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해. 서명 안 하고."
재수 없는 천여주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 차라리 머리가 깨면 좋으련만. 그냥 콱 죽어버리게. 전에도 말했지만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망설이던 손으로 과감하게 파트너 동의서에 서명을 마쳤다. 기어코, 그리하여, 결국! 박지민과 내가 파트너가 되었다. 내가 선택한 결말이지만 정말 재수가 지지리도 없다.

오만과 편견 B
그래도 센터 입성 첫 날이니 센터 설명이라도 해주라며 무책임하게 나를 넘긴 직원은 지민 씨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래도 그렇지 직원이 설명하는 거랑 이 사람이 설명하는 거랑 같겠냐고요. 양심은 있었는지 숙소 앞까지는 데려다 줬길래 슬슬 가방도 조금 무겁다고 느껴질 겸, 숙소에서 쉬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민 씨에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센터 잘 모르시죠? 전 그냥 방 가서 좀 쉬면 안 되나요."
"방이 어딘지는 알아?"
"방이요?"
아냐고? 당연히 모르지. 그냥 지나다니다 보면 내 이름 적힌 방 하나 정도는 있지 않겠어? 어찌 되었든 난 이 남자랑 같이 있기 싫단 말이다. 최소한의 시간만 함께하고 싶었다. 센터를 잘 모르지 않냐는 확신 가득한 나의 어투에 코웃음을 친 남자가 저 멀리에 위치한 어떤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올곧은 손가락이 어쩜 그리 얄미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자기소개랍시고 센터에서 준 나의 결과 보고서를 자세히도 읽었나보다.
"뭐하세요."
"텔레포트 아니야?"
"맞는데요."
"위치만 알면 어디든 가능하잖아."
"손가락으로 찌른다고 정확히 아는 게 아니니까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셔야죠."
"702호. 내 옆방."
옆방이라니. 난 순간 내가 일시적으로 귀가 먹통이 된 줄 알았다. 딱 봐도 당황스러워보이는 날 본 지민 씨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짝다리를 짚은 채 이것저것 설명했다. 그 길고 지루한 말들 중에서 내가 겨우 알아들은 건 '파트너는 각자의 방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게 원칙이다' 정도였다. 대충 위기상황을 대비하려는 것이겠지.
센터 중 가장 쓸데없는 규칙이 많다는 X-센터, 즉 이곳은 들어온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그 명성을 단숨에 인정할 만 했다. 하여튼 센터들은 왜 이렇게 빡빡하고 규율이 많은 건지. 내 방 위치도 알았으니 용건도 없겠다 당장 능력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가이딩 필요하면 말해."
"필요 없어요."
지금이라도 파트너를 바꿀 수 있다면 당장 달려가 파트너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전의 선택이 후회되었다. 당시에 왜 그리 박지민이 싫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그의 앞에서도 대놓고 드러낸 불쾌함의 원인인 거만함과 오만함 때문이겠지. 기어코 그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지 못하는 나만의 편견임을 잘 알고 있지만 정말이지···.

"그래, 네 맘대로 해."
날 애송이 마냥 하찮은 눈빛으로 바라보면 그나마 남아있던 정도 다 떨어진다고요. 내가 텔레포트를 하기 전까지 계속 내 옆에 서있던 그는 내가 떠나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겼다고 하기에도 뭐하게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다시 발걸음을 늦췄다. 원수 지간은 대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 역시 고전적이지만 일리있는 말이 틀림 없었다. 박지민의 눈이 누군가에게 맞춰졌다.
"오랜만이네."
"이유가 뭐야."
"무슨 이유?"
누군가, 그러니까 전정국은 박지민을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성큼 다가가 알 수 없는 말만 내뱉었다. 어쩌면 박지민은 바로 알아차렸을 그 이유. 왜 천여주를 굳이 본인과 파트너를 맺게 한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전정국과 눈을 마주친 그 순간부터 짝다리를 짚은 박지민이 전정국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로 시선을 옮겼다.
"왜. 내가 뺏으니까 이젠 또 무서워?"
