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자, 제주도!(2) ----•°.☆
" ···이게 무슨 일이야. "
장갑 때문에 팔목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쳤다.
덥다. 너무 덥다.
감귤 농장에 오면 학생들을 감독하거나 어쨌든 이외의 잡무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넓게 펼쳐진 농장이 신기해 입을 벌리고 구경하던 정한쌤과 나에 햇빛을 차단해주는 농모를 턱 씌워주신 농장주분이 함께 귤을 따보는 게 어떻냐며 이 나무들 속으로 우리를 방생하셨다. 얼떨결에 감귤 체험.. 그래도 이왕 선생으로서 모범을 보이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열심히 귤을 따보았으나.

결과는 이렇게 맺힌 땀. 처음에는 제법 엄청난 열정으로 시작한 혼신의 감귤 따기 쇼에 날아오는 아가들의 응원에 힘입어 속도를 냈으나, 학생들이 귀찮다고 잘 올라오지 않는 곳에서 귤을 따겠다는 포부의 나에겐 특히, 햇빛은 자비롭지 않았다. 반쯤 녹아내리며 결국 나대지 말고 평범하게 행동하자는 다짐을 한 나를 보며 정한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늘만 찾아다니던 아주 약(아 보이는)은 정한쌤을 향해서 애써 웃었다. 윤정한 그렇게 안 봤는데, 녹아내리는 나를 보는 눈빛이 얄밉기 그지없어서.
딱콩-
" 아야! "
" 약았어. "
" 으엥...??? "
딱밤 한 대를 가볍게 날려 버리니까 억울하다는 듯 눈이 커지는 그이다. 선생이면 타의 모범이 되어야지, 학생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사람이 그늘이나 좋아하고(당연한 거임). 옆을 보면서 나도 내 나름 최대한 얄밉게 웃음 지어 보이자 졌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정한쌤. 근데···
" 어우 저거 거슬린다. "
가장 위쪽에 달려 있는 귤이 거슬렸다. 잠깐 내려와 있던 차에 갖다 놨던 사다리가 없어졌는데.. 다른 사다리는 다 누가 쓰고 있고. 두리번거리다 구석에 쳐박혀 있던 사다리 하나를 발견했다. 곧장 그리로 총총 달려가니 외관은 좀 낡아보여도 꽤 단단해 보이는 사다리를 끌고 나무 아래로 다시 왔다. 어느새 이렇게 멀리 온 건지 주변엔 아이들도 없다.
" 어어···. "
좀만 더 하면 닿을 거 같아. 열심히 팔을 뻗다가 현타가 와서 내려가려던 차에,
(뽀각-)
" ······???????"
뽀각..?
고개를 내려보면 사다리 맨 아랫부분이 부러져 있다. 기겁을 하고 서둘러 내려가려는데 적잖이 높은 위치의 사다리가 휘청거렸다.

" 여주쌤···!! "
정한쌤이다···.
마지막 순간 보는 얼굴이 저렇게 잘생겼다니 이쯤되면 만족스러운 결말은 무슨, 꿈도 많고 희망도 많은 교사인 난 팔을 휘저으며 어아악-, 소리를 질러 댔다.
덩달아 깜짝 놀라 함께 비명을 지르며 정한쌤은 이쪽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가뜩이나 무거운 나를 지탱하느라 고생했을 부러진 사다리인데, 팔까지 휘젓는다니.
뽀각-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우당탕탕, 큰 소리와 함께 사다리는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
" 어··· "
...정한쌤의 품에 안착. 떨어지는 과정에서 팔을 더욱 격렬히 휘젓다 뭐라도 잡은 모양인데, 그때 마침 이쪽을 향해 팔을 벌리던 그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 안겨버린 거였다.
"······."
눈을 질끈 감고 그렇게 몇 초가 더 지났다. 짙은 풀벌레 울음과 함께 햇빛은 여전히 따갑게 우리를 비추었고, 정한쌤의 체취가 순간 가까이 와닿았다. 자신에게로 떨어지는 나에 정한쌤 역시 얼결에 나를 껴안았고, 그러니까 지금 내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고 우리는 서로를 꼭 안고 있다는. 어? 현실을 자각한 나는,
" 으아아아악!!!! 미안!!! 미안해 정한쌤!!!!!!! 괜찮아??? 나 많이 무거웠지!!! 진짜 미안해 아까 점심 좀만 덜 먹을걸!!!!!!! "
질겁을 하곤 곧바로 펄쩍 뛰며 그에게서 떨어져 사과를 연신 반복해댔다.

