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바람 아래 그 꽃잎처럼
흑장미의 유혹 (de la escala pentatónica cor)

蓮月연월
2020.08.24조회수 14
"혼자 오셨어요?"
사과의 단물이 벌레를 끌어들인다 했던가. 완벽한 그녀의 외형은 옆 테이블 남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익숙하다는 듯 눈을 맞추고 손을 살짝 흔든다. 주변의 광할한, 따스한 시선은 비릿한 바람에서 불어오는 해갈을 도왔다. 마음껏 심취했다. 그렇게라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못 할 게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저를 겉만보고 판단했기에, 그들에게 인정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마리의 고풍적인 흑조가 되는 것이었다. 검은 깃털로 뒤덮힌 온 몸을 바라보며, 우아하게 벌어진 긴 목을 바라보며, 달콤함과 배반을 속삭이는 악독한 입술을 바라보며. 그녀는 웃었다.
"너 같은 년이 왜 내 딸이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쳐나가. 돈을 벌어오라고!!"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귓가에 농후하게 맴돌다 끈적하게 감돌았다. 반듯하게 탁자 한 구석을 자리하고 있던 소주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그녀의 하얀 속살에 생채기를 만들어냈다. 무릎에서 피가 흘러 발끝을 붉게 적신다. 피가 굳고 새 살이 돋기도 전에,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생긴다. 완벽한 자신을 완성시키기도 전에, 몸은 하나하나씩 죽어간다. 몸이 죽으면 사랑을 갈구하던 영혼도 소멸된다. 그토록 영원을 염원하던 입안은 허물어지고 쉴새없이 유린되는 혀만이 남는다. 화려한 외형의 또 다른 이면은 비참했고, 추악했으며, 아팠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녀를 지나간 세월 속에 구속했고, 갉아맸다. 사랑을 원했는데. 사랑받기를 원했는데. 야속하게도 신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저 황량한 사회에 그녀를 매몰차게 집어넣고 남들의 행복한 모습을 두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받은 게 없어서 되려 줄 게 없었던 그녀에게 모든 걸 다 가진 사람들은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완벽해지고 싶었다. 남의 것, 남의 시선, 남의 영혼을 빌려서라도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싶었다. 아름답다 칭해지는 백조보다는 고혹적이다 칭해지는 흑조가 되고싶었다. 모두가 저를 바라보도록, 그래서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사랑을 채울 수 있다면, 모든 이의 동경을 받을 수 있다면. 이미 지나갔던 과거의 기억 따위는 무한한 편안함과 행복감에 취해 사라져버릴 것이니. 벌써부터 손에 땀이 쥐이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왠지 두근거렸다. 결국 그녀는 집을 나왔다.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집안의 돈이랄 건 다 모아서 챙겼다.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해방된 그녀의 발걸음은 날아갈듯 활기찼고, 눈빛은 영롱하게 빛났다. 그토록 느껴보지 못했던 위안을 되찾았고, 예상치 못할 미래는 아득했지만 어떻게든 행복할거라 생각했다. 돈으로 온몸을 꾸미고 치장하고, 변조해냈다. 세상이라는 거울 앞에선 그녀는 완벽한 한 마리의 흑조였다. 외형은 완성했다. 이제 내면을 채워줄 먹잇감을 찾으면 되는 거 였다. 궁핍한 가슴을 뛰게 해줄, 자극적이고 야릇한 먹잇감을. 누구는 완벽해질 거라는 저에게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애가 그런 소리를 하면 쓰나, 하며 콧방귀를 꼈다. 마치 너 따위가? 라는 표정으로. 그래서 그녀는 제 손에 비수를 꽃던 그 숨결을 끊어냈다. 잿빛 그림자가 투영된 붉은 입술로 어리석은 영혼들을 짓이겼다.
"왜 그래? 이제야 감흥이 좀 생긴거야?"
그녀는 온몸에 가득한 상처를 애석한 영혼들에게 버렸다. 흑색 빛깔 장미 한 송이를 입에 물어주며 딱딱한 가시에 그들의 입이 찢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들의 피가 입술을 가르고 흘러내려 하얀 바닥을 톡톡 물들였다. 그들이 고통스럽고 아파할 수록 그녀의 몸은 붕 떠오를 정도로 가볍고 환희로워졌다. 흑장미는 효과가 있었다. 줄기의 곧은 가시가 그들의 입술과 입맞춤 할 때-흑장미의 향기에 홀린 그들의 영혼은 너무 쉽게 달콤한 유혹에 복종하며 매달렸다. 마치 알면서도 놓을 수 없는 죄악처럼, 처음부터 틀렸다는 걸 모르는 바보처럼.
"혼자 오셨어요?"
"네. 보시다시피."
금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그녀가 천천히 남자의 옆에 앉아 와인을 따랐다. 쪼르륵, 비참한 최후를 예견한 마지막 아우성. 와인잔을 채우는 그 소리는 여느때보다도 웅장하고, 서글펐다. 붉은 입술을 중간으로 모은 그녀가 백에 숨겨두고 있던 장미를 쥐었다. 찔리지 않게 끝부분을 살짝 움켜쥐고 다시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린다. 천천히 놀리다 갉아먹을 계획이었다. 장미빛 향수가 물든 손이 남자의 허리를 감싼다. 흠칫, 떨리는 반응에 그녀의 눈빛이 더 열망적으로 불타올랐다. 이제 넌 나만 바라보게 될거야. 내 흑장미가 널 그렇게 만들테니까. 상상만 해도 날아갈 것 기분이 온 몸을 덮쳤다. 이미 그녀 안의 고독적인 욕망은 수면 위로 올라온 지 오래였다. 그녀가 만든 파도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 곧이어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하늘로 부터 내리는 우수가 배를 강타한다. 배가 뒤집어지려는 순간 푸르게 고요하던 바다는 붉은 색으로 물들고 와인잔을 손으로 빙빙 돌리던 그녀가 장미를 꺼내들었다.
"나 그쪽 마음에 들었는데. 내가 찍어도 되나."
"궁금해요? 내가? 눈 감아볼래요?"
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가 설렌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녀의 백에서 장미가 완전히 꺼내지고 장미는 세상의 숨결을 가득담아 악몽의 원흉이 되었다. 그녀의 손이 남자의 입으로 옮겨갔다. 그 순간, 남자의 눈이 뜨이고 장미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장미를 잃은 그녀의 손이 떨렸다. 향기를 잃은 흑조는 완벽하지 않다. 모든 이의 시선을 받을 수 없다.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던 내면 속의 상처가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고풍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추악하고, 괴상하고, 아파보였다. 저를 비추는 거울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과거의 모습을 한 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두려워진 그녀가 와인바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뾰족한 하이힐 사이로 짓밟혀 바스러진 그 장미꽃. 한 때는 저를 권위와 품위의 존재로 만들어주던 장미가 이제는 저를 바라보며 비웃고 있었다. 매일 걷던 길마저도 가시밭인듯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수없는 사람들의 영혼을 홀리던 손끝은 끝에서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머리에서부터 피가 흐른다. 지금까지 수없이 가려왔던 진실된 내면이 파해져 온 바닥을 적신다. 그렇게 숨기려고,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허무했다. 완벽함을 위해 모든 걸 내던졌는데, 장미를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었는데. 바닥에 털썩 주저 않은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모든 악의가 씻겨져 내리고 상처가 드디어 멎는다. 이제는 더 이상 흑조가 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될 수 없었다. 착각 속의 허황된 그녀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죽었다. 그녀가 홀렸던 무수한 영혼에게 도리어 이끌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