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티 나는 그 남자

19. 천천히 속도 맞춰, 민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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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나 피해요?
- …! 아, 아니.. 그게….
- 추궁하려는 게 아니예요. 승아 씨랑 멀어지기 싫어서 이래.



 승아는 더이상 자신의 낮부끄러운 생각을 감출 수 없어졌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친구를 상대로 오해라도 쌓아둔다면 둔한 승아는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우왕좌왕하다 이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승아는 자아성찰이 잘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답답하게 굴 경우 생길 오해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윤기와 불화가 생기는 건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했다. 승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무겁기만 한 입을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 맞아요, 나 윤기 씨 피했어요.. 왜냐면… …거든요..
- 마지막이 잘 안 들렸어요, 승아 씨. 다시 말해줄래요?
- 하… 그러니까…! 자꾸 윤기 씨 이, 입술 밖에 안 보인다구요…!!



 승아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러다 얼굴이 터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또 윤기가 귀엽게 웃으며 능글맞게 자신을 놀릴 게 뻔했다. 승아는 고개를 들고 울상이 된 얼굴로 윤기를 보았다. 어? 어…?? 승아는 놀랐다. 윤기가 웃음을 참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반응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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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그래서 피한 거였구나….



 윤기는 어딘가 좀 멍해보였다. 유독 하얀 피부의 소유자라 금새 달아올라 둔한 승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윤기는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제 입술을 만지작 거리다 승아와 시선이 닿자 놀란 눈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능글맞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 윤기 씨…?
- …! 아, 네..
- 실망했어요…?
- 그럴 리가요. 나야말로 숨기는 거 없이 전부 말하면 승아 씨가 실망할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실망을 해요.
- 아.. 다행이다….



 윤기는 헛웃음이 나왔다. 어떤 의미로 뱉은 말인지도 모르고 안심하는 상대의 반응 때문에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다행. 다행이라… 과연 다행일까. 겨우 입맞춤만으로도 안절부절하면서 더이상 내가 흑심 같은 걸 숨기고 싶지 않아지면 그땐 어쩌려고. 지금도 열심히 참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당신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윤기는 주먹을 살짝 말아쥐며 정신을 차렸다. 승아는 윤기가 만나봤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바로 이전 연애에서 전 여자친구가 그랬듯 과한 집착과 소유욕 등의 비틀린 애정으로 윤기를 옥죄지도 않았고, 연인이라는 명목 하에 끊임없이 무언갈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윤기는 그녀를 더욱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이토록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윤기는 승아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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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그만 들어가요, 우리. 옥상이라 바람이 많이 불어요. 먼저 들어가면 5분 뒤에 들어갈게요.
- 아.. 네…!



 승아는 몇 번 뒤를 힐끔거리며 먼저 옥상을 벗어났다. 윤기는 왼손으로 뒷목을 쓸며 바닥을 보고 중얼거렸다.



- 제발 앞서나가지 말라고, 새끼야… 천천히 속도 맞춰, 민윤기.



-



 승아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시계만 바라보았다. 언제쯤 6시 정각이 되려는지 시계 바늘이 오늘따라 유독 느리게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모든 직장인들이 평일 하루 중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퇴근이겠지만, 오늘 승아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 소심한 성격에 칼퇴근을 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퇴근을 해야 윤기와 승아가 데이트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그냥 데이트도 아니고 첫 데이트를 말이다. 주말에 날 잡고 하는 데이트가 아니라 아쉽기도 했으나 아쉬움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을 정도로 둘다 기뻤다. 승아는 업무적인 대화만 몇 마디 나누고 아무런 소통도 할 수 없었던 윤기에게 문자를 보냈다.



💬 얼른 손 잡고 싶어요..🥺



 윤기는 표정관리를 위해 이를 꽉 물어야만 했다. 너무 귀여워 당장이라도 다가가 끌어안고 싶을 지경이었다. 



💬 나도 그래요. 퇴근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우리. 승아 씨 치킨 좋아하면 맛집 아니까 거기로 갈까요?
💬 앗 좋아요!!😆



 둘의 시선을 목격한 김대리는 말없이 혼자 씩 웃다 능청스럽게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봬요~
- 어? 아직 시간이…
- 6시 정각이더라구요!  오늘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부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 어..? 어어, 그래.. 다들 들어가~
- …! 수고하셨습니다!
- 내일 뵙겠습니다.



 적당히 인사치레가 끝나자 둘은 눈빛을 주고 받다 각자 다른 길로 가는 것처럼 갈라지곤 인적이 드문 근처에서 다시 만나 맛집으로 향했다. 손을 잡은 채 거리를 거닐고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 아쉬워 영화를 보며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11시가 다 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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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른 들어가요, 승아 씨.
- 아… 벌써 다 왔네요..



 승아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윤기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고양이 발바닥이라도 만지듯 손바닥을 이리저리 주무르고 조물딱거리는 게 누가봐도 헤어지기 아쉬운 모양새였다. 사실 승아는 자신이 하던 낮부끄러운 생각을 제 입으로 뱉은 후로 일종의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키스를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꿈처럼 달콤한 데이트를 끝내고 집 앞까지 다다랐는데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윤기는 데이트 내내 승아의 손만 잡고 다른 어떤 스킨십도 하지 않았다. 승아가 용기내어 윤기를 안았을 때도 흠칫 놀라다 느릿하게 꽉 안은 것 말고는 먼저 나서서 스킨십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승아는 윤기의 손바닥에 시선을 고정해둔 채 툭 던지듯 작게 말했다.



-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요.. 난.. 입 맞추는 거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