에 몇 장 더 보내줄게. 여전히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그런데 말이야, 내가 잔소리를 줄여달라고는 했지만 그 뜻이 4장에서 2장으로 잔소리를 줄여달란 뜻은 아니었거든. 게다가 죄다 똑같은 소리뿐이잖아. 대체 종이를 두 장씩이나 낭비해가면서 잔소리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율리아가.]

[율리아에게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잔소리를 들은 체도 안 할 것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는데 항상 몸조심하고, 너무 위험한 일은 되도록 피하고, 또… (중략)]

[진에게

아 제발 그만!!!]

- 제국력 117년, 율리아와 진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발췌 -

당연하게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지구를 닮아 계절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다섯 번의 계절이 변화했다. 아카데미의 학년이 바뀌고, 누군가는 졸업을 하고, 그 당연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저가 누군지 헷갈려 하는 이들 속에서 나 혼자만이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나 혼자만이 '나'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무려 2년이라는 시간 동안에나 말이다.

그렇게, '율리아'가 스무 살이 되었다.

게임 내에서

길고도 짧던 2년의 시간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 이야기의 시작은 제국력 117년, 그러니까 내가 이제 막 이 세계로 들어와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그 해의 여름날이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 해의 여름, 무더위가 판을 치던 여름날 중 하루를 시작으로 우리는 제국 전역을 떠돌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장차 황제가 될 '카일로스 체슬라 폰 크레아' 황태자를 보필하며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란 명분을 앞세웠지만, 실상은 퀘스트의 완료를 위해 근원을 파괴하고, 비비안의 기록을 되찾기 위해 시작된 여정이었다. 세 번째 퀘스트가 제국의 서부 지역을 명시하고 있는 만큼,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가 자연스레 제국의 서부 지역으로 정해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행은 쉽지 않았다. 특히나 현대에서 캠핑 몇 번 해본 게 경험의 전부인 이들이 모여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제국에 더 자연스레 녹아들기 위해'라는 변명을 내세워 꾸린 일행은 우리 다섯이 전부였기에 많은 짐을 옮길 수 없었다. 인벤토리를 이용하는데도 한계가 있었기에 식량은 늘 부족했고,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했기에 피로는 쌓여만 갔다. 지형은 험준했고, 날은 더웠다. 지쳐 쓰러지기 딱 좋은 환경에서도 우리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버틴 시간이었다.

서부에 도착했을 때 즈음엔 죄다 지쳐있었다. 아마도 황실에서 미리 예약했을 숙소에서 우리는 꼬박 하루를 쥐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뒤에는 미친 듯이 음식을 입에 쑤셔 넣었다. 뱃가죽이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 오를 정도로 음식물을 쑤셔 넣고는 다시 잠에 들었다. 그렇게 이틀을 날린 후에야 우리는 퀘스트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비비안의 기록'은 전정국이 가지고 있는 지도에 위치가 표시되는 반면, 근원은 그렇지 못했기에 우리는 근원을 찾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근원을 파괴하고 비비안의 기록을 손에 넣는 것으로 퀘스트를 완료하기 무섭게 네 번째 퀘스트가 부여되었다. 네 번째 퀘스트가 진행될 위치를 보자마자 우리는 신음 섞인 야유를 보냈는데, 그 이유라 함은 네 번째 퀘스트의 진행 지역이 동부라는 데에 있었다. 제국의 끝과 끝을 횡단해야 하는 상황에 눈물이 찔끔 났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출발은 빨랐다. 더 꾸물거려서 좋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국 동부로 이동하는 내내 우리는 동선을 좀 효율적으로 짤 순 없냐며, 시스템, 그러니까 '지민'에게 불평 아닌 불평을 내뱉었다. 다섯이서 모여 이렇게 가성비 떨어지는 여행은 처음이라며 욕이란 욕을 다 쏟아부으면, 눈앞에 이따금 새파란 퀘스트 창이 생겨나곤 했다.

[돌발 미션 : 체력 단련]

! 돌발 미션 !

