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 2

내로남불 ; 09 | 령삠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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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령삠도령 }


“... 여주야. 이혼이 애들 이별이 아닌거 너가 잘 알잖아.”

“민윤기 말 조심해. 내가 잘 안다고? 우리 부모님 얘기가 왜 나오는건데.”

“그게 아니ㄹ,”

“아니라고? 의도가 훤히 보이잖아. 너 여태껏 나 동정심으로 만난거 아니었어? 왜 이제와서 혼자 정의로운 척, 양심적인 척인데? 애초에 내가 왜 다른 사람이랑 연애하게 된건지 너가 알아? 너 때문이야. 너는 항상 돈돈돈! 미치겠다고. 돈이 없으면 나 덜 사랑해줘도 되는거야? 돈이 없으면 너 부인 내팽겨치고 그렇게 돈 버는거에만 목숨을 걸어도 되는거야? 너는 항상 내 숨통을 조여오잖아. 그래서 여유있는 태형씨랑 만난거야. 그런데도 내가 가볍게 생각한 것 같아?”

“... 여주야.”

“나 부르지 마.”

“…”

“... 도장 찍어서 본가로 우편 보내.”

“…”


여주는 대답 없는 윤기를 무시하고 매끄러운 재질의 명품 가방을 들고 나섰다.

윤기는 느꼈다. 그동안 자신이 한참 친구들과 놀고 사치 부리고 싶은 나이인 아이를 데려다가 숨통을 조이게 한 거라고. 항상 나를 바라봤을 땐 하얀 에코백과 너덜너덜한 어글리 슈즈를 신던 그녀가 이젠 명품 가방과 그녀의 발목보다 길어 보이는 굽의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속으론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그녀를 떠나게 등을 민게 나였는데 내가 뭐라고 그녀를 잡는가.

윤기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려고 했지만 옆에 적혀있는 여주의 글씨들이 더욱더 미련을 넘치게 했다. 동글동글 하면서 또박또박 꾹꾹 눌러 쓴 글씨가 어쩜 그리 사랑스러운지. 그녀가 머릿속에 아른거렸고 그런 그녀의 얼굴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여주는 미리 자신의 본가로 짐을 옮겨놨다. 

본가에 도착하니 항상 굳게 닫혀있었던 철문은 이번엔 활짝 열려있었다.

중년의 부부는 무표정으로 기둥에 기댔고 여주는 그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여주를 보고 웃었다.

“내 딸, 왔어?”


-

“어, 여주씨 미리 왔네요. 먼저 주문하지 그랬어요.”

“괜찮아요. 할 말만 하고 나갈거니 주문 안 했어요.”

“무슨 말이길래 그렇게 얼굴이 무뚝뚝해요... 나 무서워요. 빨리 말해줘요.”

“태형씨.”

“네?”

“우리가 뭔데 행복할까요.”

“...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가정도 있는 사람끼리 만나서 불순하게 행동하는데 뭐가 그리 떳떳하다고 고개를 바짝 들고 다닐까요.”

“... 여주씨.”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셨을거라 믿어요. 우ㄹ,”

“아니요. 말 하지 마요. 듣기 싫어요.”

“헤어져요. 저 먼저 갈게요.”

“…”

사실 여주는 아직 자신의 감정을 몰랐다. 사랑이란 감정은 고등학생 때 윤기에게 갈구한 것이 처음이었다. 자신이 누굴 사랑하는지, 누구와 있을 때 행복한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최소한 그녀 머릿속엔 사랑이란 감정은 더럽고 불쾌하기만한 감정이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단축번호 1번으로 등록되어 있었던 윤기의 번호와 2번인 태형이의 번호를 지웠다.

태형의 번호는 지우기 수월했고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윤기의 번호는 여주의 기억속에 세세히 적혀있었다. 윤기의 번호를 지우려고 했지만 차마 삭제라는 문구를 누르는게 그리도 힘들었다.

사람들이 어지럽게 다니는 길가엔 사랑이란 감정에 허우적대는 어리기만한 그녀가 주저앉아있었다.

사람들은 말하지. 누구든 어른이 된다면, 누구든 나이를 먹으면 감정에 단단해진다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니. 이 말도 툭 치면 쓰러질 허약한 뼈대 같은 감정 위에 여러 겹 덧칠한 물감에 불과했어. 아무리 물감을 칠해도 비가 오고 눈이 오면 두터운 물감은 씻겨 내려가고 남는건 결국 허약한 뼈대야.

인간은 결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길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