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남친과 동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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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그날의 기억이 사락-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갔고, 눈을 뜬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이 기억은 미성숙했던 시절의 한 부분으로 남겨두는 거야.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어보였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대로 계속 앉아있다간 예전 추억에 생각이 푹 잠길 것 같아 황급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해장할 거라도 간단히 만들어볼까? 할 거리가 생겨 다행이라는 마인드로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콩나물이랑 파랑 마늘이랑… 청양고추도 조금 필요할 것 같고…… 대학 시절부터 자취를 해서 요리 하나는 끝장나게 자신있던 나는 재료를 꺼내들어 당차게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아침 메뉴는 속을 달래기 위한 시원한 콩나물국에 포슬한 계란찜, 고기를 대체할 햄 등 꽤나 알찼다. 밥도 앉히고 국도 끓이고 이것저것 하다보니 김태형의 인기척 따위 느끼지 못한 나였다. 이제 상만 차리면 되겠다!
“거기서 뭐해?”
“흐업!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 아침 먹으려고?”
응, 해장하려고 콩나물국 끓였는데 너도 같이 먹자. 요리하는데 열중한 나머지 김태형이 언제부터 방에서 나와 나를 보고 있었는지 몰랐다. 갑작스레 들려온 김태형의 목소리에 몸을 흠칫한 나는 휙 돌아 김태형을 마주했다. 보아하니 막 일어나 씻고 나온 듯 머리가 젖어있는 김태형이었고, 어제 술을 많이 마신 게 생각나 같이 해장하자며 제안했다.
“그래, 나 머리만 말리고 올게.”
김태형이 머리를 말리러 방으로 다시 들어간 뒤, 나는 혼자 괜히 분주했다. 김태형이 나오기 전이 상을 다 차려놓고 싶은 이상한 욕심이랄까? 밥과 국을 떠 각자 자리에 그릇을 놓고, 계란찜과 구운 햄, 그리고 김치까지 나란히 놨다. 마지막으로 수저와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자 때맞춰 김태형이 나왔다.
“벌써 다 차렸어? 좀 도우려고 했더니…”
“차리기만 하면 됐는데, 뭘.”
“요리는 네가 직접 했을 거 아니야.”
“어려운 것도 아니었어. 얼른 와서 먹기나 해.”
나를 도우려고 했던 건지 서서 중얼거리는 김태형에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나도 김태형도 자리에 마주보고 앉아 아무 말 없이 수저를 들어 국물을 떠 마셨고, 다행히 입에 맞았는지 잘 먹는 김태형이었다. 엄마의 마음이란 이런 건가 하는 뿌듯한 마음에 미소를 지은 나는 구운 햄을 젓가락으로 집어 김태형의 밥 위에 올렸다. 그러자 김태형은 젓가락질을 멈춘 채 나를 빤히 바라봤고,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 김태형보다 더 당황해 안절부절했다. 그… 이게,
“네가 말한 친구 사이에는 이런 것도 포함인 건가.”
“아니, 차려준 거 잘 먹어주니까 뿌듯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해. 실수야.”