즉시 팔굽혀펴기 200회를 실시하십시오!

진행률: 0%

제한 시간: 30M

실패 시 : 몽둥이찜질!

그러면 우리는 허공에다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야유를 퍼부으면서도 결국 평평한 땅에 손바닥을 대고 엎드리고야 마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신호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해킹으로 인해 존재가 붕괴되었던 '지민'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채, 아직 남아있다는 것에 대한 신호. 또, 그가 서서히 붕괴되었던 시스템을 복구시키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플레이어'들의 편일 시스템이 아직까지 건재하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나는 종종 이런 짓궂은 퀘스트가 뜰 때마다 야유를 퍼부으면서도 안심하곤 했다.

그렇다고 지민이 늘 체력단련과 같은, 더럽게 힘들기만 한 퀘스트만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우리를 위해 부여한 퀘스트에는 이따금 그 지역의 특산물이라던가, 축제를 한번 즐겨보라는 내용이 담겨있기도 했다. 예컨대,

[돌발 미션 : 여름 축제]

! 돌발 미션 !

서부 지역의 대축제에 속하는

서부 여름 축제를 관광하고

후기를 작성해보세요!

제한 시간 : 1D

후기 작성 여부: X

-이런 느낌의 퀘스트들 말이다. 나는 혹시 모르니 챙겨가라며 진이 가방에 쑤셔 넣어준 예쁜 옷들을 입곤 축제를 돌아다녔다. 마찬가지로 진이 챙겨주었던 사진기를 이용해서 몇몇 사진을 찍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의 여행은 그랬다. 근원의 특성상 지형이 험준하고 위험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근원들을 찾아 헤매는 여정을 계속하면서도 그 여행이 마냥 힘들고 괴롭기만 한 여행이 되지 않은 데에는 지민의 덕이 컸다. 네 번째 기록을 '제외된 플레이어'에게 빼앗긴 날에는, 다 죽어가는 분위기를 살려보겠다며 노래 한 소절! 따위의 미션을 내걸기도 하더라.

파괴한 근원이 다섯 개 째 되는 날에, 전정국이 이제 자기가 카일로스인지 전정국인지 가끔 헷갈린다며 제 머리를 통통 건드리며 말했다. 그에 반해 나는 여전히 '율리아'의 기억은 단 한 조각도 들어있지 않았다. 전정국과 김태형은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려 하며 저들이 썼던 일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정호석 또한 이따금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민윤기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자연스레 우리가 여행하는 지역에 대해 말하거나, 종종 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할 때가 많은 것으로 보아 결국 민윤기 또한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맞았다. 나만이 그렇지 않았다. 이름을 대가로 기억을 지켰다. 이따금 그 사실이 몹시 외롭게 느껴질 때가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튼, 그 해 여름의 여행은 다섯 번째 근원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새 학기엔 다시금 북부로 돌아가야만 했다. 어쨌든 아카데미의 학생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새 학기는 첫 학기처럼 큰 사건들이 일어나진 않았다 작은 해프닝 몇 개를 제외하고는 아주 평온한 축에 속했다. 예를 들면, 김태형이 새로 받은 스킬을 쓰다 제 연무장을 박살 냈다는 것이나, 중간고사 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시험을 세 과목이나 못 쳤다는 것들 말이다. 기말에 미친 듯이 공부해 겨우 낙제는 피했지만, 교수님들의 따가운 눈총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며 우는소리를 내는 김태형을 한심하게 쳐다봐주었다.

새 학기가 되고 달라진 점이 또 하나 있다면, 1학년들에게 담당 선배가 생겼다는 점이다. 짝꿍 같은 거라고 보면 될 것이다. 아무튼 내 담당 선배는 글렌이란 이름을 가진 남학생으로, 군사학부 4학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보통 담당 선배가 하는 일이라면 담당 후배의 훈련을 봐주거나, 가벼운 대련을 함께해 주는 일을 하는데, 글쎄, 글렌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말투나 행동이 여간 가벼운 게 아니라 한량이 아닌가 싶었는데, 또 몸놀림을 보면 그렇지도 않아 번번이 대련에서 패하고 말았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도 대련에서 글렌을 이겨먹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까지면 그래, 노력의 차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겠건만 이 미친놈은 기어이 한두 마디씩 꼭 얹어서는 내 성질을 박박 긁어대는 것이었다.

