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월양 씀.
어느 날 눈을 떴는데, 내가 좋아하던 소설 속의 한 장면이였다 진술하면 과연 누가 믿어줄 수 있을까? 참 뭣같게도, 내가 지금 그 상황이다. 분명 전날 밤, 할 일을 다 해치우고 지푸라기 더미에 누워 한숨만 푹푹 쉬다 책을 꺼내들어 읽었는데, 잠들고 다시 일어나보니 잠들기 전 읽던 그 소설의 악역으로 빙의 해 있었다더라. 현실의 나와는 달리 얼굴과 몸에 흠집 하나 없이 말끔하며, 넘쳐나는 돈 하니 아주 팔자 폈겠다 생각했겠지만 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 하자마자부터 나의 걱정거리이자 골칫거리는 현실의 난 어떻게 되었는가였다.
태어나서부터 16살까지 고아원에서 살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난 그동안 틈틈이 모아 둔 돈과, 비상한 두뇌로 빠르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 고아원을 나왔고, 그 뒤로는 행복할 줄 알았으나 금세 거덜 난 돈은 날 다시 고아원으로 들어가게 만들더라. 고아원의 시녀가 나가더니 제 발로 들어왔는데 원장이 싫어할 리가. 그 다음 날부터 내가 가출을 했다는 명목으로 아주 신명나게 괴롭히더니 학교에서는 부모 없는 고아 새끼라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역시, 잘 살 사람 잘 살고 못 살 사람은 못 산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었다는 듯 내 인생은 불행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개만도 못한 인생을 산지 1년이 더 넘어가는 19살, 크리스마스 이브.
난 이 소설 속으로 빙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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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책을 또 살 형편이 안 되어 이 책만 주구장창 본 탓인지 인물이 누구고, 어떤 전개들이 나타나는지 달달 외울 정도로 이미 마스터했다. 아마 내가 깨어난 이 시점은 악녀가 여주를 괴롭히다 도를 넘자 남주들이 악녀를 때려 전치 5주가 나왔었고, 내가 이때 깬 듯 하니, 난 얌전히 병원에서 묵다가 악녀의 뒷배경인 돈을 이용해 부귀영화 한 편 누려보는 거지. 물론 현실의 나야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죽거나 쓰러지거나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살아가던가. 이 셋 중 하나일 테고, 그렇다면 이 세 선택지 모두 똑같이 개 같으니 그냥 여기서 잘 살다 적당한 시기에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 드르륵.
내가 다시 눈을 감으려 몸을 침대에 기대려 했을 참이었다. 그닥 요란스럽지 않은 병실 문이 열리며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 우주 일어났나? "
내가 빙의한 소설의 여주이자, 그 여주를 지키는 7명의 재벌들. 사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도 표지에 그려진 남주들이 존나게 잘생겨서 그랬던 건데,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다니. 이건 계탔다 해야 하는 건지, 개 같다 해야 하는 건지. 어이 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나왔다. 내가 미동도 없이 바라만 보자 먼저 입을 여는 강아지 닮은 여자애.
" 우주야, 괜찮아? 다친 데는? "
올망졸망한 눈망울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울먹거리자 나는 괜한 이질감을 느꼈다.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날 이렇게 바라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얘도 이게 가식 같아 보이는 더러운 연기 때문일까. 아무렴 어때. 난 그냥 얘들을 쳐내고 혼자 잘 지내는 게 목표인데. 난 내 목표를 위해 그 무엇도 없앨 수 있고, 또 만들 수 있다. 그게 여지껏 사회에서 살아온 내 신념인데, 나보다 더 고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내가 살아가는 나만의 생존방식이 잘못됐다는 걸 인증하긴 힘들거다.
" 어쩐 일인데? "
내가 첫마디를 날카롭게 나가자 희미하게 웃어보이고 바로 페이스를 다듬는 여주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7명. 아, 재밌네. 내 한 마디에 이렇게씩이나 반응을 해 주다니. 아마 여기서 사는 삶, 참 흥미로워질 것 같단 말이지?
" 그, 그야! 네가 걱정 되니까... "
걱정? 풋, 개소리 하고 있네. 날 위한 말을 해주는 여주의 눈은 미세하게 떨려왔고 점점 갈 수록 기가 죽는게 마치 거짓말을 들킬까봐 조바심 내는 강아지 꼴이였다. 소설의 여주라는 배역을 맡으신 분께서, 이런 초보의 실수를 하시면 안되지. 여주가 하찮다는 생각을 하고있을 쯤, 사납게 가시돋친 말이 들려왔다.

" 여주야, 가자. 쟤 보는 시간도 아까워. "
전정국이 꽤나 차가운 눈을 하고서 날 째려보며 여주를 이끌었다. 나 참, 그러면 내가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이라도 흘리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자신에게 보호받는 하여주를 그만 괴롭히라는 걸까. 어찌됐든 둘 다겠지만 지금 내 눈엔 모두가 웃프기만 했다. 인생 산 경력은 19년이지만 19년동안 해 본 일은 30살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고달픈 삶을 살아온 나로서, 그들의 치정극은 매우 가당찮았다. 그딴 일들에 시간 허비하며 살 여유를 배운 적도 없고.
