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 우정

04.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 이유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온몸의 모든 관절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수빈은 악-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다시 쓰러졌다. 수빈은 비로소 자신이 병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가 어찔해졌다. 그럼 여긴 도대체 어디지?


“깼어요?”


처음 보는 남자가 먹을 것을 들고 왔다. 밥과 김치, 김으로 이루어진 꽤나 초라한 식사였다.


“아침이요. 변변찮아서 죄송한데, 집에 이런 것 밖에 없어서.”


연준은 ‘사실은 이것도 사치에요.’라고 하려다 그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쌀과 김을 산다고 연준은 일주일치 식비를 다 썼다. 꼼짝없이 굶을 생각을 하니 솔직히 말해서, 눈물이 좀 괴이는 것 같았다.


“아……고맙습니다…”
“뭘요.”


쭈뼛쭈뼛 아침상을 받아든 수빈은 터진 입술을 살살 만져보았다. 따끔했다. 피를 흘린 곳에는 모두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 머리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연대 의예과거든요. 이런건 기본이에요.”


수빈이 상처를 치료한 방법에 대해 묻자 연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 어쩐지. 수빈이 벽에 걸린 연세대 과잠을 가리켰다. 그 과잠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트로피 같은 것인지 그것은 어두칙칙한 집 안에 억지로 끼워맞춘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깨끗했다.


“저, 근데 이렇게 집에 모르는 사람 들여와도 돼요…?”


수빈의 말에 둘은 거의 동시에 서로가 통성명도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은 머쓱하게 웃으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저부터 할게요. 최연준이고, 97학번입니다.”
“아…저는 최수빈! 올해 입학했어요.”


새내기네. 연준은 픽 웃었다. 그런 새파란 애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뭐, 사람에게는 다 사정이 있으니까.





칫솔 사놨으니까 양치도 하라는 연준의 말에 수빈은 느릿느릿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은 성인 남성 한명이 간신히 서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케케묵은 세월을 증명하는 듯 누르스름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본 수빈은 까무러칠 뻔 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맞았지만 그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시에 이런 몰골의 사람을 데리고 집으로 와 간호할 생각을 한 저 연세대 의예과 형님에게 경외심이 들었다.


“양치 다 하셨어요?”
“네…!”
“잘됐다, 그럼 좀 쉬세요.”


수빈은 방에 쪼그려 앉았다. 딱 봐도 낡아보이는 텔레비전이 눈 앞에 들어왔다. 방 밖에서는 연준이 늘어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을 보니 청소 중인것 같았다. 편한 복장에 편한 모습의 연준이라니. 저게 바로 시혜주의 여유인듯 싶었다. 수혜자인 수빈은 그저 눈치를 보며 가만히 구경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노래 좋아하세요?”


둘 사이 이어진 미묘한 침묵을 깨려 수빈이 말을 걸었다. 연준이 카세트테이프 노래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좋아하죠, 이문세 노래인데. 그쪽도 이문세 좋아하세요?”
“아뇨, 공부만 한다고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 그러셨구나.”


그리고 대화가 어색하게 끊겼다.


“그 노래 제목이 뭐에요?”
“이거요?”


수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요.”
“아.”


또 다시 대화가 끊겼다. 둘 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래가지고 청소할 맛이 나겠나. 연준은 수빈 옆에 기어이 비집고 앉았다. 수빈이 꾸물꾸물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저…이 신세 진건 제가 꼭 갚을게요.”
“됐어요, 누가 보답 바라고 남 도와줍니까.”
“그래도……”
“정 그러시면 나중에 라면 한번 쏘세요.”


연준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아, 하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저 궁금했던거 있는데, 좀 답해주시면 안돼요? 그거하고 라면이면 꽤 괜찮은 딜 아닌가. 연세대학생이 궁금해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수빈은 부러 허리를 쫙 펴고 정신을 머리에 집중시켰다.


“시위 왜 하는거에요?”
“네……?”
“그쪽도 맞아 죽을 뻔 했잖아요. 위험하고 이득 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왜 다들 열심인가 싶어서요.”


수빈은 주먹을 꼭 쥐어보았다. 왜 열심일까? 솔직히 말해서 몸을 회복하고 나면 수빈은 다시 시위에 참여할 것이다. 연준의 말대로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거리로 나서는걸까? 수빈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연준이 ‘그것 봐요’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까짓 민주주의가 뭐라고.”
“…그러게요.”
“아니 그럼 왜 참여하는줄도 모르고 그냥 하는거에요? 아닐텐데.”
“……”


수빈은 연준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수빈은 애꿎은 손톱을 뜯었다.


“그냥 저처럼 민주주의가 오길 기다리면 안돼요? 남들이 그러던데, 그런 죽일놈들은 언젠가 흔들리기 마련이라고.”


연준은 부러 여유롭게 말했다. 수빈이 본 것은 반만 정확했다. 연준은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저 사람도 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편해지고 싶었다. 죄책감을 덜고, 그렇게 외면하고 살아가고 싶었다. 그게 편할테니까. 그러나 연준은 자신의 생각이 범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이미 알고 있었다.

편해진다. 저 사람으로 편해질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광주의 모든 정의로운 사람들의 실체가 저와 같다는걸 확인하게 되면, 그땐 편해질까? 연준은 양날의 검이라도 된 양 저를 사정없이 찔러오는 양심에 속수무책으로 피를 흘렸다. 입안이 헛헛해졌다.


‘그건 그거대로……’


연준은 수빈이 대답을 하지 않을까봐 내심 마음을 졸였다. 몇초간의 침묵 끝에 수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쪽이 말씀하신대로 저 사람들은 언젠가 흔들리겠죠. 근데 전 누가 흔들 것인가, 언제 흔들 것인가, 어떻게 흔들 것인가…그런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치기일 수도 있고 위선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방관보다는 후회가 없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