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빈아, 원래 점심 방송 오프닝 곡은 방송부장이 지정해 주는 거 아니었어?”
어제오늘 연속으로 라디오 부스에 앉아 마이크 단자를 점검하던 내가 묻자, 조정실 밖에서 사연함을 들고 오던 원빈이가 발걸음을 멈췄다.
“원래는 그렇죠.”
“근데 어제 나갈 때 들었던 곡 말이야. 그 인디 밴드 노래, 선곡표에 없던 거잖아.”
원빈이는 못 들은 척 사연함을 부스 앞 테이블에 쿵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먼지가 사르르 날리는 사연함 위에는 단정한 글씨로 ‘점심 라디오 사연 및 신청곡’이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어제는 첫날이라 그냥 제 취향으로 틀었어요. 선배도 좋다면서요.”
“좋긴 엄청 좋았지. 덕분에 집 가는 길 내내 그 노래만 들었다니까.”
내 말에 사연함 입구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던 원빈이의 손끝이 찔끔 멈칫했다.
녀석은 괜히 고개를 홰홰 저으며 자기 자리인 콘솔 앞으로 걸어가더니, 커다란 헤드폰을 목에 걸치며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신청곡 들어올 테니까 선배 좋아하는 노래는 못 틀어줘요.”
“에이, 내 신청곡도 하나쯤은 틀어주라. 엔지니어 재량 몰라?”
“권남용이에요, 그거.”
단칼에 거절하는 것 같으면서도 원빈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게 유리창 너머로 똑똑히 보였다. 말은 차갑게 하면서 표정을 다 숨기지 못하는 게 어딘가 엉뚱하고 귀여웠다.
12시 19분 50초. 조정실 디지털시계가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손가락 세 개, 둘, 하나. 원빈이가 엄지를 척 들어 올림과 동시에 마이크 위의 ‘ON AIR’ 불빛이 붉게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혜성고 학생 여러분. 점심 라디오를 진행하는 박성찬입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훨씬 따뜻해졌네요. 다들 맛있는 점심 식사하셨나요?”
오프닝 멘트를 깔끔하게 치고 나가는 동안, 원빈이는 어제처럼 턱을 괸 채 유리창 너머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멘트가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내 귀에 꽂힌 헤드셋에서 치지직- 하는 기분 나쁜 잡음과 함께 귀를 찌르는 듯한 고음의 하울링이 울렸다.
“웩-!”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헤드셋을 살짝 벗어 던지듯 내렸다. 순간, 유리창 넘어 조정실에 있던 원빈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부스 문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덜컥 열렸다.
“선배, 괜찮아요? 귀 안 아파요?”
원빈이가 헐레벌떡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무심해 보이던 평소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진심으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녀석은 마이크에 걸려 있던 내 헤드셋을 빼앗아 들고 단자 선을 잽싸게 확인하더니, 의자에 앉아 있던 내 쪽으로 상체를 훅 숙여왔다.
“단자가 살짝 헐거워져서 출력 노이즈 탄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내 귀 근처로 손을 뻗어 혹시나 무리가 가진 않았는지 살펴보는 원빈이의 손가락 끝이 귓가에 슬쩍 스쳤다. 얼핏 스친 감촉인데도 어제 본 녀석의 긴 손가락 온도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아… 응, 나 괜찮아. 순간 삐 소리가 좀 커서 놀란 것뿐이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원빈이의 눈동자는 생각보다 투명하고 맑았다. 매번 졸린 눈을 하고 있거나 헤드폰 뒤에 숨어 있어서 몰랐는데, 눈썹 아래로 떨리는 속눈썹까지 다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나도 모르게 숨을 잠깐 죽이고 있자, 세팅을 완료한 원빈이가 문득 자기가 너무 바짝 붙어 있었다는 걸 깨달은 듯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다행이네요. 귀 안 상해서.”
“고마워. 진짜 빠르다, 엔지니어님.”
내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자, 원빈이는 붉어진 귀 끝을 가리려는 듯 목에 걸린 헤드폰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앞으로는 기계 세팅 미리 잘 확인해둘게요. 방송 다시 시작해요.”
원빈이는 후다닥 조정실로 돌아가 슬라이더 기어를 올렸다. 이어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노래는 잔잔한 아쿠스틱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곡이었다. 차분하지만 따뜻해서, 방금 전 쿵쾅거리기 시작한 내 심장 소리를 가려주기엔 아주 딱 맞는 음악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정리하는 시간. 원빈이는 사연함을 3층 복도 게시판 밑에 가지런히 가져다 놓았다.
“선배, 내일부터는 사연함에 들어온 종이 읽어야 하니까 대본 멘트 짧게 준비해 와요.”
“오케이. 근데 원빈아, 오늘 마지막에 틀어준 노래 제목이 뭐야?”
가방을 매던 원빈이가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안 알려줄 건데요.”
“치… 치사하게. 나중에 비밀 노적에 적어둔 거 몰래 볼 거다?”
“보든가요. 글씨 못 알아보게 갈겨써 놓을 테니까.”
원빈이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먼저 복도 저편으로 걸어 나갔다.
손끝이 스쳤던 귓가가 아직도 약간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나는 원빈이의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방송실 문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번 학기, 방송부에 들어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