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당신과 함께
| 06_계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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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이 누군가와의 대화 후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 멀리 해가 지고 있었다.
"..뭘 했다고 이렇게... 하루가 가버린 거지."
잠시 멈춰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호석은
누군가의 대화 소리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곳에 보이는 사람은..
우연히도, 여주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주와 정국이었지만,
호석에게 보이는 사람은 여주 뿐이었다.
"아잇.. 정구가아~ 나 업어조.. 웅??"
여주는 취했는지 정국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걷고 있었고, 자꾸만 업어달라며 말꼬리를 길게 뺐다.
"누나, 그니까 좀 업혀봐.."
정국이 여주가 업히기 쉽도록 자세를 낮춰줬지만,
업어달라고 한건 잊었는지 이번에는 싫다고 했다.
"시러.. 우리 정구기 힘드러.."
본인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인 여주가 자신을 걱정하며 업히지 않자, 정국은 피식 웃으며 꿀이 떨어질듯한 눈으로 여주를 바라봤다.
"ㅎ..알겠어, 같이 가 누ㄴ..!"
여주가 정국을 뒤로하고 앞으로 달려나가자
뒤를 쫓아가려 했던 정국은 호석과 눈이 마주쳤다.
정국은 자신만 호석을 알고있는 이 상황에서
아는 체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이는 듯 했다.
그런 그를 눈치챈 호석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정국과 여주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또 보네, 여주? 여주 남자친구 분이세요?"
"아아, 네 맞아요. 여주누나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어릴 때 친구분이시라고..?"
"아, 이야기 들으셨구나ㅎ 여주랑 정국 씨는 술 마시고 오는 길이신가 봐요. 여주 텐션이 장난 아니네요ㅋㅋ"
정국은 인사만 하려던 자신과 달리 자꾸만 대화를
이어가려는 호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주의 친구였기에 그냥 넘어갔다.
"네, 제가 그만 마시라고 했는데 계속 마시더니.. 저렇게 됐네요ㅎ 호석씨.. 라고 했죠? 다음에 또 보게되면 밥 한끼 해요."
정국이 대화를 마치려고 하자, 호석은 이를 눈치채고 눈치껏 마무리를 지었다.
"그래요, 여주 도망가려 한다ㅎ 조심히 들어가요.
여주도 잘 들어가고~"
"어어, 호석이 안녀엉~! 만나면 맛있는거 사줄꺼지?"
"누나.. 내가 사줄 테니까 그만하고 빨리 가자.."
"이히히, 조아!"
여주와 정국은 어느새 저 멀리에 있었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호석은 여주의 뒷모습만을 뚫어질 듯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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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님, 누가 찾아왔는데.. 들여보낼까요?"
이른 아침부터 회사에 나와 일을 하고있었던 지민은 누군가 왔다는 비서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일에서 눈을 뗐다.
"들여보내."
철컥-
"박지민-"
문이 열리고 등장한 남성은 반지에 V라는 글자가
적혀있던, 여주에게 말을 걸었던 그 사람이었다.
"왔네, 김태형."
지민은 씨익 웃으며 그 남자를 김태형이라고 불렀고, 그게 그의 이름인 듯 했다.
"그래, 나 왔다 임마. 왜 불렀어."
태형이라는 남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지민에게도
익숙하다는 듯이 친근하게 대했다.
"내가 맡긴 일은 잘 하고있나- 해서."
"야, 내가 누군데- 나 김태형이야.
마음만 먹으면 내가 너도 꼬실 수 있다."
"..미친놈. 지랄하지 말고 뭐 어떻게 됐는지 말이나 해."
"아, 이여주 그 여자 좀 이쁘더라. 좀 튕기긴 했는데.. 얼마 안돼서 넘어올 거 같아."
"만약 넘어오면 함부로 건들지 말고
곧장 나한테 데려와, 알겠지?"
"예예, 우리 잘나신 박 회장님 말을 들어야죠-"
"하여튼 저 또라이.. 이제 그만 가봐, 일은 최대한
빨리 진행해. 난 계약하러 갈테니까."
태형이 지민의 인성에 대해 중얼거리며
나간 뒤, 지민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전 회장한테 내가 잠깐 만나자 한다고 전해.
계약 건과 관련있다고 말하면 올거야."
✦✦✦
"아이고, 박 회장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지민이 일방적인 통보로 약속을 잡은지 1시간이
지나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 전 회장이 도착했다.
"와서 앉으세요,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아유 그렇지요~ 그 계약 건이라 하면은.."
"네, 전 회장이 생각하는 거 맞습니다.
아드님과 이야기는 해보셨나요?"
"그건 우리 박 회장님이 걱정하지 마시고, 여기..
계약서만 작성해주시면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전 회장이 검은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지민의 앞으로 가져다두며 웃었다.
"허.. 뭐 한 번만 믿어보죠. 제가 할 건 없는 건가요?"
지민이 계약서에 싸인을 하며 묻자, 전 회장은
걸리는 게 있었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게.. 제 아들 놈이 여자친구가 있는데..
그 상태로 선을 내보내도 괜찮을지.."
그러자 지민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아흐ㅎ, 진짜 재밌는 분이시네ㅎ
그건 걱정 말아요.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아드님께 직접 연락이 올 거에요."
지민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에 어떤 생각을
하는 듯 했고, 또다시 미친듯이 웃었다.
"...ㅋㅋㅋ아하핳ㅋㅋ 아흐ㅎ..ㅋㅋㅋㅋ
아아- 너무 즐거웠네요. 오늘은 제가 좀 바빠서..
나중에 또 보죠, 전 회장."
지민은 바쁘다며 먼저 자리를 떴고, 전 회장은
소름이 돋아있는 팔을 쓸어내리며 지민의 적은
되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