"어이구, 그렇게 느려 터져서야…. 스치지도 못하겠네-,"

이렇게 말이다. 글렌과의 대련에서 열세 번째 패한 날엔 결국 성질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탓에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더랬다.

"너 졸업하기 전에 내가 너 한 번은 이긴다!!"

뭐가 그렇게도 웃긴지, 배를 부여잡고 웃어젖히는 글렌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존나 얄미웠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학기 내내 글렌을 이기지 못했다. 실력은 늘었지만 그마저도 인정하기 싫어 이를 박박 가는 나를 보며 글렌은 또 웃음을 터트렸더랬다.

그 해의 겨울엔 여름과 마찬가지로 제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지난여름에 우리의 뒤를 바싹 추격하며 네 번째 기록을 홀라당 가져간 '제외된 플레이어' 때문에 바짝 긴장한 채 여행을 시작했지만, 어쩐 일인지 '제외된 플레이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찝찝한 일이었으나, 이럴 때일수록 격차를 조금이라도 더 벌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제국의 겨울은 추웠다. 그 추운 날씨에, 우리는 제국에서 가장 험준하기로 유명한 일레니즈 산맥에 올랐다. 꼬박 삼 주를 산맥에서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맥에 갇혀있었다. 앞서 말했듯 근원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험준한 지형 그 깊은 곳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험난한 산맥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을 골라 찾아다니는 우리는 목숨을 걸고 산맥을 뒤졌다. 절벽에서 미끄러져 뒤통수가 깨지기도 하고, 상급 마물을 만나 팔 한 짝이 덜렁거릴 정도로 뜯겨나가기도 했다. 정호석이 치유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라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진즉에 사이좋게 황천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겨우겨우 근원을 파괴하고 삼 주 만에 일레니즈 산맥에서 벗어나던 날, 여관으로 돌아온 우리를 여관 주인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죽은 줄 알았다는 그녀의 말은 웃고 넘겼다. 실제로 반쯤 죽다 살아났다는 말은 구태여 보태지 않았다. 그간 편지가 어마 무시하게 왔었다며 우편물을 건네주는데, 5명분의 우편 중 3분의 2가 진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조금 창피하면서도,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허기진 배를 대충 채우곤, 가물거리는 눈을 겨우겨우 떠가며 진에게 보낼 편지를 꾹꾹 눌러썼다. 물론, 편지에도 죽다 살아났다는 말은 쏙 빼놓았다.

그 겨울에 우리는 비비안의 기록을 찾는 것을 마지막으로 해산했다. 끔찍하게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봤자 새 학기까지 2주 남짓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김태형은 사정상 루미안 후작가로 갈 수가 없어서 전정국을 따라 황궁에서 지냈다. 민윤기와 정호석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나도 공작 저로 돌아갔다. 오르테 부인이 나더러 살이 너무 많이 빠졌다며 엉엉 우는 탓에, 그날 저녁은 정말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 나서야 겨우 식탁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학년이 바뀌었다. 진은 저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한 상태였기에 이번 학기에 아카데미로 가는 것은 나 혼자였다. 아카데미에 도착해, 새로운 기숙사를 배정받고 나니 실감이 나더라, 내가 2학년이라는 사실이. 그 말은 즉, 내가 이곳에 떨어진지 벌써 1년이나 되었다는 뜻과 같았다. 현실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져 그 해 입학식은 조금 우울하게 보냈다. 그마저도 글렌 덕분에 싹 사라졌지만. 5학년이 된 글렌(아카데미의 졸업학년은 5학년이다.)은 여전히 내 담당 선배였고, 나는 여전히 글렌의 담당 후배였기에, 나는 여전히 글렌과 연무장에서 대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연무장을 한 번 구를 때마다 활짝 웃는 그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진짜 개 열받는다.