"······"
"알잖아, 네 손에 맡긴 센티넬들 다 죽어나간 거. 고작 열아홉 밖에 안 된 꼬맹이를 네 손에 쥐어줬다가는···."
"야."
"네 애인 꼴 나는 거 아니야?"
전정국의 주먹이 금방이라도 박지민의 얼굴에 닿을 것 같았다. 겨우 참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심하게 떨던 손이 도무지 멈추지를 않았다. 그렇다 해서 박지민 또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어금니를 질끈 깨물다 종국에는 아랫 입술까지 씹어댔다. 지민은 곧 울 것 같은 표정인 정국을 보곤 아까와 같은 헛웃음을 내뱉더니 통보하듯 말을 내뱉었다.
"멋대로 탐내지 마."
"난···."
"다시는. 그 어떤 센티넬도 세인이처럼 되는 거 못 봐. 적어도 너한테서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발걸음을 돌린 지민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위태로웠다. '세인'이라는 단어를 꺼내면서도 힘들어보였던 지민과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친 정국도 마찬가지로 더이상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미 예전에 메말라버린 고귀한 눈에서는 눈물 따위 흐를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너만 있으면 뭐든 될 것 같았는데. 나의 것이 아님에도 너를 내 품에 끌어안은 것 자체가 죄악이었을까. 여전히 메마른 눈은 공허함과 원망을 품고 있었다. 내면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 보일 수 있는 감정이 겨우 저런 것 뿐이라는 게 너무나도 비참했다. 울고 싶었다.
***
B라니! B급이라니! 내가 방에 들어간 직후 침대에 얼굴을 박고 계속 내뱉은 말이었다. B급이면 낮은 편이지만 A와 S의 개체수가 적기 때문에 현장에 나가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그렇지만 텔레포트···. 텔레포트는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현장에서 텔레포트 센티넬이 하는 일은 겨우 고등급 센티넬과 가이드를 센터로 옮기는 일이나, 시민들 이동시키기 밖에 없단 말이다. 나도 이왕 센터 들어온 김에 간지나는 거 하고 싶었다고···. 원망 가득한 말투로 한참을 중얼거리고 있을 즈음이었을까. 옆방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여기 방음 진짜 안 되는구나. 처음에는 소리라고 부르기에 적당한 데시벨이었지만 가면 갈수록 소음이 되가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될 정도로 시끄러웠다. 무거운 몸을 끌고 힘겹게 일어나 방을 나서려던 참이었을까. 방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한 남자, 아까 나와 파트너 계약하기 직전까지 갔던 정국 씨가 앞에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왜 제 방 앞에··· 서 계시는 건지···."
"아."
이제서야 본인이 내 방 앞에 멀뚱히 서서 안부 인사를 건넸다는 걸 깨달은 듯이 굴던 정국 씨는 방 문에 달린 명찰을 한참 바라보다 본인의 숙소로 발을 옮겼다. 근데··· 왜 제 옆방으로 가세요. 설마 나 이 남자들 사이에서 사는 건가. 하필이면 아까 피 튀기는 신경전을 하던 둘 사이에서? 물론 원래도 없었지만 오늘따라 운이 더 없는 것 같다. 불행 그 자체네. 멸망이라던 서인국도 도망갈 불행 그 자체인 천여주. 거창한 자기소개에 딱 맞는 멘트인 것 같다.
"정국 씨!"
"네?"
"혹시 제 옆방이세요?"
"아, 저 701호···."
"전 702호요. 잘 부탁드려요."
어색하게 건네는 내 손이 정국 씨에게 악수를 권유하고 있었다. 정국 씨는 잠시 망설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을 굳세게 잡았다. 원래 살가운 성격이 아닌지 한번을 웃지를 않는다. 지민 씨는 너무 웃어대서 죽빵 때리고 싶던데. 정국 씨는 어쩐지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방 밖으로 나온 이유조차 잠시 잊고 있던 것이.
"아 맞다. 나 옆방에 민원 넣으러 왔는데."
"옆방이면 박지민···."
"맞아요, 박지민 씨. 아까부터 자꾸 소음을 내시길래 무슨 일 있나 싶어서요."
