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부 전선배
아, 혹시 다들 수학 잘하나? 기하나 미적분, 그런 거 말고 확률 말이야. 만약 내가 문제 출제자라면 이렇게 출제했을 것 같아.
선배의 식사 제안을 거절했는데, 짝남과 함께 간 식당에서 선배를 만날 확률은? 거기에, 짝남이 좋아하는 여자가 선배와 함께 앉아있을 확률은?
놀랍게도, 그 상황이 일어났어.
"어... 정국이?"
"...."
"여주... 도 같이 있었네?"
여기서 석진이 말하는 여주는 '고여주'가 아닌 '윤여주'. 어색한 분위기 속 눈치를 보던 여주는 순간 저도 모르게 윤여주의 맞은편에 앉은 정국과 눈이 마주쳐 침을 꼴깍 삼켰다. 처음 보는 눈이다. 지금껏 마주했던 정국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달라 몸에 힘이 들어갔다.
"뭐... 이렇게 된 김에 그냥 같이 앉을까? 마침 테이블도 4인용인데."
"...석진 오빠, 미안한데,"
"그래. 같이 앉자."
"오빠."
"어차피 다 아는 사이잖아. 쟤도, 너도."
쟤도, 너도. 하는 정국의 말에 뼈가 있다. 그것을 느낀 건 여주만이 아니었는지 윤여주가 정국을 한 번 째려보곤 고개를 돌렸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석진이 먼저 윤여주의 옆자리에 앉으니 저절로 정국의 옆자리가 비었다. 여주도 슬금슬금 걸어가 정국의 옆자리에 앉은 뒤 괜히 팔을 쓸었다. 식당 내 온도는 딱히 낮지 않은데, 이 자리가 유독 추운 느낌이었다.
"...약속이, 석진 형이랑 있는 거였어?"
"네? 아... 네, 뭐...."
몸을 살짝 기울인 정국이 여주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얼굴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 탓에 맞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정국이 여주의 답을 의심해도 별 수 없었다. 이미 윤여주와 함께 하는 정국을 마주친 이후로 여주는 과부화가 왔으니까.
"너희 온 지 얼마 안 됐어? 둘다 음식에 손도 안 댔네."
"...응. 입맛이 없어서."
"그럼 여긴 왜 왔대. 여기 꽤 비싼데. 여주야, 먹고 싶은 거 말해. 밖에서 같이 밥 먹는 건 처음이니까 내가 사 줄게."
"어, 저는 괜찮,"
"그놈의 여주, 여주, 여주!!! 도대체 누굴 부르는 거야!! 오빠, 왜 쟤한테 여주라고 해? 여주는 나잖아, 나 윤여주!!!"
정국과 여주를 째려보던 윤여주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여주야. 그래, 너 여주 맞아. 당황한 석진이 주변 시선을 의식하며 윤여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국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미간을 구기며 윤여주를 응시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꾸만 귀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렸다.
"마실래?"
"...네?"
"필요할 것 같아서."
"아... 감사합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 정국은 태연하게 물잔을 건넸다. 마침 긴장한 탓에 목이 바짝 마른 여주는 거절하지 않고 받았으며, 물잔을 입에 대 물을 마시려던 순간,
탁-
누군가의 손에 의해 들고 있던 물잔을 놓쳐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물잔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여러조각으로 깨져버렸다. 입으로 넘기려던 물은 턱을 타고 흘러 옷을 적셨고, 그 뒤로 다시 한 번 얼굴에 물줄기가 날아왔다.
촤악-
윤여주의 손에 있던 물잔이었다.
"여주야!"
"윤여주!!!"
"아...."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마냥 축축해진 여주. 옆자리에 앉아있던 정국은 화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석진은 윤여주의 손에서 잔을 뺏어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혹여나 이 잔 또한 깨뜨릴까 봐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석진에게 손목이 잡힌 윤여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석진과 정국을 번갈아 쳐다봤다. 만약 다른 사람이 봤다면 누가 봐도 피해자는 윤여주인 것처럼, 아주 가녀린 모양새였다.
"왜... 왜 나한테 화내?"
"뭐?"
"왜 나한테 화내냐고! 오빠들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오빠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야."
기어코 윤여주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예뻐 보여 여주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소문이 맞긴 했네. 아이돌 준비를 했다는 말이 돌 정도로 예쁘다는 거.
"내가... 내가 먼저였잖아. 정국 오빠 좋아한 것도 내가 먼저고, 석진 오빠랑 키스한 것도 내가 먼저인데, 왜 쟤를 감싸고 돌아?"
"너 미쳤어?"
"내가 쟤보다 더 예쁘고 날씬하고 성격 좋기까지한데, 왜 자꾸 쟤랑 다니냐고!!!"
...유치하다. 윤여주의 악에 받친 말을 들은 여주의 감상평이었다.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자신과 키스한 사실이 공개된 게 부끄러운지 석진이 얼굴을 붉히며 윤여주의 팔을 잡았다. 정국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윤여주를 응시하는 중. 주위 사람들 시선도 부담스럽고, 축축한 옷에 찝찝함까지 느끼는 여주가 참다 못해 입을 열려 할 때, 그 틈을 비집고 윤여주가 다시 외쳤다.
"내가 오빠 좋아하는 거 알잖아."
"...."
"나... 진짜 오래 기다렸어. 이만하면 된 거 아니야?"
"...."
"응? 정국 오빠...."
애정하게 정국의 이름을 부르는 윤여주에, 이제는 석진의 표정까지 굳었다. 정확히는 슬퍼보이는 것 같았다.
"나 너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오빠."
"작작해. 이 말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
"벌써 3년째야. 너랑 엮이는 거, 진짜 지긋지긋해."
"...."
"그만해. 나 좋아하는 것도, 고여주랑 비교질 하는 것도."
...네? 뜬금없이 튀어나온 제 이름 석자에 여주는 눈을 크게 뜨고 정국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정국이 여주를 힐끗 바라보곤 제 외투를 벗어 여주에게 던졌다. 몸에 걸치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윤여주는 울음을 삼킨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여주야...! 뒤늦게 석진이 윤여주를 불렀지만,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석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석진이 힘들어 하는 이유가 윤여주인 것을 알아 마음이 아팠다.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이 여러 번 들었다 내려지고, 꾹 다물지 못한 입술이 달싹거리길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용기를 내 석진에게 손을 뻗었을 때는, 정국의 손에 잡혀버렸다. 정국의 손을 따라 여주의 손이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정국과 손을 맞잡은 상태라는 것.
"형도 이제 그만해."
"...."
"...윤여주가 형 이용하는 거, 형도 알고 있잖아."
"...."
"모르는 척, 못 들은 척, 이해 못한 척. 언제까지 그럴 건데."
"...."
"형."
정국이 입술을 짓이기며 석진을 불렀다. 하아, 하고 숨을 내쉰 석진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미소 짓는다.
"...내가."
"...."
"내가 알아서 할게."
"...형."
"그렇게 할게, 정국아."
제 할 말을 다 마친 석진이 윤여주가 놓고 간 물건을 챙겨 식당을 빠져나갔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하는 멍청한 의문따위는 들지 않았다. 방금 보게 된 석진의 얼굴은,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의 얼굴이었으니까.
두 사람만 남게 된 테이블에선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정국은 아직 여주에게 한 윤여주의 행동에 화가 나 있었고, 여주는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그냥...
마음이 아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