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실패

낭만실패 pro













누나, 이 시집 있어?”






여주는 지민이 책 더미 속에서 찾아낸 익숙한 표지의 책을 바라보았다. 아, 저거 나 있다. 나 저 작가님 시집은 다 있을걸? 여주는 곧 명쾌한 해답을 내려놓으며 다시 제 손에 들린 두툼한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그럼에도 지민을 도와주지 못하는 게 미안한지, A4 용지 위 줄줄이 놓여있는 문장을 읽다 제 뒤쪽으로 간간이 눈길을 돌렸다.


최근에 반강제로 떠맡은 사건만 아니었다면 이미 제가 나서서 진즉 책 정리를 다 끝내놓았을 거라 생각하며 여주는 서류 한 장을 뒤로 넘겼다. 깨알 같은 글씨로 글자가 가득 차 있는 모양새가 영 보기 좋지는 않아 여주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이거 초판, 누나 꺼 파는 게 낫지 않아?”


“나는 작가님 친필 사인본. 내 이름 석 자 적혀있는 거.”


“엥, 그래도 나는 초판인데···.”


“초판은 돈 주고 사면 구할 수 있는데, 내 이름 쓰인 건 없을 거잖아.”






이씨, 알겠어. 그럼 이거 판다? 지민은 입술을 댓 발 내민 채, 두 손가락으로 책을 덜렁 집어올려 산더미처럼 쌓인 책 더미 위로 책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거의 그와 동시에 아슬히 쌓여있던 책 더미가 파도 앞 모래성 마냥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박지민, 책 줍자.”


“넵.”






막 주우려고 했었는데.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지민은 여주를 향해 눈을 흘기며 거실 바닥 한복판에 널브러진 책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중 대다수가 시집이었다는 것은 안 비밀.


시집만 서너 권 주워들었을까. 여주가 버린 지 오래라 지민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던, 지금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민은 평생 보지 못했을 고등학교 졸업앨범이 보이자 지민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앨범을 열고야 말았다.


민여주, 민여주. 아, 민여주가 어딨지?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시집을 한편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채, 여주의 이름을 서너 번 되뇌며 앨범을 다섯 장 즈음 넘겼을 때. 지민의 하얀 손가락이 여주의 이름과 사진을 정확히 짚어냈다. 와씨, 찾았다. ···똑같이 예쁜데, 뭘 안 보여주겠다고.






“박지민, 너 뭐해. 내가 책 주우라고 했잖··· 아.”


“누나, 누나가 분명 졸업 앨범 없다고 하지 않았어?”






안 샀다며. 근데 누나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예쁘다. 신기하게. 지민이 볼이 붉어진 채로 실실 웃었다. 낭패. 말 그대로 낭패였다. 지민이 웃건 말건 그런 것은 지금의 여주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제 사진보다 한 줄 아래 한 칸 옆에 자리한 사진. 여주는 그 자리에 반듯이 붙어있는 사진과 그 밑에 정갈한 폰트로 쓰여 있는 그 이름 석 자에 눈을 꾹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누나? 왜 그래? 계속 이어지는 정적에 의문을 표한 지민에게 여주는 방긋 웃어주었지만, 뒤로는 지민이 눈치채지 못하게 입 안쪽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우는소리, 혹은 눈물을 여기서 내선 안됐고 보여선 안됐다. 참아내자, 참아내는 것이 앞으로의 결혼생활을 평탄히 만드리라.






“지민아, 누나 화장실 좀.”


“아, 으응. 다녀와. 나는··· 책 정리하고 있을게.”






···고마워. 입을 함부로 열었다가는 우는소리를 뱉을까, 한참을 머뭇거렸다. 저 흔한 말을 뱉기까지. 목소리를 할 수 있는 한 가다듬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축축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망했다는 거다. 이쯤 되면 지민도 눈치챘을 지도 모른다. 지민은, 지민은 능력 좋은 엘리트 검사니까.


다 망했다. 다 망해버렸다. 저 졸업 앨범을 진즉 불태우지 않았고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지 않은 과거의 저를 원망하며, 여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잠그고, 수돗물을 최대한 크게 튼 뒤에야.






“···아, 진작에 버려둘걸. 바보 아냐, 진짜.”






바보 민여주. 바보 같아, 진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던 졸업 앨범 속 제 첫사랑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사진을 본 순간, 사진 속의 그와 눈이 마주친 바로 그 순간. 바보 같았던 지난날의 자신을 원망하며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막 맺어진 떫은 감 맛이 나는 제 첫사랑과의 추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것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불가항력인 일이었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탓에 이제는 친구도 뭣도 아닌, 그런 사이인 그와의 추억을. 사랑을. 모든 것을.


여주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제는 정말로 접어야 한다, 저는 지금 토끼 같은 남편과 신혼 생활 중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그래도. 정신 차려, 정신 차리자, 민여주. 여주는 꼬리의 꼬리를 물고 몇백 년 묵은 뱀처럼 길어진 생각을 간신히 잘라냈다.






“······이 정도면 내가 문제가 아닐까.”






제 옆자리에 있거나, 있었던 남자와의 관계.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인간관계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건 언제나 늘 여주의 몫이었다. 지민과도, 여주의 첫사랑과도, 제 친구들과도.


여주는 그날, 제 무능함을 비난했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를 붙잡지 못했던 것을, 지민의 앞에서 지금 이렇게 행동한 것을, 이런 마음을 품고도 그와 결혼했으며 그것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을.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그동안 수없이 빌어왔던 소원을 다시금 있을지조차 불분명한 신께 다시금 빌었다. 지금껏 많이 망쳐왔으니 적어도 이번만큼은, 지민과의 관계는 망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원을.


낭만적인 사랑을 원했던, 해보자 기꺼이 외쳤었던 그때 그 열여덟으로 다시 돌아가고만 싶은 밤. 여주는 그 일 이후로, 아직도 열여덟 살에 머물러있다.


모든 일의 시작이, 모든 것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날. 여주는 그날을 증오하고 미워함과 동시에 미치도록 그리워했다. 제 인생의 유일한 오점들이라 말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의 시발점.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던, 언제나 옳았다 생각해온 제 선택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후회하게 될 그날을.


이천구 년 팔월 십오 일. 여주는 그날을 증오했고, 미워했고, 그리워했으며.


그 모든 감정들을 합해놓은 것보다 많이, 좋아했다. 이천구 년 팔월 십오 일을. 

2009. 08. 15. 난 빌었다 신이 있다면 날 제발 그때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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