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투명한 잔에서 일렁이는 샴페인을 쭉 들이켰다. 목에서 느끼지는 싸한 기분은 늘 적응이 안 되었다. 그런 적응되지 않는 느낌에도 계속해서 술을 찾는 자신이 한심해 야트막하게 웃었다. 아직 낮임에도 시커먼 커튼을 쳐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부엌의 벽에 조심스레 등을 기댔다. 역시 벽은 벽인지 사람과 비슷한 온기도 있지 않은 벽에 무엇을 기대한 건지 이러고 있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술기운인지 점점 몸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
손에 들려있는 잔이 깨질 듯 잔을 든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다 식탁에 놓여져있는 그의 사진과 마주쳤다. 그를 죽일듯 째려봤다.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운명과 결과가 달라지는 게 있다면, 난 널 평생 째려볼 자신이 있다.
너를 보며 할 말은 많다. 그 말들을 토해내기 위해서 입을 달싹여보았지만
끝내 몰려오는 두통에 하려던 말을 멈추고 눈을 스륵 감았다. 그저 모든 게 내 잘못이니 너는 내 탓만 하며 돌아오면 된다. 그렇지만 너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염 없이 기다리기만 해야한다는 점이 비참하겠지만.
***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고 일어났음에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거실의 불 스위치를 눌렀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기에 갑자기 밝아져 버린 주변에 눈이 자동으로 찌푸러졌다.
"... 으으."
한껏 밝아진 거실의 쇼파에 털썩 앉았다. 앉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식타에 놓여져 있는 액자 속 한껏 웃고 있는 그와 눈과 다시금 마주쳤다. 기분이 썩 좋지만은 못 하였다. 그러나 사진으로라도 그의 미소를 지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들었다. 사진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다 결국 일어나서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방에는 그의 흔적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었다. 그런 게 그녀에게는 약이 되기도, 병이 되기도 하였다. 어떨 때는 그녀를 비참하도록 바닥까지 끌어내렸으며 또 어떨 때는 그녀에게 안심을 시켜주었다.
지금은 그가 여기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짜증나."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당장 그가 돌아온다면 미친 듯이 울며 보고 싶었다고
크게 소리칠 자신이 있다. 다만,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 하고 싶다.
너에게 비난을 하기 전 나는 너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리고 넌 내게

잡을수도, 담을 수도 없는 신기루였다.
삑 삑 삑...-. 몇 번의 도어락 누르는 소리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 강도라도 들은 건가라는 생각에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말 강도라면? 난 어떡해야 하지? 조심스레 경계하며 방에서 나가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 들어올 사람도,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아니, 애초에 아는 사람은 나와 그였다. 사실상 이미 그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아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거실로 다가갈수록 경계는 심해졌다. 긴장이 돼서 그런지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거실로 가는 몇 초가 이렇게나 길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그리로 가기 무색하게도 저 복도에서부터 성큼성큼 들려오는 발 소리는 그녀를 공포에 잠기게 했다.
"........"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결국 옆에 있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이 사람이 정말 강도라면 난 죽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발소리가 뚝 끊기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을 꼭 잡고 있는 그녀와
마주하였다.
".........."
난 결국 너만 기다리다 죽는구나. 싶을 참, 여주의 시선 아래 신발까지 벗고 들어온 남성의 발이 보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는 그녀를 헤치려 들지 않았다.
이상한 기운에 발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 어...?"
믿을 수 없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
"......"
너다. 내가 기다리던 김태형.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미친 듯이 새어 나왔다. 내가 지금 헛된 꿈을 꾸는 건가, 술을 먹어 이러는 건가. 꿈이라도 좋다.
꿈에서라도 널 마주할 수 있다면.
"...여.....주..."
... 여주야···. 아주 희미하고도 작은 목소리였다. 날 웃고 울게 만든 너의 목소리. 날 밀치며 희생했던 그날의 피범벅이인 김태형이 아니라 평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모습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
너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아아, 따뜻하다. 조심스레 잡은 두 볼. 마치 네가 살아있기라도 하다는 듯 따뜻했다. 혹시 지금 너를 놓아버리면 다시는 보지 못할까라는 생각에 저릿한 가슴 한 켠을 느끼며 네 품에 안겼다. 정녕 꿈이더라도 널 또 다시 놓친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 태형아···"
태형이 여주의 등을 토닥였다. 살살. 그녀가 진정할 수 있게.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태형의 가슴팍이 점점 축축해졌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랑했던, 사랑을 결코 이루지 못 한 태형의 표정은 그의 다정함이 진득이 묻어있는 행동과는 상반되게 굳어있었다. 초점 없는 눈, 일자로 고정된 입꼬리까지. 그리고 그녀의 들썩거리던 어깨가 천천히 진정이 된다 싶었을 때, 귓가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날 살려줘."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앙 물었다. 그리고 다시 당황한 듯 한,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그제야 미동 없던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며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안 녕.' 한 글자씩 또박또박 끊어서 입모양으로만 이야기하며 사라졌다.
"......"
처음에는 희미한 목소리로 부르던 자신의 이름과 정반대로 태형이 귓가에 대고 이야기 했던 말은 선명히 들렸다. 소름 돋을 정도의 오싹하고도 온기마저도없는 그런 목소리로.
머리에 피가 마른 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비로소 온몸으로 깨달음과 동시에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어째서인지 자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에 눈을 번쩍 떴을 때는,

