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부 전선배

유도부 전선배 13

유도부 전선배

※욕설이 많습니다. 트라우마를 유발시키는 요소가 있을 수 있으니 읽기에 앞서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훈련이 끝나고 샤워실에서 씻고 나오는 길.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짜내며 훈련장 앞으로 걸어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정국과 함께 서 있는 게 보였다.

"오빠, 진짜 이대로 나 안 볼 거야?!"

윤여주였다.

"하아... 내가 작작하라고 했지. 리듬체조부가 유도부 훈련장엔 왜 자꾸 찾아와."

"그럼 연락을 받던가!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카톡도, 전화도, 하다 못해 문자도!"

"차단했어. 번호 바꿔도 계속 차단할 거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오빠!!!!"

윤여주가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질렀다. 정국이 얼굴을 구기며 자리를 피하려 몸을 움직였지만 두 걸음도 못 간 채 윤여주에게 붙잡혔다. 정국의 팔에 매달린 윤여주가 눈물을 쏟아냈다.





"오빠 나 좋아하잖아... 내 생일 때 케이크도 사 주고, 성인 됐을 때 같이 여행도 가고, 나한테 예쁘다고도 해 줬잖아.... 오빠랑 같은 학교 다녔으면 좋겠다고 그랬잖아...!!!!"

"하아... 도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그만해, 제발."

"나 오빠 없으면 죽어.... 오빠 없이 못 사는 거 알잖아... 응?"

"윤여주. 적당히 해라."

정국이 윤여주의 손을 탁 소리나게 쳐냈다. 험악하게 굳은 정국의 얼굴이 지금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 분위기에서 내가 왔다고 말을 할 수도 없어 여주가 자리를 비키려던 찰나, 고개를 돌리던 정국의 시야에 여주가 들어왔다. 여주야. 정국이 여주를 불렀다.

"혼자 어디 가. 밥 먹으러 가야지."

"어... 그게...."

"대식이는 먼저 갔어. 우리끼리 가면 돼."

뭐라 할 틈도 없이 정국이 다가와 여주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여태 훈련을 제외하고는 신체 접촉이 없던 터라 여주는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을 이끄는 정국을 따라 걸었다. 여주...? 여주는 나잖아!! 한달음에 달려온 윤여주가 정국의 앞을 막아 서 정국이 붙잡고 있는 여주의 손목을 내려쳤다.

"야, 미쳤어?"

"왜 쟤가 여주야? 내가 여주야!!"

"너 왜 이래, 진짜!!"

"쟤는 불리는 별명도 많은데 왜 여주라고 불러!! 독종, 고구려, 뭐든 좋으니까 그걸로 쟤 불러. 오빠한테 여주는 나 하나면 되잖아!!!"





윤여주의 말에 정국과 여주가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이때까진 사석에서 윤여주와 만날 일이 없어 이런 성격인 줄 몰랐는데, 지금 보니 윤여주는 애 같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여주는 대충 윤여주가 하는 말로 그동안 윤여주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유추했다.

윤여주도 여주처럼 시시때때로 남들에게 비교를 받으며 지낸 것이다. 그 비교에서 누가 좋은 쪽으로, 누가 나쁜 쪽으로 표현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정국이 돌아온 후에 남들의 비교가 크게 작용한 것 맞는 것 같다.

스스로를 낮추고 반복된 인정으로 비교를 받아들인 여주와 다르게 윤여주는 그것을 못 견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국이 여주와 함께 지내는 걸 보니 더 배알 꼴리는 거고.

"저기요. 윤여주 씨."

결국 참다 못한 여주가 나섰다. 붉게 출혈된 윤여주의 두 눈이 여주에게 향했다.

"사사건건 비교 당하고, 내가 정국 선배랑 같이 다녀서 기분 상한 건 알겠는데. 그걸 이딴 식으로 풀면 안 되지."

"뭐?"

"나도 여주야. 넌 윤여주고, 난 고여주라고.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겠다는데 너한테 허락까지 맡아야 되니?"

"시끄러워. 넌 끼어들지 마!"

"지금도!! 난 이름보다 별명으로 많이 불려. 네가 방금 말한 그것들 말이야. 밉보이는 짓 하나만 해도! 넌 윤여주보다 구리니까 고구려야 같은 개소리나 듣는다고!"

여주의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들썩였다. 이 정도로 흥분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동안의 서러움이 터져나왔다. 잠깐의 정적 후, 여주의 말을 곱씹어 되새기던 윤여주는 헛웃음을 뱉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진짜 이 순간에도 윤여주는 짜증나게 예뻤다.





