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용 빙의글] 상남자

1화. 상남자

정하은이 처음 이태용을 만난 건, 브랜드 협업 촬영을 하루 앞둔 사전 미팅 자리였다. 하은은 입사한 지 6개월 된 홍보팀 막내였고, 이번 프로젝트에서 처음으로 현장 진행 보조가 아닌 메인 담당에 가까운 일을 맡게 됐다.

 

 

물론 말이 메인 담당이지, 실제로는 선배들이 정리해둔 자료를 들고 뛰어다니고, 촬영장 동선을 체크하고, 아티스트 측 요청사항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그래도 하은에게는 충분히 큰 일이었다. 특히 이번 촬영의 메인 모델이 NCT 태용이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괜히 노트북을 열 때마다 손끝이 굳었다.

 

 

“하은 씨, 자료 다 뽑았죠?” 선배의 말에 하은은 품에 안고 있던 파일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네. 콘셉트 보드, 의상 리스트, 촬영 순서표까지 다 준비했습니다.” 대답은 또렷하게 했지만, 속은 전혀 또렷하지 않았다. 미팅룸 문 앞에 서자마자 심장이 이상하게 빨라졌다. 하은은 괜히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연예인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태용은 조금 달랐다. 화면 속에서도 늘 눈빛이 강했고, 무대 위에서는 한순간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미팅룸 문이 열렸을 때, 하은은 가장 먼저 조용한 공기를 느꼈다. 안쪽에는 이미 몇몇 스태프들이 앉아 있었고, 그중 가장 끝자리에서 검은 재킷을 입은 태용이 자료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묘하게 존재감이 컸다. 하은은 순간 발을 멈출 뻔했다. 사진이나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말랐고, 훨씬 조용했고, 훨씬 차가워 보였다. 선배가 먼저 인사를 하자 태용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낮고 담백한 목소리였다. 하은도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진행 맡은 정하은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터졌다. 하은은 준비해온 파일을 나눠주다가 태용 앞에 잘못된 버전의 촬영 순서표를 올려두고 말았다. 어제 밤늦게 수정되기 전 자료였다. 몇 분 뒤, 태용이 조용히 종이를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이거, 최종본 맞나요?” 하은의 등줄기가 순식간에 굳었다. “네?” “아까 공유받은 순서랑 다른 것 같아서요.” 태용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차분한 말투가 더 무서웠다. 하은은 허둥지둥 파일을 확인하다가 얼굴이 새빨개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드렸습니다. 바로 다시 드리겠습니다.”

 

 

 

 

태용은 잠깐 하은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은은 괜히 혼난 기분이 들었다. 태용은 다시 자료 쪽으로 눈을 내리며 말했다. “다시 확인해 주세요.” 딱 그 한마디였다. 하은은 고개를 숙인 채 미팅룸을 빠져나왔다. 복도에 나오자마자 작게 숨을 뱉었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첫 담당 프로젝트에서, 그것도 태용 앞에서, 기본 중의 기본인 자료를 잘못 전달했다. 하은은 새 파일을 출력하면서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진짜 상남자네. 말도 짧고, 표정도 없고, 사람을 아주 칼로 자르는 것 같아.

 

 

다음 날 촬영장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스태프들은 조명을 옮기고, 의상팀은 옷을 정리하고, 헤어 메이크업 팀은 분주하게 대기실과 촬영 세트를 오갔다. 하은은 손에 무전기를 든 채 계속 뛰어다녔다. “태용 씨 10분 뒤에 A세트 들어가십니다.” “의상 두 번째 착장 먼저 준비해주세요.” “클라이언트 분들 모니터룸으로 안내 부탁드립니다.” 입으로는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자꾸 미팅룸에서 태용이 했던 말로 돌아갔다. 다시 확인해 주세요. 분명 맞는 말인데, 괜히 가슴 한쪽이 따끔거렸다.

 

 

태용은 현장에서 더 말이 없었다. 불필요한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촬영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됐다.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하은은 모니터 뒤쪽에 서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선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하은 씨, B세트 소품 위치 한 번만 확인해줘요.” “네.” 하은은 급하게 몸을 돌렸다. 머릿속으로는 체크해야 할 것들이 줄줄이 지나갔다. 의자 위치, 배경 천, 바닥 표시, 조명 케이블.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생각하다 보니 발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때였다. 하은이 바닥에 늘어진 케이블에 발이 걸려 앞으로 휘청였다. 동시에 옆에서 조명 스탠드 하나가 살짝 흔들렸다. 누군가 급하게 “조심!” 하고 외쳤지만, 하은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순간 팔목이 세게 잡혔다. 누군가 하은을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고, 하은은 그대로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눈앞이 잠깐 하얘졌다. 몇 초 뒤, 하은이 고개를 들었을 때 바로 앞에 태용이 있었다. 가까이서 본 태용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무표정했다. 그런데 손은 아직 하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괜찮아요?” 태용이 물었다. 하은은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급히 몸을 떼었다. “네, 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아닌데.” 태용은 하은의 팔목을 한 번 내려다봤다. “다친 데 없어요?”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없습니다.” “발목은요.” “괜찮아요.”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놀란 것도 있었고, 가까이서 마주한 태용 때문에 더 그랬다. 태용은 잠깐 하은을 보다가 바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케이블 정리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스태프들이 급히 움직였다.

