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 허티] 쪽팔려 게임

4화. 맞혀보라며

밤비가 나간 뒤에도 은호는 한동안 연습실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문은 닫혔고, 스피커도 꺼져 있었고, 거울 속에는 혼자 남은 자신의 모습만 비쳤다. 그런데 이상하게 혼자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손끝에는 아직 밤비의 온기가 남아 있었고, 귓가에는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았다. 다음엔 네가 맞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은호가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알고 싶으면서도 확인하기가 무서웠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거라면, 지금까지 이상해진 모든 순간이 혼자만의 착각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다음 날 은호는 평소보다 일찍 연습실에 도착했다. 괜히 먼저 와 있으면 마음이 정리될 것 같았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이미 안에 누군가 있었다. 밤비였다. 밤비는 바닥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가 은호를 보고 잠깐 멈췄다. 둘은 동시에 어색하게 웃었다. “일찍 왔네.” 밤비가 먼저 말했다. 은호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너도.” “잠이 안 와서.” “나도.” 짧은 대답이 오간 뒤, 다시 조용해졌다. 예전 같으면 바로 장난을 쳤을 텐데, 오늘은 둘 다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은호는 밤비 옆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걸 본 밤비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 은호는 바로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했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 피한 게 맞았다. 가까이 앉으면 어제 잡았던 손이 떠오를 것 같았고, 밤비의 눈을 보면 묻고 싶어질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그게 혹시 나냐고.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게 돌이킬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연습이 시작되고 나서도 둘은 묘하게 엇갈렸다. 마주 보는 파트에서 은호가 먼저 시선을 피했고, 밤비는 그걸 보고 표정이 조금 굳었다. 동선이 스칠 때도 은호는 괜히 한 박자 빨리 움직였다. 누가 봐도 티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밤비는 알 수 있었다. 은호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걸. 연습이 끝날 무렵, 밤비는 결국 물병을 들고 은호 옆으로 다가왔다. “너 오늘 왜 그래?” 은호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뭐가.” “나 피하잖아.” “안 피하는데.” “거짓말.”

 

 

그 말에 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밤비는 잠깐 은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평소처럼 장난스럽지 않았다. 조금 서운해 보였다. “게임은 네가 하자고 한 거 아니었나.” “처음엔 네가 하자고 했어.” “그래도 어제는 네가 이어갔잖아.” 밤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데 왜 이제 와서 피하는데.” 은호는 입술을 꾹 눌렀다. 변명할 말이 없었다. 피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무서워서 피했다고 말하면 너무 솔직했다. 결국 은호는 작게 말했다. “생각이 많아서.”

 

 

 

 

밤비는 그 대답에 잠깐 조용해졌다. “무슨 생각.” “그냥.” “또 그냥?” 밤비가 웃었지만, 이번엔 은호도 따라 웃지 못했다. 밤비는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너도 참 치사하다.” 그 말에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나한테는 대답하라고 해놓고, 너는 계속 숨잖아.” 은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밤비가 도망갈 때마다 붙잡으려 했으면서, 정작 자기 차례가 오자 한 발 물러서고 있었다.

 

 

그날 연습이 끝나자 밤비는 평소보다 빨리 짐을 챙겼다. 은호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멤버들이 하나둘 나가고, 밤비마저 따라 나가려는 순간 은호가 먼저 말했다. “잠깐만.” 밤비가 문 앞에서 멈췄다. “왜.” 은호는 가방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갔다. “오늘은 내가 먼저 물어볼게.” 밤비는 잠깐 망설이다가 문에서 손을 뗐다. “지금?” “응.” “도망가기 없기?” “없어.” 은호가 대답하자 밤비는 다시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마주 앉았다. 오늘은 물병도, 가방도 둘 사이에 없었다. 은호는 손끝에 힘을 줬다. 밤비는 팔짱을 낀 채 은호를 바라봤다. 조금 삐진 얼굴이었다. 은호는 그게 귀엽다는 생각을 하다가 바로 시선을 내렸다.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자신이 더 이상했다. 밤비가 먼저 말했다. “질문해.” 은호는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 네가 맞혀보라고 했잖아.” “응.” “그거 아직 유효해?” 밤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응. 유효해.”

 

 

은호는 숨을 골랐다. “내가 틀리면?” “벌칙.” “맞히면?” 밤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밤비는 결국 아주 작게 말했다. “맞히면 대답해줄게.” “뭘.” “네가 묻고 싶은 거.” 은호는 밤비를 바라봤다. 묻고 싶은 건 하나였다. 그런데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은호는 한 번 웃었다. 긴장을 숨기려는 웃음이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밤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은호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혹시 나야?”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인데, 은호에게는 길게 느껴졌다. 밤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은호를 가만히 봤다. 그 표정이 너무 솔직해서, 은호는 이미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밤비는 쉽게 말하지 않았다. 은호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도 돼.” 말하고 나서 은호는 곧바로 후회했다. 너무 겁먹은 사람처럼 들렸다. 밤비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왜 자꾸 아니어도 된다고 해?” “뭐?” “너는 내가 아니라고 하면 괜찮아?”

 

 

 

 

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을 리 없었다. 아니라고 하면 분명 어색해질 것이고, 지금처럼 마주 앉는 것도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밤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은호가 머뭇거리자 밤비가 낮게 말했다. “그런 말이 더 서운해.” 은호는 밤비를 봤다. 밤비는 웃지 않았다. “네가 맞혔으면 맞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왜 먼저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은호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은 배려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처받기 전에 먼저 물러서려고.

 

 

은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미안.” 밤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호는 다시 말했다. “나 무서워서 그랬어.” 밤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뭐가.” “맞혔는데도 네가 장난이라고 할까 봐. 아니면 내가 혼자 착각한 걸까 봐.” 은호는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서.” 밤비가 작게 물었다. “아직도 몰라?” 은호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좀 알 것 같아.” 밤비는 숨을 멈춘 듯 은호를 바라봤다.

 

 

 

 

은호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말이 끝나자마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고백이라고 하기엔 서툴고, 확신이라고 하기엔 조금 흔들리는 말이었다. 그래도 거짓은 아니었다. 밤비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은호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밤비가 작게 웃었다. “같아?” “뭐?” “좋아하는 것 같아?” 은호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아니, 그게…” 밤비는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았다. “진짜 너답다.”

 

 

은호는 억울한 듯 말했다. “야, 지금 엄청 용기 낸 거거든.” “알아.” 밤비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도 대답할게.” 은호는 숨을 삼켰다. 밤비는 은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맞아.” 짧은 한마디였다. 그런데 은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밤비가 다시 작게 덧붙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너 맞아.” 은호는 멍하니 밤비를 봤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인데, 막상 들으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밤비는 그런 은호를 보다가 조금 민망한 듯 시선을 내렸다. “근데 너 지금 아무 말도 안 하면 나 진짜 쪽팔려.” 그제야 은호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뭔데.” “좋아서.” 은호는 짧게 대답했다. 밤비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다시 조용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전과 달랐다. 숨 막히는 어색함이 아니라, 서로 같은 마음을 확인한 뒤에 찾아오는 낯선 조용함이었다.

 

 

 

 

그때 복도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아직 안 나왔어?” 예준이었다. 밤비는 놀라 몸을 뒤로 물렀고, 은호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기 직전, 밤비가 아주 작게 말했다. “오늘은 도망간 거 아니다.” 은호는 그런 밤비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알아.” 문이 열리고 예준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또 둘만 남았어?” 은호와 밤비는 이번엔 동시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를 한 번 보고, 아주 작게 웃었다.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더 이상 장난으로 시작한 게임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은, 아마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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