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야~ 태형이한테 이거 갖다줄래?
걔도 술 많이 마셨다며...
자취하느라 혼자 있을텐데.. "
석진은 아침밥을 먹고 거실에서 쉬고 있던 여주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아빠, 고마워! 아, 근데.. 아니... 음... 그렇긴 한데..
나 김태형 아직 약간 미운데..ㅜㅠ"
"그럼, 여주야~ 너 좋을 대로 해~
안 먹을 거면 다시 냄비에 부어놔~"
티비에 보지도 않는 예능채널을 돌리던 여주는 아빠가 두고 간 도시락을 힐끔힐끔 보다가 결국 일어났다.
. . .
그리고 도착한 태형이네 집...
여주는 익숙한 듯 비밀번호를 눌렀다.
타고난 엉뚱하고 자유로운 성격처럼 넓은 사무실을 개조해서 원룸처럼 쓰는 이 공간은 드럼과 악기들이 널려있는 작업공간과 밥먹는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주방공간, 빌딩숲이 보이는 창가 쪽으로 커다란 소파와 침대가 있는 주거공간으로 나뉘어있었다. 침대가 있는 곳만 커다란 벽장으로 만든 드레스룸으로 가려져 있고 나머지는 뻥 뚫려있는 개방적이고, 확 트인 공간이었다.
"역시..."
오면서 전화를 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응답이 없었다. 태형이의 핸드폰은 부재 중 통화가 떠있는 채로 침대 머리맡에 얌전히 놓여있었고 그 아래 아늑한 침대에서 태형이는 여전히 쿨쿨 자고 있었다.여주는 어떻게 깨울까 고민하다가 커튼을 열어재쳤다. 정오의 따스한 햇살이 뒤늦게 침대에 내렸다..
"으... 여주 왔구나.. ㅜㅠ 너는 괜찮아..??
난 머리 아파 죽겠어.."
잠시 쏟아지는 햇살에 눈부셔하던 태형은 금새 일어났다.
"여주야, 나 때문에 술 많이 마셨지..?"
"맞아... 그래서 진짜 아침에 좀 힘들었는데...
아빠표 해장국 먹고 살아났지롱~~
아빠가 너도 좀 챙겨주라고, 이거 싸주셨어..
내가 진짜 올까말까~ 하다가 왔당..
너 김여주님 없으면 어떻게 할래.. ㅎㅎ"
아직 조금 밉긴 하지만, 여태껏 못 일어나고 자고 있던 태형이가 안 됬다는 생각도 들고.. 여주는 그래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주야 어제 그냥 보내서 미안해... ㅜㅠ
원래 매니저형께 너 데려다 주라고
미리 말씀드려놨었는데 나만 데려다 주셨더라..ㅜㅠ"
"으이구.. 매니저 형께 나 부탁하지마,
니 매니저지, 내 매니저냐...
내가 그냥 너 데려다 주시라고 매니저형 보냈어~"
"그치만 챙겨주고 싶었단 말이야~"
태형이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아니면 덜깬 것을 가장해서 미안함을 표현하려는 건지,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징징댔다. 여주는 살짝 한숨을 쉬고는 태형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럼 니가 데려다줘야지..
니가 내 남자친구인데..
니 매니저 형이 날 왜 챙겨~"
"미안해.. ㅜㅠ
내가 담에는 너 꼭 데려다줄께..!
너네 아버님께도 면목없고 너한테는 미안하고..
우엉... ㅜㅠ "
여주는 어제 혼자 터덜터덜 집에 온 것이 생각나서 울컥할 뻔했는데 갑자기 허리에 턱~ 태형이가 팔을 감자, 깜짝 놀랐다. 태형이는 우는 시늉을 하며 여주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근, 근데 태형아,
숨이 안 쉬어질라 그래.. 팔.. 팔 좀..."
풀썩~
여주는 태형이 잡아당기자 옆에 쓰러져 누웠다. 여주는 옆에 같이 쓰러져 누운 부스스한 태형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어제 씻자마자 젖은 채로 잤는지 삐죽삐죽 서있는 머리하며, 퉁퉁 부은 얼굴까지...
"아우.. 귀여워..."
여주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 앞에 있는 자신만 아는 태형이의 모습에 여주는 어제의 불안함이 저멀리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 좋아하면..