"그, 여주··· 씨!"
지민 씨의 방으로 걸어가던 중에 갑자기 뒤쪽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국 씨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으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한동안 우물쭈물거렸다. 조금만 더 빨리 말했으면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텐데. 그의 말이 시작하기도 전에 옆방 문이 벌컥 열렸다.
"뭐해."
"아, 나오셨네요. 너무 시끄러워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
"꺼져."
"네?"
냅다 얼굴 보자마자 욕을 박은 그는 아까와는 무척 달라보였다. 아까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가이딩 필요하면 말하라며. 괜히 분해진 마음에 한껏 지민 씨를 째려보고 있었을까,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정국 씨에게 가있었다. 그의 눈의 심연은 너무나도 깊었다. 그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정국 씨에 대한 원망을 사그라들게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이 상황에 있는 것 자체로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 어쩌면 아까 욕 먹은 게 괘씸해서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 난 다음으로 이어질 말에 사심 따위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가이딩, 필요하면 말해달라고 하셨죠."
"······."
"지금 필요해요. 해주세요."

"들어와."
그의 안광이 유지되는 가운데 나는 그의 방에 발을 들였다. 부서진 건지 부순 건지 모를 여러 물건들이 한 박스에 마구잡이로 놓여있었다. 왜인지 그 박스가 애처로웠다. 절대 잊지 못할 누군가를 잊으려 노력하면서도 방 한 켠에 남겨둔 게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그는 이런 나를 신경 쓰지도 않는지 주방으로 들어가 미리 채워둔 듯한 얼음물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뭐가 필요한데."
"네?"
"어디까지 필요하냐고."
그가 물 컵을 식탁에 내려놓고 나에게 다가오면서 한 말이었다. 어디까지 필요하냐니, 그게 고등학생한테 할 말인가. 사실 난 지금 가이딩이 필요하지도 않은데,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겁 먹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건지 내가 앉은 소파 바로 앞에 서서 날 내려다보는 그였다.
"그냥 손만···."
"손만 잡자고?"
"저 고등학생인데요···."

"전 가이드인데요."
설마 내 말투 따라한답시고 저렇게 대답한 건 아니겠지. 언제 욕을 내뱉었냐는 듯 아까처럼 재수없는 웃음만 짓고 있는 지민 씨에게 꺼림칙한 표정으로 손 잡는 걸로 충분하다 말하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가 앉은 자리 옆에 털썩 앉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 기다란 소파 끝자락에 둘이 붙어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의외로 손이 좀 귀엽게 생겼길래 잠시 만지작거리다 갑자기 들어온 가이딩에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내뱉었다. 진짜 높긴 높은 등급이네, 손 잡은 걸로 이렇게나 좋은 걸 보니.
"좋아?"
그렇지만 이렇게 물어보시면 제가 또 정이 떨어집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S급 가이드는 휴대폰으로 어떤 걸 할까. 쓸데없이 들은 호기심에 그의 휴대폰 화면을 훔쳐보았다. 이로써 천여주의 후회스러운 일 두번째에 적립된 '박지민 폰 훔쳐보기'가 성사되었다. 그는 갤러리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갤러리에 저장된 어떤 앨범에서.
"누구예요?"
"세인."
"세인이 누군데요."
"내 마지막 사랑. 전정국이 죽였어."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정국 씨를 바라볼 때마다 그의 눈에 가득 담긴 비통함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위로도 못해주는 신세에 잡고 있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들어찬 상대방의 손가락이 제법 굳건했다.
나를 선택해준, 나를 원해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정말이지, 당신이 슬프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가 사진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어서 더욱 어려웠다. 그래도 지민 씨가 내 파트너라면 나도 이곳에서 조금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움짤 너무 둘 캐해랑 잘 맞아요...
먼저 본 것도 박지민인데 먼저 가는 것도 박지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빤히 보고 있는 전정국...
들고잇는핑크색신발은머고. 세인이거냐여주거냐.
여튼 행벅한 하루 보내십시오. 해버나잇스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