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같은 휴재)방탄 상황문답

끄적끄적)악녀는 악녀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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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악녀가 싫다
W. O형여자
(피가 나오는 움짤이 있습니다.
피가 나오기 전에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못 보시는 분은 참고해주세요.)



 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르레핀의 사랑'에 빙의했다. 그것도 소설 속 메인 빌런인 악녀 '송채아'로.

송채아는 '르레핀의 사랑'의 여주인공인 '김하린'을 질투하여 김하린을 끊임없이 괴롭히다가 결국 김하린을 죽이는 것에 실패하고 감옥에 끌려가 스스로 죽는다.

백작 영애인 송채아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 어릴 때부터 예쁨 받으며 귀하게 자랐지만 자신보다 아름답지 못한데도 남주인공들의 사랑을 받는 김하린을 질투하였다.

나는 '르레핀의 사랑'을 읽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송채아가 죽기 직전 남긴 대사가 있다.

"난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야."

남주인공들과 김하린의 친구 유서하 빼고는 다들 송채아를 사랑했는데 송채아는 왜 그 세 명을 가지지 못해 그런 일까지 벌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일까.

뭐, 상관없었다. 이제는 내가 송채아이고, 나는 착하고 열심히 살면서 송채아가 가진 것을 최대한 누리고 살 것이니까. 내 앞은 꽃길만 펼쳐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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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유서하의 생일파티날이다. 이날은 매우 중요한 날이다. 바로 송채아가 김하린에게 처음으로 악녀짓을 한 날이니까.

 평소에 서브남인 전정국을 마음에 두고 있던 송채아는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던 전정국이 김하린의 옆에서 웃고 있던 전정국을 보고서는 분노했다. 

김하린은 전정국과 어울리지 않는다.

어? 아니, 송채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 갑자기 저런 말이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거지?

아무튼 오늘 파티에서 김하린, 유서하와 좋은 관계를 만든다면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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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김하린이다.


"반가워요, 하린님!"

"채아님?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아름다우셔요."

당연하지, 넌 여전히 촌스럽구나.

"하린님께서도 오늘 빛나세요.
친하신 서하님의 생일이어서 더 신경 쓰신 거 같네요?"

"그럼요, 서하님은 제 친언니나 마찬가지인걸요."

친언니? 네가 유서하와 급이 맞는 것 같아?

"...하린님, 저기 서하님께서 찾으시는 것 같네요."

"정말요?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유서하는 저기 있지도 않았다. 김하린을 한시라도 빨리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머리 속에 맴도는 이 끔찍한 말들이 입밖으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째서 계속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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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드디어 맴돌던 그 목소리가 사라졌다. 마침 김하린이 보이네. 가서 더 길게 이야기해봐야겠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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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님,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후작님. 제가 가져다 먹을 수 있어요."


전정국과 김하린이었다. 서로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로.


네 주제에 감히 전정국을?

"제가 가져다 드리고 싶어서 그럽니다.
부디 말씀해주세요."

"음... 그러면 케이크 한 조각만 가져다 주시겠어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전정국이 널 그렇게 봐.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디 딴 데 가면 안됩니다!"

"푸흐, 알겠어요."


 전정국이 김하린의 곁에서 떠나자 김하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제 분수를 알아야지.

손바닥에서 피가 나려 할 만큼 주먹이 점점 꽉 쥐어지는 것 또한 내 의지가 아니다.

다 망해가는 남작 영애 주제에...

분노에 잔뜩 일그러지는 중인 얼굴 또한 내 의지가 아니다.

그냥 망해버려.


"꺄아아악!"


 뜨거운 수프를 들고 있는 웨이터의 발을 걸어 김하린 쪽으로 넘어지게 한 것도 내 의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건... 이건....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김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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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후로 김하린만 보면 '그 목소리'가 내 머리 속에서 맴돈다. 최근에 소설의 남주인공인 김태형이 김하린에게 사랑에 빠지자 '그 목소리'는 더 심해졌다.

'그 목소리'는 김하린을 티파티에 초대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김하린이 황실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찢어버리게 했다.

그건 잘못된 일이 아니야.
다 그 년이 자초한 일이라고.

'그 목소리'는 김하린의 케이크에 독초를 섞게 했고 베개에 칼심을 넣게 했다.

그래서 내가 그 년을 죽였어?
그냥 좀 괴롭히는 거잖아. 뭐가 문제야?

'그 목소리'는 사람을 고용해 김하린을 납치한 다음 사냥개가 가득한 숲으로 던져버리게 했다.

아냐, 차라리 죽일까?




"아가씨... 편지가 왔습니다...
김태형 공작님과 김하린 영애께서
 아기님을 가지셨다고..."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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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평생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줄 것을
여기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약속할게.
나와 결혼해줘."

