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눈이 소복이 내린 어느 겨울,
당신의 손끝으로 빚어지고
당신의 온기가 숨결이 되어
내가, 여기 있습니다.
살이 에일 만큼 추운 겨울, 서하는 소복이 쌓인 눈을 모아 작고 엉성한 눈사람 하나를 만들었다.
술에 취하면 겨울에 꼭 한 번은 부리는 독특한 주사였는데 그렇게 만든 눈사람이 한, 서른 개쯤 되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눈사람을 남의 가게 앞에 세워 두고 한참을 바라보던 서하가 그제야 일어나서
비틀대며 집을 향해 멀어졌다.
그리고 그 눈사람을 만든 눈인 연준은 한참 동안이나 멀어지는 그 작은 등을 바라봤다. 한참이나.
누군갈 그렇게 바라보는 게 얼마만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저 한참이나 그 뒷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만 보던 연준의 입술 끝에 짙은 외로움이 묻었다.
"...보고 싶어."
서하가 떠난 지 채 30초를 버티지 못한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져 사르르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 작은 속삭임을 연준을 지켜보던 저승 월직차사 태현이 전부 듣고 있었다.
월직차사 강태현. 그는 그 눈사람을 만든 눈에 깃든 영혼을 지켜보는 이였다. 전생의 업으로 인간도,
짐승도 아닌 무생물, 봄이 오면 녹아 사라질 눈송이가 되어 내린 그 눈사람을 지켜보던 저승사자였다.
언제였던가, 염라의 앞에 서서 사람도, 짐승도 아닌 '눈'으로, 미물로 환생하라는 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미동조차 없었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지금 눈사람이 되어 인간 여자를 향해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방법은 있어."
"...볼 수 있어?"
"댓가를 치러야 하긴 하겠지만, 조건도 좀 있고."
"할게."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대답에 태현이 눈사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왜지, 왜 목숨을 걸어서까지.
태현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한참 동안 눈사람을, 아니 눈사람이 된 연준을 바라보다 눈사람을 통째로
집어 들고 한 대학병원의 중환자실로 들어간다. 그곳엔, 호흡기와 수액을 주렁주렁 달고 겨우 숨을 쉬고
있는 남자 아이 하나가 누워 있었다.
"최범규, 나이는 겨우 스물. 원래는 15년을 더 살았어야 할 명이나 이전 차사의 실수로 산 송장이 되었지. 이 아이 몸을 네가 쓰는 거다. 대신, 감정은 남기지 않고."
"...감정이 없으면,"
"감정을 가지고 마음에 온기가 돌면 넌 죽어. 봄이 오면 눈은 녹아 사라지는, 신이 빚어낸 자연의 이치대로. 그래도 해 보겠냐?"
끔찍하게 달고, 끔찍하게 잔인한 조건부 삶이 무생물로 다시 태어난 이에게 들이밀어졌다.
사실 태현은 연준이 무슨 생각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차사 일을 해 오면서 인간의 수많은 모습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연준이 간절하게 그 생을 살 거라는 것도 알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좋아.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무생물로 환생했어도 인간의 미련은 그리도 질기고 무서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