"........아."
이미 늦은 후였다.
***
김여주 그녀가 눈을 뜨자, 매서운 14개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저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는 그 검은 눈동자들. 그들의 눈빛에 그녀가 주춤했다. 차가운 공기에 손이 발발 떨렸다. 이곳은 대체 어디인지, 내 앞에 있는 이들은···.
자신을 쏘아보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조용히 애꿎은 손장난만 쳐대던 김여주의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어라. 분명 방금까지 따뜻하던 자신의 손이 점점 차가워졌다. 분명 평소 같았으면 자신을 걱정해 주어야만 하던,
고등학교 시절의 선배 정호석.

"......"
옆 집에 사는 갓 민증을 뗀 전정국.

"......."
마지막, 날 사랑하던. 아니 아까 나에게 살려달라던 김태형까지.

"......"
그 외 자신을 쳐다보는 네 명의 인물들은 모두 안면도 없는 초면이었다. 낯선 상황에 온몸이 물에 젖은 강아지 마냥 오들오들 떨어댔다. 이게 무슨 일이지. 또 이들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모든 게 혼란스러운 이런 상황에 눈물이 차올랐다. 또 자신과 친분이 있던 김태형, 전정국, 정호석의 시선. 분명 김태형을 제외한 저 둘은 어제까지만 해도 인사를 하고, 연락을 잠시나마 하던 사이였다.
"....태형... 태형아."
겁에 질렸다. 그게 현재 김여주의 상태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 김태형···."
너까지 날 그런 눈으로 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애써 말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삼켜냈다. 내가 널 기다리다 이런 곳에 떨어졌는데.
"일어나."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응답한 것은 차가운 목소리의 김태형이었다. 아까 자신에게 귓속말을 했던 그 말투로. 긴 다리로 성큼성큼 김여주의 앞까지 다가가 자신의 팔을 여주에게로 올곧게 폈다. 일어나라니깐. 여주 앞에 놓여져있는 커다란 손. 아까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던 그 손이었다. 서럽다, 무섭다 보다는 그 손이 낯설었다. 김여주에게 손을 뻗는 김태형 뒤로는 여섯 남자가 짝다리를 짚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
"... 여기가 어디야?"
"......"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정적이었다.
"그전에 내가 먼저 부탁하지 않았나?"
"일어나라고. 벌써 세 번째 같은데."
평소 김태형의 말투가 아니었다. 날이 잔뜩 선 그의 응답에 더 이상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덜덜 떨렸다.
"풉, 얘 겁 먹은 거 아니야?"
태형의 뒤에서 웃음이 들렸다. 아하하하···. 입꼬리를 잔뜩 올린 웃음 속에는
저를 깎아내리려는 분명한 의도가 섞여들렸다. 그러며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을 이었다.