 김하린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김태형은 소중하다는 듯이 김하린을 꼭 끌어안았으며 주변 사람들은 환호했다. 평민과 마찬가지던 망해가던 남작 영애가 공작부인이 되는 순간을 봤으니...

참으로 가증스럽다.

김하린은 이제 행복하게 살 거야.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너는 이제 인정해야 해.

아냐, 그럴 리 없어.

김하린은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야.

닥쳐.

여주인공은 해피엔딩을 가지고 악녀는 파멸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난...난 악녀가 아니야.

아니 넌 악녀야, 송채아. 파멸을 받아들여.

아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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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이 몸에 내 의지는 없다. 송채아는 칼을 든 채로 김하린에게 걸어가고 있다. 곧 김하린을 찌르겠지.

그럼... 해피엔딩은 못 하는 건가....

"하하하, 김하린!!"

모두가 행복한 엔딩을 원했어.

"네가 정말 공작과 어울린다고 생각해?"

나는...나는 그저...

"죽어!!"


난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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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너무 흥분했어.
한숨 자면 나을 거야."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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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물가에 앉아 한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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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정신이 들어?"

"...김석진?"

여전히 이 몸은 완전히 송채아의 것이었다.

김석진? 소설에서 그런 인물은 본 적이 없는데...

"왜... 왜 다들 그녀만을 사랑하는 거야?
나도 사랑받고 싶어..."

"내가 있잖아. 내가 널 사랑하잖아."

"그래... 너만 날 사랑하면 된거라고 생각하는데도
모두의 사랑을 받고 싶어...
전정국의 사랑을 받고 싶었어...
김태형의 사랑을 받고 싶었어...
나도 왜 그런지 몰라..."

"...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

"여전히 김하린을 죽이고 싶어."

"그래? 그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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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채아를 찔렀다.

"네가 아가씨를 살리지 못했나보구나."

아, 그런 거구나. 난 송채아를 막아야만 했어. 나는 그러기 위해 이 소설에 송채아로 빙의된 거였어.

"아가씨, 괜찮아. 
우리 다음 생에는 꼭 살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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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채아야."









[석진의 일기]

10월 15일
채아에게 프러포즈를 했고 채아는 내게 안기며 좋다고 했다. 우리는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녀와의 미래가 기대된다.




10월 21일
채아가 이상해졌다. 갑자기 전정국 후작을 사랑하게 되었다며 내게 파혼을 통보했다.




10월 22일
채아가 유서하 영애의 생일 파티에서 웨이터의 발을 걸어 김하린 영애에게 수프를 쏟게 했다. 순수하고 착한 나의 채아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12월 3일
요즘 사교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채아가 대놓고 김하린 영애를 따돌리고 괴롭힌다는 것이다. 채아는 나를 만나도 무시하고 보내는 편지에 돌아오는 답장은 없다. 그런데 채아의 눈빛이 공허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 당하는 것 같다.





2월 25일
김하린 영애가 실종되었다고 한다. 채아가 그런 것이 아니기만을 기도하고 있다.





6월 18일
채아가 아기님을 가지신 김하린 영애를 칼로 찔러 감옥에 갇힌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채아야, 금방 갈게.





두번째 10월 21일
절벽에서 떨어진 나는 내 방 침대에서 눈을 떴고 달력은 채아가 이상해진 그 날로 돌려져 있었다. 어쩌면... 채아를 살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세번째 10월 21일
아무리 막아보아도 채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널 살리기 위해.





스물 한번째 10월 21일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하던 와중에 한 노인은 내게 말을 걸었다. 이 세상은 소설 속 세상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던 세상으로 누군가가 소설을 써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소설이 되었고 채아는 그 소설에서 악녀 역할이라고 한다. 갑자기 바뀐 채아의 태도가 이해가 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채아를 살릴 방법이 없냐고 물으니 채아가 죽을 때마다 다른 세상의 누군가를 채아에게 빙의시키는 저주를 걸었다. 너 스스로가 너를 설득시켜 악녀 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널 살리기 위해 뭐든지 할게.





서른 두번째 10월 21일
너를 내 손으로 죽이는 일도 점점 지쳐간다. 하지만 우리의 끝은 해피엔딩일 거야, 채아야. 내가 널 우리의 소설 속 여주인공으로 만들어줄게. 사랑해, 채아야.


-끝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랜만이네요~ 글은 안 쓰는데 자꾸 구독자분들이
느셔서 아직 내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시구나~하고 와봤어요~
설레는 이야기 대신 섬뜩한 이야기 가져와서
죄송해요~
이 글 속 등장하는 르레핀의 사랑, 김하린, 유서하, 전정국, 김태형은 모두 제 연중 작인 '서브남은 사실 집착남이었다'에 등장하는 소설과 인물들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