“사과는 됐다, 난 되게 좋았거든.”
김태형이 덤덤히 나를 응시한다.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김태형의 분위기에 잠시 의아했다. 그 잠깐의 새벽 사이에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린 건 아닐 테고… 변화의 이유를 찾으려다간 복잡해질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박고 밥을 퍼 먹기로 결정한 나였다. 시선을 내리깔고 밥을 한 숟갈 떠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때, 김태형이 내 얼굴을 한참 보더니 나에게 손짓했다.
“김여주, 잠깐 고개 좀 가까이해봐.”
갑자기 왜 그러는지 궁금해 눈썹을 올려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김태형이 하라는 대로 고개를 김태형 쪽으로 가까이 하는 내 모습이 퍽 웃겼을 거다. 김태형은 자신도 몸을 살짝 일으켜 내 얼굴로 팔을 뻗었고 김태형의 큰 손이 턱 옆쪽을 살며시 잡았다. ㅁ, 뭐하는데…! 김태형의 손길에 혹시나 얼굴이 빨개졌을까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김태형의 엄지 손가락이 내 입술 가까이 스쳤다. 살짝만 스쳤음에도 불구하고 스치는 그 순간, 온몸에 찌릿하는 느낌과 동시에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 나였다.
“눈 좀 뜨지?”
짧은 적막의 시간이 지나고, 김태형의 목소리가 들리자 미세하게 떨리는 몸을 뒤로 한채 눈을 떴다. … 방금 뭐한 거야?
“이거, 계속 입술에 붙어있길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얼굴이 빨갛게 변한 이유는 아까 김태형의 행동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김태형의 엄지 손가락에 붙어있는 저 하얀 밥풀 때문이었다. 인생, 당장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얼굴색은 전혀 태연하지 못했지만.
“… 앞으로는 그냥 말로 해. 괜히 막 그러지 말고.”
“뭐… 그래, 이번 건 나도 실수. 너도 나도 하나씩 실수했으니까 쌤쌤이다?”
왠지 모르게 김태형의 수에 넘어간 느낌이다. 쌤쌤이라고 말한 이후 큭큭 웃으며 남은 밥을 마저 먹기 시작한 김태형이 괜스레 약이 올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건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내 볼은 원래의 색을 다시 찾을 생각이 없어보인다는 거였다. 두 손으로 뺨을 감싸기도 하고, 손으로 부채질도 해봤지만 돌아오지 않아 포기한 채로 시선을 밥그릇에 두고 아침을 마저 먹었다.

다행히 그 뒤로는 정말 조용히 밥만 먹은 우리였다. 밥 한톨과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김태형을 보니 아까보다 더한 뿌듯함이 들었다. 나 역시 기분 좋은 배부름을 느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빨리 치워야 하는데… 귀찮지만 어차피 해야 할 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런 나를 김태형이 제지했다.
“그냥 앉아있어, 내가 치울게.”
“어? 아니야! 내가 할게.”
“아침도 네가 다 차렸으면서 뭘 또 해. 됐으니까 방에 들어가서 쉬던가, 저기 앉아있던가 해.”
그래도… 차리는 것보다 치우는 게 더 귀찮잖아…… 나도 나서서 함께 치우려고 했지만 내 어깨를 양손으로 잡아 꾹 누르는 김태형에 다시 의자에 몸을 붙이게 됐다. 김태형은 나를 앉혀두고서 그릇들을 옮기고 상도 깨끗히 닦은 뒤, 싱크대 앞으로 가 팔까지 걷었다. 어…! 야, 설거지는 내가 할게!
“말로 할 때 가만히 있어. 자꾸 뭐 한다고 나서면 안아서 방으로 넣어버린다.”
“여기 고무장갑 없단 말이야. 어울리지 않게 손이 약해가지고 세제 오래 만지면 습진 생기면서… 다른 건 네가 해도 되는데, 설거지는 내가 하게 해주라.”

“… 별걸 다 기억해.”
“너도 그렇잖아, 얼른 나와.”
내가 괜히 김태형을 말린 게 아니다. 김태형은 대학 시절부터 손이 약해서 손이 트고, 갈라지고, 심하면 습진까지 생기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핸드크림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그게 아직까지 습관이 되어 여전히 내 왼쪽 주머니에는 핸드크림이 항상 위치해 있었다. 자, 발라.
“핸드크림 아직도 가지고 다녀?”
“… 버릇이 들어서 그래. 안 넣고 다니려고 해도 습관처럼 챙기더라, 나도 모르게.”
“이래서 습관이 무섭지, 한 번 들면 그 습관에 대한 건 매번 떠오르니까.”
우리는 동시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김태형이 만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았고,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이 어색한 침묵이 싫어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물이 쏴아- 쏟아짐과 동시에 달그락달그락 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김여주, 이게 과연 친구가 맞을까? 난 아니라고 보는데.”
열심히 설거지를 하던 손을 잠깐 멈칫했다. 내 마음은 김태형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머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친구가 되기에 너무 많은 걸 알았고, 너무 많은 걸 기억했다.
*
[발문]
Q. 프로그램이 아닌 우연히 마주쳤다면 어땠을까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아마 모른 척 지나갈 것 같아요. 아는 척해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잡을 거예요. 그날 잡지 못했던 거, 몇 번을 후회했으니 잡고 놓지 않을 거예요.”
댓글 한 번씩 부탁드리고,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