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부 전선배
그 이후로 학교 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다미의 예상대로 부과대는 징계를 받은 후 휴학했고, 여주는 과대의 결정으로 A조에서 B조로 옮겨갔다.
친구들이 A조에 있다는 얘기를 해도, 과대는 아직 A조에 부과대와 친한 동기들이 있어 보복 위험이 있으니 안 된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아니... 그럼 걔네보고 옮기라 그러지, 왜 내가 가냐고요....
덕분에 유진, 다미와 헤어지고 B조에 소속됐다. 이쯤되면 예상했겠지만... B조에는 정국과 대식이 있어 훈련 쉬는 시간에 간간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함께 밥을 먹는 게 퍽 자연스러운 사이가 됐다. 정국과 번호 교환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야, 대식아. 오늘 저녁 부대찌개 어때."
"나 오늘 약속 있는데."
"거짓말하지 말고. 우리 자주 가는 부대찌개집에 전화해 놓는다?"
"아, 진짜라고-. 여동생 와서 밥 먹여야 해."
"여동생? 너 동생도 있었냐."
탈의실에서 머리를 말리며 나오는 두 사람을 보며 바닥에 쭈구려 앉아있던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배, 투닥거리는 두 사람에게 얼른 오라며 소리치려던 여주는 손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잠시 말을 멈췄다.
윤여주
오빠 나 진짜 안 볼 거야?
...보고 싶어
나랑 얘기 좀 하자 응?
...윤여주. 요새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지낸 이름이 다시 살아났다. 응급실. 부대찌개 먹으러 갈래? 김대식은 약속 있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정국이 머리 위에 얹었던 수건을 어깨에 걸치며 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정국을 빤히 바라보던 여주는 응? 하고 다시 묻는 정국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손에 들고 있던 정국의 핸드폰과 지갑을 넘겼다. 같이 맡겼던 대식의 물건도 함께였다.
"그... 죄송해요. 저도 약속 있는 거 깜빡했어요."
"뭐야, 왜 다들 나만 빼고 바빠."
"...죄송해요."
"뭘, 친구 없는 내가 이해해야지."
"그런 뜻은 아닌데...."
난감해하는 여주의 표정을 본 정국은 큭큭 웃으며 핸드폰을 켰다. 눈치를 보던 여주가 고개를 들자 언제 웃었냐는 듯 딱딱해진 정국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내 여주의 시선을 느꼈는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대식아, 오늘은 여기서 파해야겠다. 머리는 집에 가서 말리고, 새끼야."
"이왕 말리는 거 다 말리고 가야지. 내 핸드폰은?"
"여기."
"감사. 여주는 밥 먹으러 안 가?"
여전히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터는 대식이 여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도 약속이 있어서요. 여주는 정국에게 했던 답을 반복하며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덧붙였다. 금방 몇 걸음 못 가 정국에게 붙잡혔지만.
"어디서 만나는데?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금방 앞에서 만나요."
"그럼 앞에까지만,"
"먼저 가 볼게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행여 또 붙잡힐까, 학교를 나가는 여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렇게 윤여주의 이름을 볼 때마다 도망치듯 구는 이유를 여주 자신도 모르겠다. 그저 언젠가부터 동명이인인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게 거슬렸고, 그중 항상 못난 쪽이 자신이 된 게 자존심이 상했다.
...석진이 좋아하는 사람이 '고여주'가 아닌 '윤여주'라는 것도.
"뭐야, 너 왜 그래? 상대가 거절하면 깔끔하게 넘어가던 애가 왜 갑자기 데려다주겠다고 두 번이나 붙잡아."
"...그러게."
"너 진짜 여주한테 관심있냐?"
"...안 가냐? 여동생 기다리겠다."
미친놈. 말을 돌리는 정국의 대답에 대식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정국은 멀어지는 여주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의문을 던졌다. 그러게... 내가 왜 붙잡았을까. 쟤는 또 왜 불편해 하는 거고.
순간 석진, 윤여주와 같이 학식 먹을 때 어둡던 여주의 얼굴과 방금 막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여주의 얼굴이 겹쳐보여 설마...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윤여주
오빠가 나랑 얘기할 때까지
오빠 집 앞에서 기다릴 거야
톡 보면 전화해
"...아, 진짜."