그리고 글렌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 뺀질이가 무려 제국 제1 기사단장의 차남이라는 사실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기사단장 아들이면 황궁 기사단에나 들어갈 것이지 왜 아카데미에서 뭉개고 있냐고 바락바락 대들었다가 훈련용 막대로 이마를 맞았다. 혹이 났다. 김태형과 전정국이 이마에 난 혹을 보고 좋아죽으려 하길래 똑같이 만들어주었다.

아무튼, 2학년의 첫 학기도 별 탈 없이 지나갔다. 황궁에 있다 온 뒤로 전정국의 분위기가 묘하게 날카로워진 감이 있지만, 원래의 '카일로스 체슬라 폰 크레아'의 영향이려니 생각하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김태형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깝죽대고, 여전히 늦잠을 자고, 여전히 낙제를 간신히 면했다. 정호석과 민윤기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았다.

진은 졸업 후 수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알엠과 지내기로 했다. 황궁에서 일한다나, 아무튼 그 덕에 방학 때만 주고받던 편지가 학기 중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종이 몇 장을 채우고 있는 잔소리에 나는 편지를 읽는 것을 포기하고는 눈을 감았다. 앓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제국에서 두 번째로 맞는 여름날, 제국 전역을 순회한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타국으로 떠났다. 제국만 수색하면 될 줄 알았건만, 새로 부여받은 퀘스트 창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데로바 왕국'이라고 쓰여있는 탓에 이마를 짚었더랬다. 크레아 제국이 있는 이 대륙엔 제국을 제외하고도 세 개의 왕국이 더 존재했는데, 이제는 수색 범위가 제국에서 대륙 전체로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죽상을 하며 짐을 싸는 내 머리를 진이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가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시작했던 여행은 생각 외로 즐거웠다. 아마도 데로바 왕국의 분위기가 제국과는 퍽 다른 느낌을 주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국 관광을 핑계 삼은 근원의 수색은 퍽 시시하게 끝이 났다. 제국에 비하면 데로바 왕국이 매우 작은 축에 속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연찮게 도착한 작은 마을의 우물에서 근원을 발견한 전정국이 냅다 근원을 부숴버림으로써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그렇게 데로바 왕국에서의 일정은 단 4일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 만에 끝나고야 말았다.

데로바 왕국에서 옆 나라인 히샤크 왕국으로 우리는 목적지를 바꾸었다. 말이 바로 옆 나라지, 실상은 산맥 두어 개를 넘어가야 하는 터라 생각보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히샤크왕국을 향해 가는 중에도 나는 꾸준히 진과의 연락을 이어갔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편지를 나르는 전서구는 언제나 정확하게 우리 일행이 있는 위치를 찾아냈다. 산맥을 절반쯤 지나왔을 무렵 나는 진으로부터 퍽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글렌이 죽었다. 수도의 귀족 피습 사건에 휘말린 탓이라고 했다. 글쎄, 그래도 제 아버지가 제국 제1 기사단장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사명 하에 앞장섰다 휘말리게 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서글픈 마음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글렌을 위해 돌탑을 세운 뒤 짧은 명복을 빌었다.

하필이면 제국의 중심지라 불리는 수도에서 일어난 피습 사건이라 하니, 불안함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과 알엠은 수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었으니까. 혹여나 휘말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조심하란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써 전서구에게 들려보냈다. 불안함 때문인지 전서구가 오는 날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혹여 피습 사건에 휘말린 건 아닐까, 죽어버린 건 아닐까, 안절부절하며 이따금 눈물을 보이는 날 전정국과 김태형이 다독였다. 민윤기는 여행 내내 늦춰본 적 없는 일정을 다시 조정하자며 일정을 늦추었고, 정호석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재료들로 따뜻한 수프를 끓여 내게 내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서구는 머지않아 우리 일행을 다시금 찾아왔다.