그걸로 된 거지... 그치?
열심히 하는 것도 너무 좋고..
때론 너가 또 멀게 느껴질 날이 오겠지만.. '
여주가 태형이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태형은 볼이 찌부가 되었는데도 그냥 여주 손에 얼굴을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태형이 눈에는 옆에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여주의 볼과 귀가 빨갛게 물든 것이 너무 귀엽다. 만난 지 7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고등학교 때 처럼 얼굴을 붉히고 두근거려하는 여주가 태형이는 너무 이쁘고 좋았다.
나의 피앙세, 나의 사랑...
사실 태형은 여주에게 청혼하고 싶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같이 살자는 말은 은근 슬쩍 표현해왔지만, 그런 게 아니라 태형은 정식으로 청혼을 하고 싶었다. 가수로서의 꿈을 이뤘다면, 내 다음 꿈은 아빠인데...
여주와 같이 나랑 반반씩 닮은 아이도 낳고 더 많은 미래를 그려보고 싶은데..
그런데 태형이는 제 마음만 앞서고 여주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약간 못마땅했다. 게다가 방송에서 언급하는 것도 싫어하고.... 여주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요즘은 여주가 날 좋아하는 것보단, 왠지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야...
내가 좀 너무 여주한테 집착하나..?
하지만 자신의 뮤즈인 여주가 없다면...태형이는 앞으로 음악도 가정도 어떻게 꾸려야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여주야, 가까이 와봐~"
태형이는 자신의 볼을 감싸고 있던 여주의 손을 내리더니 꼭 끌어안았다.
아.. 너 술 냄새... 품에 안긴 여주가 투덜거려도 태형은 놓지 않았다.
"여주야.. 일어나자마자 니 얼굴 보이니까 너무 좋다..
우리 말이야..
이렇게 서로 얼굴 보며 일어나는 날이 오겠지..?"
"... 응.... 그럼..."
여주는 태형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마주보자 태형이가 다음 말을 이어갔다.
"너가 아빠 혼자 되실까봐
걱정하는게 아닐까 해서..
우리 같이 살게 되면 너희 아버님 모시고 살까..?
너는 어때? 나는 좋은데..
나 아버님이랑 잘 지낼 자신 있어!"
태형이 말에 여주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아빠를 모시고 살아..?
푸하하하
아빠가 우리를 모실 것 같은데..
우리는 요리도 잘 못하고.. 맨날 늦잠 잘 것 같아..."
태형의 말에 웃어버리려던 여주는 문득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근데, 아마 내가 독립해도..
아빠 혼자 안 되실 꺼 같으니까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아~"
"진짜...??"
"아빠랑 아주머니랑 아주 잘 지내시니까... ㅎㅎ
내가 아빠한테서 독립하면....
그 땐, 아마 함께 사시려나..?"
여주는 순간 그 말을 내뱉고는 스스로 깨닭은 듯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네... 아빠랑 아주머니랑 같이 사실 수 있겠구나.. 여주가 중얼거리는 듣고 있던 태형이도 눈이 동그래져서는 여주와 나란히 몸을 일으키고는 여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분.. 결혼 계획 생기셨어?"
여주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는 잠시 요리조리 생각하다가 태형이에게 말했다.
"음.... 아니 그건 아닌데...
어제 집에 와서
아주머니랑 아빠랑 잠깐 같이 있었는데....
뭐랄까...
나랑 아빠 사이에 아주머니가 계신 게 되게 좋았어...
우리 셋이.. 가족이 될 수 있지 않을 까...?
그런 모습이 그려지더라고..."
태형은 오~ 정말..? 이라고 대답했다가, 갑자기 눈썹 끝이 내려가더니, 섭섭한 듯 말했다.
"근데 나는...? 나도 거기에 가족으로 있어야지~"
여주는 순간 아차 싶어서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래그래... 너는 아들같은 사위해~"
"그래 ~나.. 네 아버님이랑 아들처럼 가깝게 지낼꺼야.."
태형이는 특유의 무해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여주를 꼭 안았다.
. . .
여주는 도시락을 꺼내서 아일랜드 식탁에 차려주고는
태형이가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버님이랑 아주머니랑 당장 결혼 안 하시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니야..?"
