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아이돌

08: 바보

어느 날, 평소처럼 등교하면서 신발장으로 간 한결은 거기서 우석을 발견하곤 주춤거렸다. 이른 아침이라 졸린 눈으로 신발을 칸 안에 세게 내려놓는데 한결이 보기에는 우석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한결과 살짝 눈이 마주친 우석은 특별한 표정 변화없이 한결을 지나쳤다. 괜히 그런 우석이 신경쓰였던 한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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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석.”

“왜?”

“요즘은 이... 아이돌 얘기 잘 안한다?”

“지금 시기가 언젠데. 내가 할 일에 집중해야지.”


무미건조하게 말하면서 작은 글씨로 알아볼 수도 없는 글을 쓰고 있는 우석을 보던 승연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이렇게 글씨 작게 쓰면 네 눈으로 알아볼 수 있어?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논술 기출 문제의 모범답안을 적어가면서 외우고 있던건데 자꾸 말을 걸어오는 승연에 우석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샤프를 내려놨다.


“내가 여름방학 끝난 이후에, 아니 수시원서 접수한 이후에 말하지 않았나?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잠시 절교하자고.”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대입 준비하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그럼 네가 진작에 나한테서 떨어졌겠냐? 교과 전형으로 넣었고 이미 합격이 확정인 네가?”

“근데 진짜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말했다고? 절교하자고?”

“됐다. 말을 말자.”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이 시점에서 무척 여유로운 승연을 보며 우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의 대학을 갈 마지막 방법이 논술인 우석이 승연에게는 심심하면 놀려먹고 싶은 하찮은 친구일테니. 역시 이럴 때는 무시가 답이었다. 다시 우석이 답안 쓰는 것에 집중하려고 샤프를 집어들려는 것을 승연이 채갔다.


“또 왜?”

“나 시 하나만 추천해주라.”

“갑자기 뭔 시야. 뼛속까지 이과인 게.”

“합격이 확정된 이후에 심심해서 네가 예전부터 명작이라고 떠들고 다녔던 작품들 읽어봤거든. 예를 들면 이상의 작품이라던가?”

“작품들이 난해해서 한 글자도 못 읽겠다고 할 땐 언제고?”

“원래 소설만 읽으려고 했는데 그 사람은 시도 나름 재밌더라. 암튼 인터넷에 찾아봐도 잘 안 나오는 그런 시 좀 추천해줘.”

“우리 학교에서 도서관이 왜 있겠냐. 시집 많으니까 알아서 찾아.”

“3학년은 더 이상 책 못 빌리잖아. 튕기지 말고 하나라도 알려줘.”


시를 추천하지 않으면 절대 샤프를 돌려주지 않을 것 같은 승연에 우석은 여분의 필기구를 찾아 필통을 뒤적였다. 아, 얼마 전에 중간고사를 보기 전 필통 정리를 해서 그런지 마땅한 필기구가 없었다. 한시가 아까운데 장난을 멈출 줄 모르는 승연에 결국 우석이 손을 들었다.


“줘. 하나 추천해줄게.”

“인터넷에 찾아봐도 잘 안 나오는 시니까 본문까지 다 써줘.”

“알겠으니까 얼른.”


승연은 샤프를 건네자마자 자기 공책도 같이 내밀었다. 그렇게 공부를 해대는 승연의 것 중에서 찾기 힘든 백지 공책이다.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석은 거침없이 시 한편을 써주고는 승연에게 공책을 돌려줬다. 아까 답안을 쓸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말끔한 글씨들을 쭉 훑어본 승연이 작게 감탄하며 말했다.


“시 길이가 짧지도 않은데 다 외우고 있네?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는 들어봤는데 ‘별과 바람’은 확실히 처음 보네.”

“인터넷에 찾았을 때 안 나오는지는 모르겠어.”


우석이 중얼거리면서 승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승연은 이미 자기 반으로 돌아간 후였다. 정말 이것 땜에 찾아온건가. 뭔가 좀 웃겨서 피식 웃은 우석은 이내 논술 답안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한창 답안을 쓰고 있던 흐름이 깨져서 그런지 이 빼곡한 글자들을 보기가 벅찼다. 그래서 우석은 괜히 아까 승연에게 써준 시를 한 번 더 적어봤다. 김준식의 ‘별과 바람’.


별은 말도 할 줄 모르는 바보다.

바람은 더욱 바보다. 스스로 빛을 밝히지도 못하는 바보다.

맑디 맑은 눈짓과 슬쩍 건드리고 지나가는 것만 할 줄 아는 바보들이다.

그러나 그 반짝임에 넋을 잃고

슬쩍 한 번의 건드림에 비틀거리는 우리는 더욱 바보다.

바람과 별에 모든 것을 절망하는 우리는 바보다.


시를 다시 쓰고 나니 뭔가 묘했다. 시 속에 있는 별 혹은 바람이 그 누군가 같았고, 우리는 본인을 지칭하는 것 같다고 우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야, 모든 걸 절망하지는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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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몇몇 아이들이 신청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한결은 쟤네가 무슨 신청서를 찾고 있는건가 싶었다. 2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마당에 동아리 가입 신청서는 아닐테고.


“무슨 신청서?”

“인문학 행사 있잖아. 인문학이 빛나는 저녁인가 뭔가하는 거.”

“아, 그 신청서 찾아다니는거야?”

“아니, 신청서가 아예 없더라고. 선착순인데 이미 마감됐대.”


인문학이 빛나는 저녁은 학교생활에 마냥 충실할 수 없었던 한결도 이름은 들어본 유명한 교내 인문학 행사였다. 그런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을 선착순으로 받는다니. 조금 이상했다.


“야, 그게 아니라 이미 신청이랑 참가자 발표는 지난 주에 다 끝났는데 취소하는 사람이 좀 많아서 빈자리 채우는 건 선착순으로 했다는 거야.”

“그런 거였어?”

“넌 이한결도 아니면서 학교 돌아가는 거에 왜 이렇게 어두워?”


어떤 포인트에서 투닥거리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을 냅두고 한결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원래부터 선착순이었는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한결은 자신이 이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출석을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생기부는 이제부터라도 좀 채워야 할 것 같은데, 생기부에 몇 줄을 채워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하나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