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배, 그 피아노 연주하지 마요 • 2
여주가 다시 자리에 앉은 데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무대 위 피아노를 보자 환영식 안내문에 적힌 음악동아리의 순서가 마지막임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필시 기억해야 했을지도.
‘어차피 마지막인데 본 김에 다 보고 가지 뭐.’
여주를 포함한 몇 안되는 관객들은 연주자가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 연주가 시작될거라 믿은 여주의 생각과는 달리 연주자를 무대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관객들이 기다리다 지쳐 객석 위에서 버터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여주도 거의 비슷하게 녹아내릴 것 같을 때쯤 대기실과 연결된 통로에서 연주자로 보이는 남자가 걸어나왔다.
그는 약간의 펌이 있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얀 셔츠와 검정색 넥타이, 상하의 올블랙 수트의 단순하면서도 정교한, 그만이 소화할 수 있을 듯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있는 스타일과 달리 어딘가 불안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여주의 눈에는 그런 그의 심상치 않은 표정이 눈에 밟혔다.
그가 무대의 중심으로 걸어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몇몇의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 거대한 공간을 채우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작은 소리였다.
그는 피아노 앞으로 가서는 작게, 남들이 눈치 못 채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무슨 사연으로 저리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그의 표정을 유일하게 인지한 여주는 약간의 의문을 품었지만 그저 긴장했겠거니 하고,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심정으로 연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피아노 앞 좁은 의자의 앉았고, 매일 보는 것이지만 왜인지 이날따라 낯선 건반들 위에 기다란 손가락들을 얹었다.
가냘프면서도 굳은 다짐을 가진 듯한 손가락들이 천천히 건반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공간에 몇 년동안 해묵은 허물을 벗고 세상 밖으로 처음 나온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단조로운 조명이 연주자의 흑발의 머리카락을 푸르게 빛내고 있었다.
차분하게 출발해 절정으로 치닫던 음들이 서서히 끝을 맺었다.
그는 연주를 무사히 끝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듯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로 혼자 그만의 침묵에 갇혔다.
그가 그렇게 정적 속에서 벗어나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만의 침묵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는 듯 황홀한 표정으로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손바닥에 불이 나듯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전여주였다.
고요한 공간에 울리는 새로운 소리에 연주를 감상했던 사람들도, 잠에 빠져있던 사람들도 아무 영문을 몰랐지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소리의 울림에 따라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앞선 무대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뜨거운 반응에 연주자 또한 놀란 표정으로 그런 여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단순히 여주가 신기해서가 아니였다. 여주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 눈에는 여러가지 새로운 감정들이 섞여있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그조차 알지 못했다.
연주 시작 전부터 신경쓰인 남자의 긴장한 표정과 달리 완벽에 가까운 연주에 여주는 꽤 놀랐고 그 순간 그 남자가 인간으로서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아니 자신의 행동에 만족하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기립해 그에 대한 공경을 표했다.
‘와아… 끝까지 보길 잘했다… 진심으로…’
열기로 가득 찬 공간에 환한 불빛들이 켜졌고 오히려 그 불빛들이 열기를 식혔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를 찾아나섰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레아관을 나가고도 여주는 아직 온몸의 전율을 되새기며 남은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 피아노 연주나 클래식 같은 음악에는 관심이 아예 없던 여주라 그 감동은 여주 본인에게도 새롭게 다가왔다.
여주는 학교에 들어오며 받아 가방에 넣어둔 환영식 안내책자가 떠올라 꺼내보았다. 역시나 연주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연주자의 이름을 머리에 새긴 여주는 안내책자를 손에 꼭 쥐고는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이 공허한 공간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가방을 어깨에 동여맨 여주는 유난히 불빛이 많이 새어들어오는 곳으로 향했다. 갑자기 쏘아오는 강한 불빛에 여주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며 나아갔다.
보는 사람마저 불안한 걸음으로 걷던 여주는 반대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양쪽 귀에 이어폰을 낀 채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둘은 다행히 살짝 비껴 가 정통으로 부딪히진 않았지만 둘의 어깨가 서로의 것과 닿았다.
남자는 놀라 이어폰을 빼고는 여주에게 미안하다 했고 덩달아 놀란 여주도 남자에게 사과하기 위해 뒤돌아 섰을 때,
“어-ㄱ,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는 얼굴을 보았다.
선배, 그 피아노 연주하지 마요 • 2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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