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부 전선배
순대국 하나에 소머리 해장국 하나, 뼈해장국 두 개. 오랜만에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온 여주는 쉴 새 없이 떠드는 유진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묵묵히 뼈해장국의 살을 발라먹었다. 평소였다면 대꾸 없는 여주와 다미에 지쳐 금방 나가떨어졌을 유진이지만, 오늘은 그들 사이에 새로운 인물이 껴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헐, 진짜요?! 저 거기 자주 가는데!"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헐, 아니, 진짜, 대박 을 붙여가며 호응해 주는 아진 때문이다. 여주가 B조로 옮기고 A조에서 둘이서 다니는 것에 외로움을 느낀 건지 유진이 아진과 함께 다니자고 다미에게 졸랐더랬다. 귀엽고, 말 잘하고, 싹싹하고, 특히 여주를 좋아하는 게 제일 마음에 든다면서.
딱히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막지 않는 다미는 알아서 하라며 허락했고, 그로 인해 결성된 게 지금의 파티원.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다미는 아진과 함께 다니기로 한 이후 약 삼 일 뒤에 바로 후회했다고 했다.
여주는 유진의 하이텐션을 적당히 쳐내 적당한 침묵을 이어가도록 있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와 정반대인 아진은 되려 유진의 텐션을 높이기만 했으니까.
며칠 새에 볼살이 조금 빠진 것 같은 다미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여주는 예쁘게 잘라놓은 깍두기를 다미의 숟가락 위에 얹어줬다. 다미가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깍두기를 입에 넣었다.
"아, 맞다. 그거 들었어? 며칠 전에 누가 길에서 윤여주랑 석진 선배랑 싸우는 거 봤대."
"...."
"윤여주는 울고 불고 막 소리치는데, 석진 선배가 그냥 안아주면서 주위 사람들한테 미안하다고 했다더라."
멈칫. 국물을 뜨던 여주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를 본 다미가 유진에게 다른 얘기 하자며 말을 돌리려는데, 그보다 빠른 아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길거리에서 싸울 정도면... 헤어진 건가? 달그닥. 입맛이 없어진 여주가 결국 숟가락을 내려놨다.
"몰라, 그건 아닌 것 같던데. 아까 도서관에서 석진 선배 잠깐 마주쳤는데 윤여주 전화 받고 나가더라. 대화 들어보니까 윤여주 어디 아픈 것 같더라고."
"야, 야. 다른 얘기 해. 뭔 재미도 없는 남의 연애사만 계속 말해."
"뭐래! 원래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는 거거든! 그러고 보니 너 소개팅은 어떻게 됐어? 소개팅을 했으면 이 언니한테 파딱파딱 결과를 알려줘야지~!"
다행히 대화는 다미가 유도한 대로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다음 주제가 자신의 연애사가 될 줄은 몰랐던 것 같지만. 어? 선배 어디 가요? 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주를 보고 물었다.
나 다음 훈련 있어서. 먼저 갈게. 너희는 천천히 먹고 가. 여주는 만 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짐을 챙겨 나갔다. ...저 뭐 잘못했어요...? 어딘가 불편한 표정의 여주를 본 아진이 눈치를 보며 눈꼬리를 내리자 다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 *
탈의실에서 도복을 갈아입고 훈련장으로 향한 여주. 아직 훈련 시작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지만 이미 자신보다 먼저 훈련하고 있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 일찍 가는 발걸음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어, 여주. 웬일이야. 아직 한 시간 남았는데."
"시작 전에 몸 좀 풀려고요. 혹시 제가 방해했어요?"
"아니, 전혀. 말동무 생겨서 좋네."
땀을 흘리며 물을 마시던 정국이 씩 웃었다. 그 미소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여주가 정국에게서 등을 돌리니, 여주야. 하는 부름이 들린다. 식당에서 윤여주와 일이 있던 이후로 정국은 부쩍 여주의 이름을 자주 불렀다. 여주는 그게 퍽 부끄러웠다.