"너, 내가 석진 오빠 뺏어서 그래?"

"뭐?"

"됐어, 그럼 너 가져. 정국 오빠 돌아왔으니까 이젠 필요없어."

"...야."

"그니까 이제 정국 오빠 그만 내 놔. 정국 오빠한테 여주는 나 하나면 돼."

열을 낼 듯 뜨겁게 타오르던 여주의 눈빛이 한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석진을 정국의 대체품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그보다 정국을 물건 취급하는 윤여주의 태도에 더 열이 뻗쳤다. 선배가... 선배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데. 감히 그따위로 말해.

"...너, 방금 실수했어."

윤여주를 바라보는 여주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평소보다 톤이 낮아진 여주의 목소리가 정확히 윤여주에게 꽂혔다.

"정국 선배가 내 거인 적도 없고, 내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

"지금부터 그래 볼게."

"...뭐?"

"치열하게 아껴볼게. 사람을 그딴 식으로밖에 생각 못하는 너한테는, 선배 절대 못 넘겨."

여주가 옆에 있는 정국의 손을 보란듯이 잡아당겼다. 그런 여주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정국.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정국의 손을 꽉 잡은 여주는 뒤돌아 학교를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똑똑히 윤여주를 쳐다봤다.





"사랑받고 싶으면 그 썩어빠진 마인드부터 고쳐먹어."

"...."

"같은 여주로서 충고하는 거야. 윤여주."

* * *

"-주야."

"...."

"여주야."

"어, 네? 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여긴 가로등도 없는데."

정국이 여주의 손을 잡아당기며 여주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퍼뜩 들며 주변을 둘러본다. 어느새 깜깜해진 하늘, 가로등 하나 세워있지 않는 거리. 얼마나 정신을 놓고 걸었는지 이곳은 앞서 걸었던 여주도 모르는 길이었다.



아.... 괜히 자신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집에도 못 간 정국에게 미안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밤바람에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넘기려 손을 들어올리니, 무언가 같이 딸려 올라왔다. 뒤늦게 그것이 정국의 손임을 알아챈 여주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냈다. 아니, 빼내려고 했다. 정국이 힘주어 잡는 것만 아니었다면.

"선, 선배... 그, 손이...."

"얼마나 정신이 팔렸길래 손 잡은 것도 몰라."

"죄, 죄송...."

"다리는 안 아파? 우리 여기까지 한 시간동안 걸었어."

맞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을 들어 올려 여주의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꽂아준다. 그 행동이 퍽 자연스러워 멍하니 지켜보던 여주는 자신의 귓볼에 정국의 손 끝이 닿는 그 느낌에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

이 와중에도 여주의 손은 여전히 정국과 맞닿아있다. 시원한 밤공기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꽉 잡은 온기에 여주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스스로도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훈련 중에 넘어진 상대에게는 여자든 남자든 손을 뻗어 몇 백 번이고 일으켜 주었으면서.





"그... 선배."

"응."

기분 탓인가. 묘하게 정국의 얼굴이 밝아보인다.

"아까... 제가 윤여주한테 했던 말, 사과할게요. 죄송해요."

"응? 어떤 거?"

"막... 치열하게 아껴본다고...."

"...."

"막... 선배 못 넘긴다고...."

"...."

"했던... 그 말들이요...."

말을 잇는 여주의 목소리가 알게 모르게 작아지고 끝끝내 여주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머리카락 사이에 스치듯 보이는 붉어진 귓볼이 정국의 눈에 들어왔다. 정국은 당장이라도 여주를 품 안에 가두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입술 사이로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삼켜냈다. 비실비실 올라가는 입꼬리는 못 막았지만.

"미안. 사과 안 받을래."

"네?"

"윤여주한테 한 말 지켜. 치열하게 아껴주고, 넘기지도 마."

"무슨... 뜻인지...."

"추가로,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계속 고민해 보는 것도 좋고."

"...."





여주는 정국을 올려다 보며 두 눈을 꿈뻑꿈뻑. 정국은 그런 여주를 내려다 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시야가 잘 안 보일 만큼 주변이 어두웠지만 정국이 손을 잡고 놔주지 않는 탓에 거리가 가까워져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쿵. 쿵. 쿵. 쿵.

떨린다. 이 거리가, 이 순간이, 손을 잡고 있는 정국에게.

"여기 길 잘 모르지?"

"...."

"가자. 데려다 줄게."

맞잡은 손을 살살 당기는 힘에, 여주는 속절없이 정국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제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오로지 정국만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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