 

 

 

 

하은은 그 자리에 서서 어색하게 손만 만지작거렸다. 고맙다고 해야 했다. 분명 그렇게 해야 하는데,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태용은 이미 촬영 위치로 돌아가려던 중이었다. 하은은 급히 그의 뒤를 불렀다. “저기, 태용 씨.” 태용이 돌아봤다. “감사합니다. 방금.” 말하고 나니 더 민망했다. 태용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앞 좀 보고 다녀요.” 순간 하은은 할 말을 잃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저 말투는 대체 뭐지 싶었다. 걱정해주는 건지, 혼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촬영은 다시 이어졌다. 하은은 일부러 태용 쪽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자꾸만 갔다. 태용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여전히 말이 없었고, 여전히 촬영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아까 자신을 잡아당기던 손의 힘이 자꾸 생각났다. 놀라지 않게 붙잡으려 했던 건지, 다칠까 봐 급했던 건지. 하은은 제 팔목을 살짝 만져봤다.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하은은 대기실 앞 테이블에 앉아 수정된 콘셉트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닌 탓에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선배들이 챙겨준 샌드위치는 포장도 뜯지 못한 채 옆에 놓여 있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태용이 나왔다. 하은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태용은 하은을 내려다보더니 테이블 위 샌드위치를 봤다. “밥 안 먹었어요?” “아, 먹으려고 했는데 일이 좀 있어서요.” “일은 계속 있을 텐데.” 하은은 대답을 못 했다.

 

 

 

 

태용은 잠깐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옆에 있던 생수병 하나를 하은 쪽으로 밀었다. “먹고 해요.” 하은이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네?” “쓰러지면 더 바빠져요.” 말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싫게 들리지는 않았다. 태용은 더 설명하지 않고 다시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병을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는 그를 어렵고 차가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헷갈렸다. 말투는 분명 딱딱한데, 행동은 이상하게 자꾸 다정했다.

 

 

촬영이 모두 끝났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하은은 마지막 체크리스트에 표시를 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큰 사고 없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니, 사실 작은 사고는 있었다. 자료를 잘못 준 것도, 케이블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도, 태용 앞에서 몇 번이나 얼어붙은 것도. 하은은 빈 촬영장을 정리하다가 조명이 꺼진 세트 한쪽을 바라봤다. 그곳에 서 있던 태용의 모습이 떠올랐다. 카메라 앞에서는 누구보다 강한데, 카메라 밖에서는 이상하게 조용한 사람. 무심한 척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가장 먼저 손을 뻗는 사람.

 

 

하은이 짐을 챙겨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입구 쪽에 검은 밴이 서 있었다. 태용은 매니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하은은 괜히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숙였다. 그냥 지나가면 됐다.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도만 말하고 퇴근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태용이 먼저 하은을 불렀다. “정하은 씨.” 하은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네?” 태용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오늘 고생했어요.” 별말 아니었다. 정말 흔한 인사였다. 그런데 하은은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을 것 같았다.

 

 

 

 

“태용 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은은 겨우 대답했다. 태용은 차 문을 열기 전, 한 번 더 하은을 바라봤다. “다음 촬영 때는 자료만 다시 확인하면 될 것 같네요.” 하은은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건 진짜 죄송했습니다.” “농담인데.” 태용이 작게 말했다. 하은은 눈을 깜빡였다. 농담이라고 하기엔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런데 아주 잠깐, 태용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 것 같았다. 하은이 그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태용은 차에 올라탔다.

 

 

차가 멀어지고 나서야 하은은 천천히 숨을 뱉었다. 처음에는 그저 차갑고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수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말수 적고 무뚝뚝한 상남자. 그런데 하루를 보내고 나니 이상하게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진짜 상남자는 큰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사람을 잡아주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은은 손에 든 파일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큰일 났다. 다음 촬영이 벌써부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 계속 >>>

태용 팬이 많이 읽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