" 어.. 괜찮으니까 일단 좀... 진정..., "
" 진짜 미안!!!! "
급기야 허리를 90도로 굽혀 사죄를 해대는 내 어깨를 그가 살짝 잡고 원래 높이에 맞춘다. 무릎을 살짝 굽힌 그와 눈이 마주쳤다.
" 그만. "
" ..미안해... "

" 피 나잖아. "
사다리의 조각에 스친 건지. 피가 흐르는 다리를 나 역시 그제서야 발견했고, 살이 찢긴 아픔이 조금씩 느껴졌다.
" ···아야. "
" 많이 아파? "
" 괜찮..아, "
" 피 많이 나잖아. 잠깐 봐도 돼? "
옷이 찢기고 무릎에서 피가 생각보다 많이 난다. 걷기도 아플 것 같은 느낌. 자기 겉옷을 벗어 정한쌤이 다리를 묶어주었다.
" 업혀. "
" 어···? "
" 빨리 업혀 여주쌤. "
" 아니 난 걸어가도, "
" 얼른. "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등을 내보이는 그에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 지금 여기 멀잖아, 사람들 있는 데서. 빨리 업혀, "
" ···그럼 잠깐만.. 실례할게. "
조심스레 그의 등에 업히면 바로 일어선 그가 빠르게 농장 입구 쪽으로 가기 시작한다.
" 고마워··· "
" 아니야. 다리 많이 아파? "
" 아니··· 미안해. "

" 미안은 뭐가 미안해. 진짜 괜찮은 거 맞아? "
" 난 괜찮은데··· 무겁지. "
" 너무 가벼워. 그냥 편하게 있어. "
" ···웅. "
" ······근데 진짜 안 무거워? "
" 응. "
" 진짜···? "

" 또 물어보면 무겁다 하고 내려놓는다? "
" 헉.. "
금방 사람들이 많은 쪽에 도착했고 직원분이 달려오셨다. 정한쌤이 나를 평상에 앉혀주고는 옆쪽에 앉았다. 직원분은 이런 거 많이 하는 분이신지(?) 능숙한 손놀림으로 피를 닦아내고 상처를 소독해 주신다.
" 상처가 다행히 생각보다는 크지 않아서, 병원은 안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이거 밴드 붙이고 다니시구요. "
" 아야.. 감사합니다. "
" 네, 여기 평상에서 잠깐 쉬었다 가실래요? "
" 그래도 될까요? "
" 그럼요, 귤도 드세요. "
귤을 가지러 가시는지 그분이 자리를 비우시고 정한쌤이 내게 괜찮냐 물어왔다.
" 괜찮지. 그리고 진짜 고마워···. "

" 아니야. 많이 놀랐겠는데, "
" 아냐··· 네가 놀랬지, 나 때문에. "
" 나 괜찮아. 귤 따러 가봐도 돼? "
" 으응, 고마워. "
정한쌤이 조심하라며 자리를 비웠고 떠난 자리엔 시원한 여름 내음이 가득 내려앉았다.

" 여주쌤!!!! "
" 어, 어어? "
체험이 끝나자마자 재빠르게 내 쪽으로 달려오는 승철쌤에 어리둥절해 그를 쳐다봤다.

" 다쳤다며···! "
" 아, 조금. "
" 많이 다쳤어···? "
" 많이는 안 다쳤고 그냥 다리에 뭐가 스쳐서. "
" 아, 다행이다.. 난 또 엄청 다친 줄 알고. "
" 설마. 전 괜찮습니다 쌤- "
" 다행이네요 ㅠㅠㅠ "
" 학생들 얼른 가서 챙겨줘야지. "

" 알았어.. 조심해!! "
오도도 학생들을 향해 달려가는 그를 보면서 풋 웃었다.

