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2월 17일
겨울방학의 시즌, 학생들에겐 한창 놀러 다니거나 집에 있는 것이 전부인 그런 겨울.
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고아였던 나에게는 집도, 놀러 갈 곳도 아닌 보육원에 있었다.
그랬어야만 했었다.
“우리가 노래방에 좀 가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서 말이야”
나는 크리스마스 시즌 때 알아차렸다. 다른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날, 혼자 있는 것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보낸다는 것을.
그걸 알아챈 후 큰 상실감에 빠져버렸다. 밤인데도 환하게 빛나고 있는 거리를 걸으며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혼자 있는 나 하나뿐이었다는 것이 절망적이었다.
그러곤 결심했다. 지금은 비록 혼자라도 미래에는 함께 고난과 행복을 겪을 사람을 찾는 것을.
“그러니까 돈 좀 있냐고 말하잖아”
그래서 아무런 계획 없이 방학에 보육원을 탈출한 나의 모습은 이러했다. 이런 양아치들에게 붙잡힌 것이 2월 17일 현재 나의 모습이다.
“돈 없어요”
양아치들은 돈 없다는 나의 말에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양아치들의 클리셰, ‘1000원이라도 나오면 한 대씩 맞는 거다’ 살아가면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보육원을 빠져나온 고아에겐 돈이 있을 리가
“야 이 새끼 부자인데?”
있다.
“10, 20, 30만원이야”
장난치나 이것들이. 내가 18년 동안 열심히 꾸준히 일하고 노력해서 장학금으로 받은 돈이라고. 놀고 먹고 싸기만 한 이 녀석들이 이렇게 쉽게 받아 간다고?
정말 신은 없는 거냐.
“1000원에 한 대였는데 30만원이니 특별히 봐준다”
순정만화 같은 것을 보면 이때쯤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던데 역시 나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한 대 때리기는 커녕 한소리 내뱉지도 못하는 것일까.
“은혜는 안 갚을 테니 걱정 마셔~”
양아치들은 나의 돈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다들 못 본 척 지나가기 바빴다. 그런 사람들과 양아치들 덕분일까. 나는 정말 아무런 계획도 없이 보육원을 나온 고아가 되었다.
내 최대한의 계획은 돈이었는데.
실수했다. 오늘 보육원을 나오면 안되는 거였다. 마음 가는 대로 온지라 지하철도 아무거나 막 탔었고, 당연히 버스도 아무거나 막 탔었다. 이 공원도 마음 가는 대로 걸어서 온 결과이다.
“조졌네...”
‘X됐다’의 적절한 예시는 혹시 지금 이 상황이지 않을까? 돈도 없고,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한순간에 노숙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배고파......”
배고프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지갑에 있는 30만원은 털리고 보육원을 나올 때 혹시 몰라 주머니에 5만원 두 장을 넣어둔 것 빼고는 돈이 없다.
...?
잠시만 난 입 밖으로 배고프단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우당탕 하숙생들—김태형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고개를 돌려보니 나와 같은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키는 나보다 10cm가 훌쩍 넘어 보였으며 얼굴은 어려 보였다. 많다고 해도 고등학생 3학년이려나.

“누가 밥이라도 사줬으면 하는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밥 사달라는 건 도대체 누굴 따라하는 것일까. 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배 고 프 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절대 모르는 척 할 것이다. 없는 이어폰이라도 낀 듯이 태연하게 노래를 듣는 척 한다면 이대로 무시하고 갈 것이다. 얼굴이 잘생겼을지라도 절.대 주머니에 있는 10만원으로 밥을 사주지 않을 것이다.
“캬~살았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분명 안 사주겠다고 다짐했더니만...말도 안 될 정도의 미인계를 쓰다니. 이 사람 숨은 고인물이었다.
“밥도 먹었고, 돈도 제가 냈으니 바라는 거 더 없죠?”
배 터지게 밥을 먹고 가게 밖을 나왔다. 물론 배 터지게 먹은 건 내가 아닌 저 사람이지만 말이다. 3인분을 시켰지만 정작 내가 먹은 건 1인분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걸 모르고 야무지게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다.
“움,,내가 후식은 꼭 먹어야 해서......”
진짜로 한 대 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말 고마워!”
“너 덕분에 살 것 같다~”
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간 1위로 등극하게 되고 마셨네요. 정말 축하드려요 진짜.
뭐를 잘했는지 모르겠지만 ‘히히’라고 웃으며 쳐다보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밥도 얻어먹었는데 이름을 안 말해줬네.”

“김태형이야. 연화고 2학년”
연화고...연화고라. 내가 다니는 학교도 연화고인데 왜 이 녀석을 본 기억이 없는 거지? 이 정도의 외모라면 급식실에서 스쳐보기만 해도 하루종일 생각날 얼굴인데.
“처음 보는데. 전학 온 거야?”
앞을 보며 걸어가다 연화고라는 말에 발걸음을 멈추며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니 김태형도 따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 아직 가진 않았고 이번에 전학가는거야”
그쪽이었구나. 하긴 이 얼굴을 못보고 지나칠 리가 없었긴 했다. 나는 ‘그렇구나’ 하며 멈추었던 발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 나온 거야?”
집을 나왔냐는 질문에 잠깐 고민에 빠졌다. 보육원을 집이라고 할 수 있으려냐. 애초에 집이라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응, 어떻게 알았어?”
김태형은 ‘내가 바보처럼 보이냐’ 라며 나의 가방에 손짓을 했다.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기뻐하는 게 눈으로 딱 보인다.
“밖에 잠깐 나오는데 그렇게 큰 배낭을 들고 오진 않아”
하긴, 맞는 말이다. 거기에 이 가방을 들고 벤치에 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자칫하면 나를 가출 청소년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갈 곳 없는 거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작은 목소리로 ‘응’ 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하는 말.

“그럼 하숙집에 오지 않을래?”
“꽤 살기 좋을 거야”
그 말을 하는 순간 바람이 살랑이며 불었다. 그의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움직였고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부모님도 안계시고, 집도 없다.
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내 인생의 황혼이었던 지금, 이 황혼에서 나를 구원해줄 백마 탄 왕자님이 드디어 나타났다.
황혼이 ‘해가 저서 어둑어둑한 무렵’이란 뜻도 있지만 ‘쇠태하여 종말에 이른 때’ 라는 의미도 있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