"그쯤 해두자."
"나중에 또 만날텐데 뭐 그렇게까지 겁을 줘."
전정국의 말에 김태형을 잡은 김여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봤자 약한 악력에 김태형은 눈썹 한쪽을 치켜들며 자신의 손을 잡은 김여주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 그런가."
태형이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이 끝나자 정국이 태형을 향해 한 번 비웃었다. 그런 웃음은 사람의 기분을 불쾌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느껴졌다. 그러며 여주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가 자신을 올려다보지 않게 눈높이를 맞추려 무릎을 낮추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정국이 되물었다. 여전히 장난기가 섞인 말투였다. 여주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너 현실에서 뒤졌어."
"알아?"
그의 말이 귀에 쏙쏙 박혔다. 그러며 정국이 배를 잡고 웃겨 죽겠다는 듯이
깔깔대며 웃었다. 죽었다고? 내가? 왜? 아니, 난 분명 살았다.
살아있었는데,···
"그래, 살아있었겠지. 근데 우리를 원망하지는 마."

"저 새끼가 너 데려와서 죽은 거니깐."
정국을 손으로 슥 밀어내며 할 말을 가로챈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가 하얀 손가락을 들어 김태형을 척하고 가리켰다.
"....."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눈으로 좇았다. 왜? 대체 왜. 머릿속이 하얘졌다. 믿을 수 없어 저 남자가 가리키는 곳을 몇 번을 다시 봤다. 그리고 그곳에 서있는 것은 몇 번을 확인해도 자신의 옆에 서있는 김태형이었다.
태형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 순간 몰려오는 당황스러움에 꽉 쥐고 있던 태형의 손을 힘 없이 놓았다.
"태형아··· 아니잖아."
"......"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걱정 마, 여주야."
"나도 널 개같이 기다렸거든."
"...태형아, 이게 무슨 말인데."
"집 나간 주인이 날 찾을 그날까지."
"태형아!"
이곳에서 널 기다렸다고. 내가 죽었다는 말보다, 지금 태형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소름이 더 돋았다. 태형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의 눈에는 이미 생기란 없는 죽은 사람의 눈 같았다.
"그래도 걱정 마, 데려온 건 나여도 넌 온전히 죽은 게 아니거든."

"널 죽이려는 게 아니라, 널 살리려고 우리가 너를 데리고 온 거니깐."
"그러니깐 미워하지는 말아 주라."
"......"
결국 죽은 건 늘 나니까. 의미심장한 말을 그가 뱉어냈다. 태형이 말한 죽은 건 늘 자신이다.라는 말에 또다시 태형이 죽던 아니, 나 대신 죽던 그날의 악몽이 생각났다. 끔찍하게 그날을 기억해 내는 머릿속에서 늘. 이라는 말이 거슬리니 짝이 없었다. 늘 너라니? 악몽을 생각해낸 덕에 속이 울렁거렸다. 토가 나올 것만 같아 작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웩. 하는 혓구역질이 몇 번 나왔다.
5년 전의 악몽. 그 덕에 뱃속의 모든 장기들이 뒤얽히는 느낌이었다.
혓구역질을 해대는 여주를 앞에서 마주하고도, 방금 그 말을 끝으로 정리한
김태형과 그 뒤 여섯이 뒤를 돌아 제 갈 길을 가버렸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죽었다 아니 죽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두통이 다시금 몰려왔다. 빙빙대는 시야에 미간에 힘을 주고 한 손으로는 울렁거리는 배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출구를 찾기 위해 벽으로 보이는 곳을 짚었다.
그러자 훅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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