그새를 못 참고 또 보낸 카톡에 정국은 양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정국의 핸드폰을 들고 있던 것도 여주다. 학식 먹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고여주와 윤여주. 뭐가 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왠지 여주가 자리를 피한 이유에 윤여주가 포함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국은 한숨을 쉬며 저장되어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연결음이 다 가기도 전에 연결된 전화. 정국 오빠...? 익숙하게 자신을 이름을 부르는 상대에 정국은 물기 있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낮게 말했다.
"어디야."
– 오빠....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 ....
"얘기 좀 하자. 어디야."
* * *
깜빡. 깜빡.
몇 번째일지 모르는 초록불을 떠나보내고. 여주는 붉게 변한 신호등을 빤히 응시하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매번 이렇게 도망만 치면 뭐가 달라진다고.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에 힘이 절로 빠졌다.
"...주,"
"...."
"여주야!"
"어? 응? 네?"
깜짝이야. 여주는 자신을 불러세운 상대를 보고 놀라 어버버거렸다. 선배가 왜 여기.... 학교가 아닌 밖에서 석진을 마주한 건 처음이라 마주한 느낌이 색달랐다.
걸을 땐 정신 차리고 걸어야지, 여주야. 뒤에서 몇 번이나 불렀는데. 조심해. 석진이 아슬아슬하게 횡단보도 안전선 위에 서 있는 여주의 옷깃을 조심히 잡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로 인해 확 좁혀진 거리에 여주는 눈을 깜빡이며 화들짝 놀라 석진에게서 두 걸음 멀어졌다.
"그... 저... 감사합니다."
"감사하다고 하는 것치곤 너무 빨리 떨어지는데. 혹시 내가 무례한 짓했나...?"
"아, 아니요! 그냥 제가 좀 놀라서...."
여주의 고개가 좌우로 파닥파닥 움직였다. 괜한 오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에 나온 필사적 몸부림이었다. 상처받은 척 눈꼬리를 축 내리고 있던 석진은 바로바로 튀어나오는 여주의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민망해진 여주가 입술을 말아넣으며 붉어진 귓볼을 긁적였다.
"훈련 끝나고 나오는 길이야?"
"...네. 지금 막 끝나서요."
"밥은 먹었어? 저녁 시간 다 된 것 같은데."
"아직이요. 이제 집 가서 먹으려고요."
"그럼 나랑 같이 먹을래?"
"네?"
"원래 정국이랑 먹으려고 했는데, 얘가 아까부터 계속 통화 중이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오늘은 정국이 대신, 정국이 후배 여주가 나랑 같이 밥 좀 먹어주라!"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석진이 여주의 가방끝을 붙잡고 달랑달랑 흔들었다. 석진의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어 여주의 뺨이 점점 붉어지고, 이를 스스로 느꼈는지 여주는 고개를 돌려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아, 알겠어요...."
"좋았어! 메뉴 선정은 걱정하지 마. 내가 끝내주게 맛있는 대로 데려다 줄게."
"네... 여기 신호등 건너면 돼요?"
"응. 아, 잠깐만."
석진의 시선을 피하려 몸을 돌린 여주는 마침 초록불로 바뀌는 신호등을 보고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두 걸음째 가기도 전에 석진의 손에 붙잡히고, 왜냐고 묻기도 전에 갑자기 무릎을 꿇는 석진에 놀라 어, 어...? 하는 멍청한 소리만 냈다.
석진의 손이 여주의 신발끈을 쥐어 예쁘게 매듭짓는다. 초록색 신호등은 27, 26, 25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다 됐다. 석진의 손에서 떨어진 신발끈이 여주의 발을 적당하게 조였다. 몸을 일으키지 않은 석진이 고개만 들어올려 여주를 바라보자 시선을 마주한 여주는 눈을 피하지 못하고 떨리는 마음에 애꿎은 입술만 물었다.
"신발끈은 잘 묶고 다녀야지."
"...."
"넘어지면 창피하잖아."
"...."
"가자, 신호 바뀌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