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조작 동아리: txt [단편]

나의 작은 유토피아(2)

휴닝카이 시점


언제나 세상을 향해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살았다.

겉으론 웃으며 다정하게 굴다가도 내 본연의 존재를 알아채는 순간
무서운 괴물이라며 침을 뱉던 수많은 얼굴들.

사람들의 온기에는 언제나 싸늘한 기한이 정해져있었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식은 오직 하나였다.

가장 음습한 구석에서 스스로의 색깔을 완전히 지워내는 것.


그 지독한 숨바꼭질이 이어지던 어느 하굣길,
억눌러왔던 백사자의 흔적들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와
뒷산 수풀쪽으로 도망쳤을 때도 
내 마음은 온통 절망으로  뒤덮여 있었다.


뒤따라온 은서인과 눈이 마주쳤던 그 짧은 찰나,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수치심이 밀려왔다.


또다시 혼자가 될거하는 두려움에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지만,
내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인이는 차가운 비웃음 대신 내 발밑에 가만히 무릎을
굽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내 고독의 무게를
정면으로 응시해 주었다.


"작은 새가 되어줄게."


나조차 혐오했던 내 안의 맹수를 아무렇지 않게 꼭
안아주던 서인이의 잔잔한 목소리.

그 사소하고 무방비한 다정함이 살갗에 닿았던 순간,
얼어붙어있던 내 세계에 비로소 푸름 여름이 시작되었다.

빗장을 걸어잠갔던 내 영혼의 모든 페이지가
오직 은서인이라는 이름으로 빼곡하게 다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


그 아련했던 첫 만남을 기점으로, 시간은 부지런히 순환하며
저마다 짙은 색깔들을 풀어놓았다.

붉은 낙엽이 수풀을 덮고, 시리도록 투명한 눈송이가 
나뭇가지 위에 하얗게 쌓이던 기나긴 겨울을 지나, 싱그러운
새순들이 찾아오는 봄, 그리고 푸른빛으로 빛나는 여름이
찾아올 때까지.


끊어진 산책로 너머의 그 외진 공터는 오직 서인이와 나, 
둘만을 위해 존재하는 작은 낙원이 되어 주었다.


학교에서 사람의 탈을 쓰고 버텨내느라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날이면, 

나는 서인이의 곁에서
하얀 귀와 꼬리를 꺼내놓고 가장 깊은 숨을 쉬었다.


밖에서는 들킬까 봐 숨기기 급급했던 짐승의 흔적들을,
서인이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을 보듯 부드러운 손길로
가만히 쓸어내려 주곤 했다.

그 보드라운 온기가 닿을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간지러운 일렁임과 함께 꼬리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차갑게 굳어있던 내 모든 방어기제들이 서인이의 다정한
눈빛 아래서 한없이 말랑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던 시간이었다. 열린 수풀 틈새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내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렸다. 


문득 1년 전, 
겁도 없이 이 거친 아지트까지 나를 쫓아와 주었던
서인이의 얼굴이 노을빛에 겹쳐 보였다.

나를 숨 쉬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를 향해, 나는 조용히
시선을 고정했다.


"휴닝아, 오늘 달이 되게 예쁘게 떴어,
네 갈기색이랑 똑같이 하얘."


서인이가 밤하늘을 가리키며 나를 향해 
맑게 미소지었다. 내 남다른 모습마저 늘 예쁘고 특별하게
바라봐 두는 그 투명한 눈동자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서인아, 나 이제 학교에서도 제법 사람처럼 잘 숨어 지내지?
아무도 내가 백사자 수인인 거 모를 거야."

"응, 완벽해. 다들 너를 그냥 조용한 아이로만 알걸?"


서인이가 장난스레 웃으며 내 하얀 귀 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가벼운 터치였지만, 그 안에는 나를 향한 깊은
염려와 애정이 꾹꾹 눌러 담겨 있다는 덧을 잘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진짜 내 모습을 지우고 
투명인간처럼 살아가야 하는 나의 외로움을,
서인이는 늘 미안해 하는 눈빛으로 함께 아파해주었으니까.


나는 서인이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라는 듯,
천천히 손을 뻗어 서인이의 작은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내 손바닥의 온기가 서인이의 차가운 손끝으로
번져가는 것을 느끼며,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백사자만의 진실을 꺼내어 놓았다. 


"서인아, 그거 알아?"

"뭔데?"

"사자는 평생 단 한 사람만을 가슴을 품고 살아간대."

"....어?"


"내 세계는 온통 너라는 계절로 가득 차 있어. 
세상이 아무리 나를 밀어내고 차갑게 굴어도, 
네가 내 곁에 있다면 난 어디서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서인이의 손등 위로
내 뺨을 살포시 부벼왔따. 오직 나만을 올곧게 담아내며
반짝이는 서인이의 눈동자 속에, 온전하게 사랑 받고 있는
백사자의 모습이 잔잔하게 비쳐들었다.


거창한 세상의 구원은 아닐지라도, 상처받은 하얀
사자에게 은서인은 단 하나뿐인 구원이자 완벽한 울타리였다.


나는 서인이에게 내 평생을 바쳐 가장 보배로운 사랑만을
돌려주겠다고, 흐려지는 새벽빛을 보며 마음속으로 깊이 맹새했다.

푸른 새벽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 숲속 아지트 안에서, 
나의 세계는 서인이에게 오롯이 스며들어 완벽한 결말을 맺고있었다.


-THE END-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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