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운데
새하얀 내 도화지에 그녀 몰래 사랑을 그린다.
말랑공 씀.
*본 글의 소재는 영광스럽게도 보라해해ㅐㅐ 님께서 주신 소재입니다.
이윤소. 그녀는 내게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을 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별것 없었다. 그저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좋아하는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에 만나면 같이 풍경화를 그리자는 기약을 하고, 항상 똑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질리지가 않는다. 매번 다른 화가가 나오고, 매번 색다른 작품이 나오고, 그래서 질리지가 않는 걸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이유는 대화 상대가 이윤소, 그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윤소
_내일 만나서 풍경화 그릴래요?
좋죠_
이번 대화도 똑같다. 풍경화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나누다가 둘 다 지쳐서 대화의 끝맺음을 맺으려고 할 때즈음 만나서 풍경화를 그리자, 고 말한다. 만나자고 말하는 사람은 항상 다르다. 그녀일 때도 있고 나일 때도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녀가 만나자고 한다. 내일 만나자고, 풍경화를 같이 그리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 그녀와 만나기 위해 약속 시간보다 몇 시간은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한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기에. 그녀는 나를 친구 그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를 자그마한 희망을 품고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껏 멋을 부린다. 이게 지금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이제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미련곰탱이처럼.
푸른 초원 위에 하얀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서 있는 그녀. 그녀는 나보다 더 일찍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윤소 씨. 제가 너무 늦었죠. 많이 기다렸어요?”
“아직 약속 시간도 안 됐는데요, 뭘. 많이 안 기다렸어요. 걱정 말아요, 정국 씨.”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려는 밀짚모자를 잡고서 은은한 미소를 머금는 그녀.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때와 달리 내리쬐는 햇살에 닿은 푸르른 초원을 딛고 서 있는 그녀가 오늘은 왠지 청초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냈던 그때와 달리 오늘은 청순한 분위기를 낸다.
“오늘은 풍경화 말고 윤소 씨를 그려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그녀는 흔쾌히 허락하며 자세를 잡는다. 인위적인 포즈가 아닌 자연스럽게 서 있는 자세. 그렇다고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게 밀짚모자를 잡고서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이 모든 게 그림같아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어서 그려달라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곤 물감을 준비한다. 팔레트에 알록달록한 물감을 덜고, 붓에 물감을 묻혀 새하얀 도화지에 그녀를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그리다가 물감이 볼에 묻고, 묻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녀를 그리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이내 그녀가 잠시 내 쪽을 바라봤을 때 쿡쿡거리는 그녀의 웃음 소리에 고개를 든다. 그러곤 그녀가 자신의 오른쪽 볼을 콕콕 찌르듯 가리키며 물감이 묻었다고 알려 준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떨군 뒤 재빨리 물감을 팔로 쓱, 닦아낸다. 하지만 지워지기는커녕 번지기만 해서 더욱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된다.
“하하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여운 거예요, 정국 씨.”
윤소 씨가 더 귀여워요, 라고 밖으로 내뱉지는 못 하고 구태여 속으로만 삼킨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내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들킬 것이고, 그러면 분명 어색해질 게 뻔하기에. 나는 그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그녀를 마저 그린다. 그러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을, 내 호감을, 내 사랑을 그녀 몰래 도화지에 담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