" 걱정 마, 이제 나한테 시간 쓸 일 없을거야. "
그 말을 끝으로 난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고 7명은 웬 일인지 순순히 내 병실을 나가주었다. 물론 ···
- 콰아앙!
하는 전정국의 마음을 대변한 문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걸까, 다행 중 불행인 걸까. 어느새 지나버린 시간 속의 난 일주일째 꾸준히 빙의글 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었다. 틈틈이 얼굴을 비추는 나의 부모님은 회사일로 정말 바쁜 듯 보였고, 그런 와중에도 딸 사랑은 지독한 건지 올 때마다 비싼 명품들을 들고 와주더라. 심지어 한 번 올 때마다 두세시간은 꼭 내게 수다를 떨어 주었으며 그러면서 얻은 나의 대한 힌트. 소설에도 안 나와 있던 소우주의 차사고 트라우마와 레몬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난 집에서 쌀쌀맞은 딸이었다는 사실. 이것들을 알아냈다. 뭐, 그리고 알아내지 않으려 해도 알 수 있는 점은 소우주는 M.K 그룹의 외동딸이다. MK 그룹이라 하면 화장품과 패션업으로 시작해 대박을 쳤고 그 뒤로 한 번 말 하면 아~ 거기? 그 유명한 데? 한다는 기업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소우주가 가끔 소설에서 수를 쓰는 걸 보면 돈이 많다는 생각은 일절 안 들었었는데. 소우주는 사치와 부를 내세우는 스타일이 아니었나 보지. 물론 난 그딴거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내 부를 드세워야 할 땐 드세워야지. 그렇게 난 복수만을 다짐하며 학교로 발걸음을 향했다.

내가 학교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아무 자리에나 털썩 앉자 시끌시끌하던 교실의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고, 아이들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지. 나 얼굴에 뭐 묻었나? 주머니에 있는 작은 손거울을 보니 얼굴엔 아무것도 묻은 게 없었다. 그럼 왜 쳐다봐? 난 살짝 미간을 좁히고는 그대로 팔을 베개 삼아 누워버렸다. 근데, 내가 자는 걸 모두가 원치 않았는지 그새 반으로 들어온 7명과 하여주가 나를 보고는 놀랐다. 여기 있을 줄 몰랐으니까 놀랐겠지. 나는 애써 웃으려는 입꼬리를 내린 채 꿈나라로 빠져드려 하자.
_ 쿠당타앙!
아, 시발. 어떤 새끼야 . 나는 욕을 입에 머금으며 내 의자와 책상을 발로 친 장본인을 찾았다. 아, 너구나. 다른 7명들보다 두세발짝 더 앞으로 나와있는 김태형.

" 그냥 뒤지지 그랬냐. "
이 학교는 막 퇴원한 환자한테 발길질을 선물해 주는게 룰인가봐? 그렇다면, 나도 그 룰을 따라줘야겠네.
_ 퍼억, 쿵 -
" 로마에 오면 로마 법을 따르란 말도 있잖아, 그치? "
난 싱긋 웃어보이며 김태형의 복부를 발로 아주 세게 짓눌러 차버렸다. 그러자 김태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내가 이럴 줄은 몰랐는지 어벙한 상태로 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아무리 예뻐도,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 ···
" 닳거든요, 개새야. "
내 딴에서는 이어 말한 것이겠지만 김태형이 듣기엔 자기가 개새끼가 아니라 내가 미친놈처럼 보일 것이다. 아무렴 어때. 내가 통쾌하다는데. 난 남의 행운과 행복보다 나의 행운과 행복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그게 삶을 사는데 가장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 몫 했었고. 그러니 내 가치관은 이 그지같은 상황 속에서도 절대 바뀌지 않을 거다. 이 말이었다.
✐✎✐✎
그렇게 교실을 유유히 걸어나와 복도를 거닐고 있었을까, 내 앞에 교사처럼 보이는 착장을 한 여자가 날 발견하곤 내게 황급히 걸어왔다.