감귤 농장 체험이 끝나고 수련원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어쩌다 보니 조교들과 한 버스를 타게 되었다.
" 여주 선생님! 이쪽에 앉으세요. "
" 아, 조교님. "

" 다리는 괜찮으세요? "
" 네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
" 아니에요 뭘요- 그나저나 여주쌤은 좋으시겠어요. "
" ···네? "
" 아니··· 근무 환경 되게 좋으실 거 같아서요. 주변 선생님들 다 잘생기셨고. "
" 아..하하. "
잘못 걸린 것 같다.
" 선생님들 사이엔 막 썸 같은 거 없어요? "
" 썸이요? "
" 홍일점이시잖아요. 남자 쌤들이 엄청 부둥부둥해주실 것 같은데. "
" 네 뭐 그렇죠···?(영혼 없이 대답중) "
" 여주 선생님은 남자 선생님들 중에 마음에 드시는 분 없어요? "
" 아··· 선생님들 다 좋은 분들이시죠. "
" 아뇨 그런 거 말구요. 아시잖아요- "

"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다들 좋은 동료들이시죠. "
" 진짜 남자로 보이는 쌤은 없어요? "
" 남자잖아요. 여자로 보이진 않아요-ㅎ "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가 대화를 끊었다. 진짜 얼굴 낭비하네···

농장에 다녀오니 어느덧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아이들은 산길 산책에 (끌려)나갔고, 담임을 맡은 선생님들만이 따라나가고 그렇지 않은 몇몇 교사들은 각자의 개인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학생들이 돌아왔을 땐 벌써 밤이었다. 잘 시간이 되어 학생들이 다 눕고- 소등 후 조교분들과 함께 학생들이 자는지를 점검하고(어차피 학창시절 마지막 수학여행에서 안 잘 거 안다) 숨을 돌리며 우리도 각자 방에 누웠다. 씻은 뒤 생각보다 폭신한 침대에 누워서, 잠이 오지 못할 걸 알기에 오늘 하루를 되새겼다.
그리고 그러다 굳이 되새기지 말걸 싶은 내용이 머릿속에 스쳐간다.

" 업혀. "
순간 나를 꽉 붙잡아주던 팔과 멈춰있던 시간이 떠오르며 달아오른 얼굴을 베개로 가렸다.
두근-
두근? 드디어 미쳐버렸나.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옆 침대에 전달될까 걱정이다. 심장이 있을 것 같은 부분을 꾹 내리누르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때 핸드폰이 환하게 켜져 급히 화면을 가리며 가까이 가져와 보았다.



짧은 대화 끝에 겉옷을 두 겹으로 챙겨 입고, 조교분들이 깨실까 조심조심 방 밖으로 걸어나온다. 불 꺼진 복도를 천천히 걷다가 입구 쪽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승철쌤을 발견했다.
'승철쌤-'
조용한 복도에 입모양으로 그를 반갑게 부르며 빠르게 걸었다. 그 또한 피식 웃으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새벽, 건물 안은 작은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새벽녘의 적막을 우리 둘의 발자국 소리가 조심스레 깨었다.

" 여주쌤, 이리 와 봐! "
" 응? "
" 내가 아까 엄청 좋아 보이는 데 찾았거든. 잠깐만 걸을래? "
그와 나는 희끄무레한 새벽 속을 나란히 걷는다. 공기가 아직 조금 차가운 것도 같았다.
걷다 보면 어느새 둘이 발 맞춰 걷고 있었다. 겹치는 발소리에 서로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_

" 우와. "
아직은 어슴푸레한 하늘이 가득 채운 강가.
" 여기가 어디야···? "
멍하니 물과 하늘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작은 바람에 찰랑이는 옅은 물살이 재미있다.
" 아까 농장 갔다 오면서 봤어. 예쁘지. "
" 예쁘다.. "
물빛이 반사된 낯의 그가 투명하게 웃어 보였다.