"괜찮으면, 내 상대 좀 해 줄래?"
"...제가요?"
"응. 혼자 할 수 있는 건 다 해서 지금 대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얘가 늦잠 잤다고 한 시간 뒤에 온대. 걔 올 때까지 쉬고 있는 건 아까워서."
"아...."
물병의 뚜껑을 야무지게 잠가 단상에 올려놓는 정국의 행동을 홀린 듯 지켜보던 여주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 볼게요.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잡아둬야 했다.
매트 위에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예의를 갖추고 자세를 잡았다. 여주는 정국의 실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그저 대식이 정국과의 경기 후 정국을 '무서운 놈'이라고 칭하는 것만 들었을 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훈련하는 틈에 간간이 보기라도 할 걸.
"무슨 생각해."
"...!"
팔을 뻗은 오른쪽 어깨깃이 붙잡혔다. 엎어치기...! 정국에게 끌리지 않으려 팔꿈치를 몸쪽으로 붙이자 그대로 다리가 걸렸다. 정국의 팔에 기댄 몸이 둥 떠 바닥에 떨어진다.
쿵-
등이 매트에 닿아 큰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시야가 천장으로 향한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와... 빠르다. 체급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해도 다른 남자들한테는 3분도 버틸 수 있었는데, 정국에겐 15초도 되지 않아 바닥에 꽂혔다.
"방어 잘하네."
"...."
"나도 놀랐다. 엎어치기 하려다 바로 받다리로 바꿨잖아."
"...다시."
"응?"
"다시 해 주세요."
매트에서 벌떡 일어난 여주가 정국을 마주보고 자세를 잡았다. 아까와 달리, 아니 아까보다 더 반짝이기 시작한 여주의 눈을 본 정국은 잠시 눈을 크게 떠보이다 이내 미소 지었다. 그래. 한 번 해 봤으니까 이젠 빠져나가기까지 해 봐. 정국이 자세를 낮췄다.
탁, 탁.
서로의 옷깃을 향해 뻗는 손을 쳐내며 점점 거리를 좁혔다. 정국이 다가오면 여주가 피하고, 여주가 다가가면 정국이 피했다. 여주가 정국의 가슴깃을 잡아 당기는 순간, 정국이 여주에게 몸을 가까이 붙여 받다리를 후려쳤다.
쿵!
직각으로 그대로 바닥에 눕혀진 여주는 웅- 하고 울리는 머리에 인상을 쓰고 놓지 않은 정국의 가슴깃을 옆으로 끌어냈다. 혹여나 여주의 어깨가 다치진 않을까, 여주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있던 정국은 여주의 힘에 이끌려 한 바퀴를 굴렀고, 이번에는 정국이 여주를 끌어 한 바퀴를 굴렀다.
엎치락 뒤치락 서로 방향을 바꿔가며 굴러가던 두 사람은 여주의 어깨가 벽에 닿아서야 멈췄다. 정국의 손은 여주의 어깨에, 여주의 손은 정국의 가슴깃에. 거친 숨을 색색 몰아쉬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
...가, 가까워. 뒤늦게 느껴지는 거리감에 여주가 놀라 먼저 손을 떼어냈다. 동그랗게 뜬 눈이 정국의 얼굴을 한가득 담아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고도 어깨를 놓지 않는 정국에 여주는 시선을 피하며 정국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정국의 그림자에 가려진 여주의 얼굴이 새빨갰다.
"서... 선배...."
"...."
"선배...?"
"...아."
여주가 정국을 두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정국의 몸이 멀어졌다. ...미안. 어색하게 내뱉은 말을 끝으로 정국이 여주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 저, 그, 괜찮... 아요. 눈에 띄게 피하는 정국에 여주가 눈치를 보며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언뜻 보인 귓볼이 불타는 것처럼 붉었다.
* * *
"정국아, 오늘 무슨 일 있냐. 컨디션 안 좋아?"