[율리아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걱정 마.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은 아니니까. 간 크게 오르테 공작가를 공격할 미친놈은 제국에 없어. 있더라도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일 테니 당장은 아니겠지. 당장은 안전하다는 소리야. 그러니 걱정 말고 너는 네가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길 바라, 율리아. 우린 정말로 괜찮으니까.]

놓여오는 마음에 눈물을 터트렸다. 한참을 울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잠으로 피로를 푼 나는 일행들에게 괜찮으면 지금 바로 출발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군말 없이 제 짐들을 챙겼다. 그래,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해야 했다. 이들에게 '진짜' 동생을 돌려주기 위해서라도.

데로바 왕국에서 히샤크 왕국까지 오는 데에는 꼬박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진과의 연락 또한 끊기지 않았기에 나는 한층 더 안심하고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근원이 하필이면 히샤크 왕국 근처의 '바닷속'에 있었다는 게 문제였지. 여행을 다니며 종종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누어 근원과 기록을 수색하기로 했다. 그 무렵 시스템, 그러니까 '지민'이 돌발 미션의 보상으로 스킬석을 나누어 주었는데, '잠수'스킬을 얻게 된 나와, 포탈 스킬이 있는 전정국이 바닷속을 수색하기로 결정됐다. 꼬박 2주를 바닷속에서 살았다. 잠수 스킬은 꽤 유용한 스킬이라 나는 오랜 시간을 바닷속에 있어도 문제가 없었고, 전정국은 포탈을 통해 수면 위와 바닷속을 왔다 갔다 하며 수색을 계속했다. 마침내 찾아낸 근원을 파괴하고 여관으로 돌아온 날, 김태형은 나와 전정국에게 바다 냄새가 진동을 한다며 코를 틀어막았다. 결국 열받은 전정국에게 한대 쳐맞긴 했다.

2주간 쌓여있던 편지를 뒤늦게 뜯어보았다. 웬일로 도착한 편지의 양이 평소의 2분의 1 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이상함을 깨닫지도 못하고 편지를 뜯었다. 여전히 내 걱정만이 한가득 담겨있는 진의 편지였다. 한 장씩 편지를 읽던 내 손이 빨라졌다. 손이 벌벌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편지를 뒤적거렸다. 편지가 쓰인 날짜들을 하나씩 확인한 나는 책상 위에 편지를 내팽개친 채 일행들이 있을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편지의 마지막 날짜는 일주일 전이었다.

[율리아에게,

히샤크 제국에 도착했다며? 데로바 왕국으로는 한번 가 본 적이 있는데, 히샤크 왕국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어떨지 궁금하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 같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나와 알엠은 여전히 타운하우스에 머무르고 있어. 전에 말했던 귀족 피습 사건은 차차 마무리되어가는 추세야. 피습을 주도한 자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그 잔당들을 꽤 많이 잡아들였거든. 그러니 이젠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율리아에게,

피습 사건이 금방 마무리될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봐. 남아있는 잔당들이 입을 열지 않는 탓이 크다고 알엠이 그러더구나. 조금 가라앉았던 수도의 분위기도 조금 형형해졌어. 여차하면 다시 공작령으로 내려가야 될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참, 답장이 없던데 별일 없는 거지? 바빠서 그렇다고 믿을게.]

[율리아에게,

나와 알엠은 수도에 남아있기로 했어. 괜히 움직였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알엠이 그러더구나. 지금 수도의 상황을 보아하니 영 틀린 말은 아니라 남아있기로 결정했어.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오르테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는 안전하니까.]

[율리아에게,

율리아, 네가 히샤크 왕국에 머무르는 게 언제까지라고 했지? 가능하다면 히샤크 왕국에서 좀 더 지내다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피습 사건이 수도뿐만 아니라 각 영지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했거든. 일이 커졌어. 제국으로는 최대한 늦게 돌아오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율리아에게,

절대, 제국으로 오지 마.]

진이 위험하다.

















하이고.. 이거 뭐 한 달에 한 번씩 쓰는듯...ㅋㅋ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ㅠ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