" 여기 벤치도 있다. "
승철쌤이 먼저 앉아 옆자리를 톡톡 쳤다. 싱긋 웃으면서 옆자리에 앉으니 강의 장관이 시야를 물들였다. 뒤에 있는 벽까지, 밀회 장소로 완벽하다. 스치는 어깨가 간지러워 괜히 또 웃음이 나왔다.
"···."
가만히 웃는 그를 잠깐 빤히 바라보니까 그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 ···이런 장소는 또 언제 보고. "
" 그러게, 어쩌다 봤지. "
" 보게 돼서 좋다. 새벽 감성이야- "
" 그치. "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말이 오고가지 않았다. 고요함이 내려앉았고 그 고요함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 묘한 충분함이 또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갔다.
새벽은 참 특별한 시간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자꾸만 들게 하고, 지난 시간들을 미화한다. 스쳐온 길이 새벽에는 항상 추억이다.
" 쌤. "
" 응. "
" 안 졸려? "

" 아직은 별로 안 졸려. "
" 으음.. "
졸리지 않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수평선을 응시했다.
산들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 에취- "
승철쌤이 재채기를 터뜨렸다. 지금 보니 옷차림이.. 긴팔에 긴바지이긴 하지만 얇은 소재에 뭐 하나 걸치지 않았다. 얼어 죽겠네.
새벽의 공기는 차갑다. 그 차가움 속에 든 작은 몽글거림이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거겠지만. 빤히 그를 바라보다가 겉옷 한 겹을 벗었다.
"···?"
어리둥절해 나를 쳐다보는 승철쌤의 어깨에 옷을 얹어 주었다.
" 아냐, 나 괜찮아. "
" 그냥 있어. 공기 차잖아. "

" ···고마워. "
한참 강의 끄트머리를 응시했다.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
슬쩍 옆을 보니 승철의 눈가에도 빛이 차오르고 있다. 한 칸 한 칸 채워지는 큰 눈을 몰래 지켜보다가 다시 떠오르는 해로 고개를 돌렸다.
구름을 조금씩 밀어내며 해가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이따금 풀벌레가 찌르르, 울었다. 아름답다. 정말 아름다웠다. 동 트는 걸 본 지 너무 오래돼서였을까, 온 세상을 공평하게 비추는 아직 조금은 차가운 햇살에 눈물 약간이 눈가를 타고 내렸다.

그런 나를 보며, 승철쌤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 방긋 미소지었다.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희미하게 웃었다.
" 승철쌤. "
" 나 잠 온다······ "
몽롱한 목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슬슬 감겨오는 눈에 눈을 감고 풀벌레 소리를 만끽했다. 모든 것이 살아 숨쉬는 듯한 시간이다.

해는 어느새 몸을 밖으로 완전히 꺼내어 세상을 붉게 빛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나는 까무룩-그만 편안한 잠에 들어 버렸다.

뒤에 🍊
흐음··· 아무래도 저 사다리 믿음직하지 못해.
여주는 듣지 못했지만 기다려 보라는 말을 남기고 정한은 빠르게 주위의 직원을 찾아 달음박질쳤다. 한참을 다녀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 답답해져 머리를 쓸어넘기던 차에 마주친 농장주가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 무슨 일 있으신가요? "
" 혹시 하얀색 사다리··· 양쪽은 파랗게 칠해져 있고 조금 낡아 보이는 사다리 써도 되는 건가요? 구석에 놓여 있던 거요. "
" 음··· 아! 그거 쓰시면 안 돼요. 부러진 건데 학생들 온다고 치운다는 걸 잊었네···. "
" 감사합니다. "
정한은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빠르게 걸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벌써 사다리 위에서 휘청거리는 여주.
" 여주쌤···!! "
여주의 생각보다 정한은 훨씬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더랬다. 자신도 모르게 팔을 벌리고 떨어지는 그녀를 꼭 붙잡았다. 서로를 껴안고 있음을 먼저 자각했지만, 아니 반쯤 자각하고는 대처법을 몰라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두 사람 위로 햇빛이 부서지다 여주가 제게 연신 사과를 반복할 때, 정한은 오로지 그의 빨라진 심장 박동이 전해지지나 않았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어느새 여주 대사가 다른 등장인물들과 똑같은 것 같다면.. 예리하십니다)
연재가 조금씩 늦어질 수도.. 있을거같아요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