태형이 맛있게 밥을 먹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렇게.....
이번에 아주머니랑 이야기 많이 나눴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교제하신 지도 오래 되셨더라고~"
여주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형이는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여주에게 말했다.
"혹시..
아빠가 너 때문에 결혼을 안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예전에도 너 때문에 연애 안 하시겠다고 하셨었잖아.."
"헐!!! 아.. 진짜?? 나 때문에 그럴려나~~??"
여주는 눈이 휘동그래졌다.
생각해보면 태형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여주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고등학교때 아빠가 삼촌들이랑 만날때 마다, 딸내미 두고는 연애 못 한다는 말 많이 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까 그럴 수 도 있을 것 같긴 해...
두 분이 사이가 좋아보이는데... 계속 연애만 하시는 건..
나 때문에 그럴 꺼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는데..
와... 그럴수도 있겠구나...."
여주는 아빠와 아주머니가 함께 계시던 모습을 떠올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형은 그 사이 마지막 국물까지 깨끗히 들이킨 국그릇을 내려놓고 여주에게 이야기 했다.
"여주야, 너는 어때..?
아주머니가 결혼한다면,
네 새엄마가 되시는 건데 괜찮아....?"
태형이 말에 여주는 입술을 양쪽으로 당기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새엄마...? 아 그건 좀 오글오글한데..ㅜㅠ
근데.. 이제 나한테 아주머니가
그냥 아빠의 걸프랜드..이기만 하신 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잘 알고 지내던 어른같이 느껴져...
내 고민도 들어주시고...
아빠랑 같이 있으면 투닥거려도
뭔가 균형도 맞는 것 같고..ㅎㅎ
그래서 두분이 결혼하신다고 하면....
반대는 안할 꺼야.. "
근데.. 으아 새엄마라니.. 어렵다... 여주는 턱을 괴고 있다가 식탁에 쓰러졌다.
"그래도 나 때문에 두 분이 결혼 안 하시는 건 싫은데.....
그렇다고 두 분께
저는 두분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원하시면 이제 그만 결혼 하시죠..??
막 이럴 수는 없잖아..?"
태형이 빈 그릇과 도시락을 설거지 통에 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간접적으로 뭔가 표현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너네 아빠 성격에...
니가 표현하지 않으면 절대 결혼같은 건 꿈도 안 꾸실껄..? 그 동안의 세월을 생각해봐"
"흠.... 그렇긴 하네...
아 어렵다..
아빠 연애 챙겨드리고.. 결혼까지 챙겨드리는 건... "
여주는 식탁에 턱을 올려놓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태형은 한숨 짓는 여주 옆 아일랜드에 기대서서는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 김여주! 그므시라꼬~~
딸이 되서 아빠 챙겨드리는 건, 당연한 도리지.. ㅎㅎ
나도 마, 팍팍 지원해줄께에~!
두분 결혼하신다 하면
사회도 봐드리고 노래도 부르고.."
"아후.. 그렇게만 되면 좋겠다만...
아빠 성격에 결혼식 다시 올리시려나..
그나저나
아빠가 결혼해서 아주머니랑 살꺼라고 생각하려니까...
괜히 나 지금 오바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냐아냐,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마음 깊어지면 결혼 해서 같이 사는게 당연한 도리지... 오바는 아니야..ㅎㅎ"
여주는 태형이 말에 고개를 돌려 태형이 얼굴을 쳐다봤다.
"그래서 요즘 나한테 은근 슬쩍 맨날 같이 살자 그러고,
여기저기 여자친구 있다고 말히고 다니는 거야..?"
" 야 그거 당연한거 아니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연인이랑 결혼해서 애도 낳고 .."
"뭐..? 애도 막..?? 어우야~~!!
그게 모오오오오야.. 아 진짜 남사스럽게"
"아니, 애 낳는 게 뭐가 남사시린데?!"
"헐..!!! 애 낳는 게?! 말조심 해라~ 내가 낳지 니가 낳냐?"
이후 여주와 태형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투닥거렸다. 태형이의 무대 위의 모습도 좋지만, 여주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나만 아는 태형이의 그런 모습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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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머릿 속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무단 복제 및 배포를 금합니다.
©️ 내 머릿속에 지진정 (2022)
에필로그8-2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