"...아닙니다."
"아니긴, 인마. 애가 아까부터 동태 눈깔 돼 가지고 집중도 못하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도복 똑바로 잡어라. 몇 번 잡으면 다 뜯어지겠네."
정국이 매트에서 몸을 일으키며 과대에게 사과했다. 교수가 사고를 당해 A조는 부과대가, B조는 과대가 맡아 훈련을 진행한 지 벌써 몇 달째. 그동안 실수 한 번 없던 놈이 오늘따라 단순한 공격에도 쉽게 넘어지니 과대는 걱정 어린 눈으로 정국에게 괜찮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따로 훈련 중인 동기들과 선후배들도 과대와 대련 중인 정국을 힐끔힐끔 보며 의외라는 듯 놀란 눈을 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정국이가 실수 남발하는 날도 있다는 둥 정신을 쏙 빼놓은 걸 보니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는 둥.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국처럼 아니 오히려 정국보다 더 실수를 많이 하는 이가 있었으니.
"여주야, 너 오늘 밥 안 먹었어? 애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라고 말한 거 아니고. 애들이 밥 안 사줘? 요새 대식이, 정국이랑 같이 다니는 것 같던데. 이 상놈의 새끼들을 확,"
"아, 아닙니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여주가 뻐근한 어깨를 부여잡으며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자세를 잡고 상대의 옷깃을 잡기도 전에 몸이 공중에 붕 떠 바닥에 꽂힌다.
쿵!
이것으로 여주가 K.O. 된 지 서른아홉 번째. 정국과 여주의 대련을 번갈아 지켜보던 대식은 벽에 기대 물을 마시며 옆에 있는 동기에게 은근슬쩍 말을 던졌다.
"야. 정국이랑 여주, 뭐 있는 것 같지 않냐."
"뭐가."
"아니, 갑자기 오늘따라 둘다 안 하던 짓을 하잖아. 나 오기 전에 훈련장에 둘만 있던데, 그때 무슨 일 있었나...."
"뭐래, 지금 둘다 상대하는 사람 안 보이냐? 복싱 선출 마동석 선배한테 1시간 동안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쟤는 오늘 할 거 다 한 거야. 게다가 고여주는, 시발. 쟤 사람 맞는지 의문이다. UFC 챔피언 마동순 선배를 상대하는데 기절도 안 하고 계속 일어나. 쟤 좀비 아니야? 아, 넷 다 존나 무서워."
"...."
소름이 돋았는지 동기는 어깨를 파르르 떨며 얼굴을 구겼다. 그에 대식의 시선도 정국과 여주가 아닌 마동석과 마동순에게로 옮겨간다.
한국체대의 최강 콤비, 마동석 마동순 쌍둥이 남매. 서로를 끔찍이도 아껴 같은 대학, 같은 학부로 진학하고, 마동석이 군대를 가 있는 2년 동안 UFC에 도전해 기어코 챔피언의 자리까지 쟁취한 마동순의 인생은 한국체대에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았다. 이번에 기존 부과대가 휴학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마동순이 들어갔다던데, 이제는 과대•부과대 콤비까지 노리고 있나 보다- 하는 말까지 돌았다.
마동석의 어깨에 번쩍 들린 정국이 바닥에 메쳐지고 마동순의 손에 잡힌 여주가 공중에 띄어올랐다. 끝끝내 그 둘의 마지막 모습까지 볼 자신이 없는 대식은 다 마신 물병을 내려놓으며 동기의 뒤를 따랐다.
"야, 우리도 딱 기절하기 직전까지만 하자."
"콜. 후배가 저렇게 열심히 버티는데 나도 해 봐야지. 들어와, 새꺄."
정국이랑 여주 사이에 뭔 일이 있었다니... 허참, 요새 연애세포가 많이 필요했나. 대식은 스스로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며 머리를 털어버리고 훈련에 집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둘에게 어울리는 친구가 되겠다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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