" 여주야, 너 머리에서···! "
" ? 아, 피. "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김태형이 내친 책상 모서리에 내 이마가 찢긴 모양이었다. 이마를 슬쩍 만져보니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고, 난 이를 보며 무척이나 담담했다. 나처럼 몇 년만 개처럼 살다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내 몸에서 보이는 게 피인데. 익숙해지지 않고선 못 베기는 거다.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께 조퇴증을 끊고는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원래라면 전용 기사가 데리러 왔겠지만, 시간이 시간인 만큼 지금은 등교를 하자마자 하교를 한 상황이었기에, 기사가 있는 게 더 이상할 터였다. 그리하여 도착한 집. 부모님은 회사에 가신 건지 무척이나 고요했고, 부엌에선 아주머니가 요리를 하시는 건지 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한평생을 좁디 좁은 땅바닥에서 식어가며 지냈던 나와는 정말 상반되는 분위기. 나는 이 불편한 곳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 내게 알맞는 곳에서 지내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궁리해 생각해 보니 결국 나온 답은 자취 뿐. 저번부터 쭉 보니 내 부모님들이 소우주를 정말 아끼시는 것 같았으니, 다소 쉽게 자취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자취를 떠올릴 때부터 고쳐먹었다. 한 번도 공부 안 해본 내 머리로 전교 일등을 해 와서 인증하자니, 어차피 소우주는 유전적으로 머리가 매우 비상해 전교권에서 놀아나던 아이였다. 더군다나 며칠 전까지 병원에서 갇혀있던 나였으니, 정말 진짜로 자취 하기는 어려우면 어려웠지 절대 쉽진 않을 거라 마음 단단히 먹고 각오했으나 ···
" 그래, 여주 네가 원하면 하렴. "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아무런 조건 없이 허락을 하는 소우주 엄마의 모습은 생경했다. 아니, 이렇게 쿨하실 거였으면 아까 말할 때 망설이지 말 걸. 괜히 그랬어.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느낌에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재차 확인을 시도했다.
" 정말 자취 해도 돼요? "
몇 번을 물어봐도 그녀의 답은 예스였으며, 자취 할 집을 알아봐주겠다 했다. 그리고 살짝 들 뜬 상태로 내 방에 올라왔을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헛구역질과 어지럼증에 정신을 못차리고 잠시 비틀거리다 난 침대로 픽 쓰러져버렸다. 눈꺼풀이 감길락 말락, 온 신경이 불을 꺼버린 듯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내 귀에선 무언가 크게 고장난 듯 듣기 싫은 이명 소리만 연이어 들렸으며 눈 앞의 초점은 하나 둘씩 흐려졌다. 얼마나 식은땀이 많이 나면 입고 있던 흰 티가 땀으로 인해 젖어나가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푹신한 침대의 감각과는 달리 땀에 절어 끙끙대는 나. 그러다 한 순간에 꺼져버린 전원은, 내 모든 세포들과 눈까지 전부 꺼버리게 만들었다. 아, 안되는데...
내가 도착한 곳은 불쾌하기 그지 없었다. 퀴퀴한 냄새하니, 온통 검은 점액으로 둘러쌓인 장소니,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며 들리는 웃음소리들하니. 당장이라도 이 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갖고 걸을 수록 통로만 더 멀어지게 보이는 것이, 이건 꿈이구나 싶었다. 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내가 깨길 기다렸다. 허튼 짓인 걸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꿈인 걸 깨달은 꿈 속에서 감히 무얼 하겠나. 그리고 여차하면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죽어버릴 수도 있다. 내 몸은 내가 사려야 하는데 약점을 만들어 괜히 사서 고생하기 싫은 마음에 난 최대한 얌전히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우선 공부를 해야했고 내가 원하는 걸 다 할만한 재력은 차고 넘쳤다. 이제 서서히 소설의 목줄을 잡아 채 숨통을 조여야겠지. 완벽히 내가 날아다닐 수 있는 판으로. 내가 퀸의 자리에 오르려면 우선 아군이 필요했다. 나는 확실히 그를 믿지 않아도 그는 날 확실히 믿어 마땅치 않아 날 위해 기꺼이 목숨조차 내줄 수 있는 그런 충실한 개. 난 지금 그것만이 필요했다. 돈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언제든 배신 할 수 있으니 다소 계획적이게 다가가야 했다. 우선 그럼 박지민부터 공략 해 볼까. 박지민은 소설 속에서 하여주에게 정말 충실한 기사였다. 그렇게 하여주를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록 더 흔들리기 쉽상이지. 박지민의 약점은 여주. 그리고 ··· ···
나였지, 아마?
난 박지민의 첫사랑이자 첫번째 약점이었다. 나와 박지민, 김태형, 전정국은 유년기 시절 나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홍일점이었던 난 그들의 첫사랑이었다. 하긴, 10살부터 17살까지 붙어 다녔으니, 7년간 날 한 번도 여자로 못 느낀게 더 이상하지. 그렇다고 나도 그들을 좋아했냐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치만 그건 본래의 소우주 감정이고, 나에겐 내가 여왕이 되도록 도와줄 뒷받침일 뿐이었다. 그리고 난 아직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피해 준 건 옛날의 소우주지, 내가 빙의한 내가 아니잖아? 아직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적은 없으니 그들에겐 기회가 생긴 셈이였다. 여왕의 기사가 될 수 있는 기회. 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다음으로 김석진과 민윤기, 정호석과 김남준은 딱히 걱정할 거랄 게 없다. 어차피 김석진과 민윤기는 내가 심어둔 스파이나 다름 없고 정호석과 김남준은 요즘 기세만 하여주에게로 기운 것이니 충분히 내가 눈 한 번 깜박하면 그들을 유인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