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연 단편 모음
보라빛 향기

정화랑
2026.07.30조회수 0
생각에 푹 잠긴 채로, 앞도 제대로 안 보고 사탕 진열대 모퉁이를 소리 없이 돌았어.
쿵.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에 정면으로 부딪히고 말았어. 중력이 나를 차가운 리놀륨 바닥 위로 정신없이 끌어내리기도 전에, 튼튼한 팔 하나가 내 허리를 빈틈없이 감싸 안아 지탱해 줘. 그 팔이 나를 따스한 가슴 쪽으로 완전히 밀착시키는데, 꼭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K-드라마의 정석 같은 구도야.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왔어.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본 순간, 세상이 온통 고요해졌지.
그 사람이었어. 찬연 오빠. 내가 몇 년 동안이나 가슴 앓이 하며 짝사랑해 온 사람.
오빠는 부드러우면서도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 오빠의 미소는 마트의 그 강렬한 형광등 불빛마저 흐릿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눈부셔. 깊은 눈동자에는 늘 보아오던 다정함과 깊은 따스함이 고스란히 배어있지. 오빠는 오버사이즈 보라색 후드티를 입고 있는데, 진열대 조명이 옷자락 끝에 가닿을 때마다 꼭 오빠 머리 주변으로 진짜 보랏빛 헤일로가 내려앉은 것처럼 보여. 오빠 얼굴이 고작 몇 인치밖에 안 떨어진 곳에 있으니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조여와서, 오빠한테 내 심장의 미친듯한 두근거림이 느껴질까 봐 무서워하며 침을 꼴깍 삼켰어.
"내가 앞을 잘 안 봤네, 미안." 오빠는 나를 조심스럽게 똑바로 일으켜 세워주며 부드럽게 말해. 그 낮은 목소리가 내 온몸에 그대로 울리는 것만 같아. 오빠는 내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주려는 듯, 내 허리를 감싸 쥔 손을 곧바로 떼지 않았어.
"저, 저도 잘 못 봤어요. 죄송해요." 나는 양 볼로 열기가 확 가라앉는 걸 느끼며 말을 더듬었어. 너무나 민망한 기분에 축축해진 머리카락을 허둥지둥 쓸어내렸지.
"어쨌든 이렇게 보니까 좋다. 오랜만이네." 찬연 오빠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 위에 맺힌 빗방울을 가볍게 털어내 주려고 손을 뻗었어. 눅눅해진 옷감 위로 오빠의 손가락이 아주 잠깐 머물렀다 떨어져. '우산이 없어서 비에 젖은 걸 본 게 분명해.' 나는 미리 준비하지 못한 내 자신을 탓하며 속으로 소리를 질렀어.
"네, 오빠도요." 내가 수줍게 대답했어. 나는 얼굴에 피어오르는 붉은 기를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사탕 진열대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지.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릴 만한 걸 찾다가, 마침내 이 폭풍을 뚫고 오게 만든 그 레몬 드롭 사탕의 마지막 한 봉지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어.
하지만 내 곁눈질 사이로 또 다른 손 하나가 들어오더니, 정확히 똑같은 곳을 향해 뻗어오는 거야. 우리의 손가락이 그 비닐봉지 표면에 스치듯 맞닿았어.
"아, 맞다. 너도 이거 좋아했었지." 찬연 오빠가 장난스레 웃음을 터뜨려. 그 나직하고 싱그러운 웃음소리는 내 심장박동에 정말이지 너무나 해로웠어.
"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나는 배 속에서 나비들이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떨림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말하려고 애썼어. "하지만 오빠가 드시고 싶으면 가져가세요. 마지막 남은 봉지인 거 아는데, 괜찮아요."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숨기려고 손을 거두어 주머니 속으로 쏙 집어넣었지.
찬연 오빠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더니, 입가에 부드러우면서도 개구진 미소를 띠었어.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사고, 같이 나누어 먹는 거 어때?"
"어디서 나누어 먹어요? 밖에는 비가 이렇게나 쏟아지고 있는데요." 나는 여전히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 마트 정면의 하얗게 김이 서린 유리문 쪽을 가리키며 웃어 보였어.
"나 좋은 곳 알아. 내가 태워줄게." 오빠의 얼굴에 이제는 정말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미소가 번져나가.
말이 되게 문장을 제대로 고르기도 전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어. 찬연 오빠는 내 손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고, 오빠의 따스한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얽혀 들어왔지. 맞닿은 손끝에서 온몸으로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만 같았어. 오빠는 계산대로 나를 이끌어 자연스럽게 사탕값을 치렀고, 비 내리는 주차장을 지나 오빠의 차가 있는 곳까지 자기 재킷을 우리 둘의 머리 위로 넓게 펼쳐 씌워주며 나를 데려가 주었어.
차를 타고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히터의 잔잔한 웅웅거림과 와이퍼의 규칙적인 박자감 덕분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어. 오빠는 어둡고 고요한 산마루 턱에 차를 세웠어. 언덕 꼭대기에서, 비에 젖어 흐려진 창문 너머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을 감상하기에 정말 완벽하고 아늑한 숨은 명소였지.
오빠는 비닐 사탕 봉지를 뜯었고, 상큼한 레몬 향이 순식간에 차 안의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어. 사탕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은 오빠가 내게 봉지를 내밀어. 나도 한 알을 꺼내어 입에 물었고,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어두운 폭풍우를 배경으로 서 있는 오빠의 옆모습을 향해 슬그머니 흘러갔지. 난 정말 이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있구나. 오빠가 내 눈 속에 담긴 이 지독하리만치 일편단심인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길 간절히 바라면서, 가슴 한 구석에 아련한 통증이 잔잔하게 내려앉았어.
우리는 오늘 밤 정말 기적 같은 우연으로 다시 만났어. 하지만 차 지붕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소리와 우리를 감싸 안은 온기 속에서, 나는 속으로 남몰래 바라고 있어. 우리가 그저 이 차 안에 평생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간식을 나누어 먹고, 세상으로부터 숨어 버린 채, 내리는 빗소리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 가지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