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당
: 기묘한 악당들
W. 그쁨
- 경고! 작가는 주인공을 상당히 비도덕적인 인물로 생각·표현하고 있습니다.
매캐한 연기 탓에 코와 눈이 매웠다. 눈이 따가워서 눈물이 자꾸만 났다. 정국은 손을 들어 올려 눈을 비비려 했다. 지원이 그런 정국의 손을 잡아내리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좀 참아, 눈 다친다."
전에 알던 다정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차갑게 굳은 지원의 얼굴에 정국이 흠칫, 몸을 떨었다. 겁이 나서 자꾸만 몸이 움츠려든다. 숨어있던 풀숲에서 몸을 일으킨 지원이 머리에 묻은 풀떼기와 옷에 날아앉은 검댕을 툭툭 털었다. 에이씨-, 하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누군가를 향해 반갑게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정국은 지원의 시선이 닿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구소에서 누군가가 유유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꼬맹, 잘 빠져나왔네? 저것도 무사히 데리고."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그건 가져왔어?"
"못 가져올 이유도 없지."
정국은 그 남자를 마주하곤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귀에서 달랑거리는 그것은 분명 지원이 가지고 있던 것과 한 쌍임이 틀림없는 귀걸이었다. 하지만 그가 왜? 어째서? 정국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소, 소장님?"
그 자그마한 목소리에 지원과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정국에게로 향했다. 아, 하며 남자, 아니, 연구소장이 말했다.
"폴리모프 아직 안 풀렸어? 진작 풀리고도 남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알아챈 김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그래? 그 면상만 마주해도 토 쏠리니까."
"어이구, 그럼 안되지-,"
아니, 연구소장이 아니었다. 남자의 얼굴이 흘러내리듯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 정국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불쾌한 액체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에 묻은 액체를 대충 털어낸 남자가 꿍얼거렸다.
"이래서 폴리모프가 싫다니까….""어련하시겠어. 서류는 이게 끝이야?"
"응, 나머지는 진즉 폐기처분했지."
"생각보다 쓸모가 없는데? 그냥 불타 없어지게 놔둘 걸 그랬어."
"뭐? 내가 그거 구한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다 쓰레기 같은 내용뿐인데."
"나름 고급 정보들인데…."
"쓰레기장에서 나온 것들이라 쓰레기밖에 없나 보지."
서류에 코를 박고 글을 읽는 지원과 남자가 나누는 대화에 정국이 일순 멍해졌다. …서류? 쓰레기장? 연구소를 말하는 건가? 그러다 이미 새빨간 화염에 잡아먹혀 무너져내려가는 연구소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거, 지원이 네가 한 거야?"
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정국의 말에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흘긋 쳐다본 그가 불타 사라져가는 연구소를 보곤 아아, 하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럴걸. 하는 그 대답에 정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불을 지른 거야? 안에 사람들은?"
"글쎄, 저 정도 불에 안 죽고 살아나면 그건 신이 아닐까? 운이 더럽게 좋거나."
"그, 그런…, 실험체, 실험체들은?"
"몰라, 탈출구를 알려주긴 했는데 거길 쓰고 말고는 걔들 몫이니까. 내 말 들었으면 살았겠지."
"…그럼 성 박사님은? 연구소장님은 그럼…,"
"그딴 쓰레기들을 내가 살려줘야 될 이유가 있나?"
바닥을 보며 말하던 정국이 고개를 쳐들었다. 저를 날카롭게 내려다보는 지원에 정국이 흡, 하며 숨을 들이켰다. 지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같았으면 너도 저기 있었어야 해, 하며 화염 속을 가리키는 지원에 정국의 안색이 더욱 안 좋아졌다. 괜히 살렸나? 하는 의문이 지원의 머릿속에 남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황 파악이 느리고, 나약하고, 저딴 것도 에스퍼라고 만들어놓다니. 지원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도 보라,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아군 적군 판단도 못한 채 이능은 쓸 생각도 없어 보이니…. 그냥 죽일까? 지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니, 아니다. 분명 쓸모가 있어 살려놓았으니까…, 다시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던 지원은 종이 몇 장을 꺼내들었다.
"야, 도련님."
"…갑자기 무슨…,"
"에스퍼 관리국 국장 전지환의 차남, 전정국."
"…! 그걸, 그걸 어떻게…?"
"내가 바보 등신도 아닌데 눈에 빤히 보이는 사실을 모를까."
세상 어떤 열일곱 살짜리 애가 그렇게 순수하겠어? 심지어는 실험체로 자원까지 한 애가. 지원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정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좀 물어보자. 여기 네 목숨도 달렸으니까 신중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걸.
"에스퍼 이능 개발 연구소, 연구소장이 아닌 실질적 운영자가 누군지 알아?"
"…아니."
"그럼 이 연구소에 갇혀있던 실험체들이 어디서, 어떻게 모인 건지 알아?"
"…몰라."
"그럼 마지막, 네가 받은 실험에 사용된 '이능'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는?"
"……."
"아무것도 몰라? 그래, 그럼 너는 그냥 에스퍼가 될 수 있단 네 아버지 말만 듣고 이 연구소로 온 거네? 강해질 수 있단 사실에 멍청하게 들떠하면서."
"……."
"아주 한심해.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할 순 있을까 싶었는데, 그냥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였어."
시간 아깝게, 지원의 말에 정국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가 내뱉은 말이 죄다 사실이었기에. 이 연구소가 누구의 소유인지, 실험체들은 어디서 왔는지, 연구소가 세워진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그저 에스퍼가 될 수 있단 말에 무작정 연구에 동참한 제 모습까지도 지원이 한 말이 맞았다. 그냥 들떠서는-,
지원은 서류뭉치에서 뽑아낸 서류 중 몇 장을 정국의 머리 위로 던졌다. 종이들이 팔랑거리며 머리 위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정국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싸늘하게 굳은 지원의 얼굴이 내리는 종이 사이로 보였다.
"이별 선물이야. 1년 동안 친구라 믿고 우정 열심히 키웠는데 뒤통수 맞은 것에 대한 대가라고 치자. 어떻게 쓸지 정하는 건 네 맘이야."
"……."
"마지막으로 걸어보는 기대니까 현명한 선택하길 바라, 도련님."
가자. 지원이 남자에게 말했다. 정국과 지원의 대화를 퍽 흥미롭단 얼굴로 구경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 없이 제게서 등 돌리며 걸어가는 지원의 모습이 정국의 시야에 들어왔다. …난 아직 네게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왜 이런 일을 꾸몄는지, 아까 한 질문들이 대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날 왜 살렸는지…. 정국은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더듬더듬, 제 앞에서 당당히 걸어가는 이의 이름을 담았다.
"…김, 지원!"
그가 뒤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아차, 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지원에 정국이 입을 달싹였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원은 그런 정국을 기다려주지 않을 터였다.
"참, 알려주는 걸 까먹었는데, 내 이름은 한여주야, 김지원이 아니고."
"…뭐?"
"김지원은 우리 엄마 이름! 궁금하면 내가 준 서류 잘 뒤적여보던가-,"
그럼 진짜 안녕! 화염에 휩싸인 건물을 배경으로 하기엔 너무나도 해맑은 인사였다. 정국은 그들이 제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귀 따갑게 울려 퍼졌다. 주변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하나씩 손에 쥐어 담으며 정국은 여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한여주,
전정국의 인생에서 절대 잊히지 않을 이름이었다.
⚒
5년 뒤,
[속보입니다, 에스퍼 관리국 국장 전지환 씨가 차기 국장 후보로 그의 차남인 전정국을 지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유례없이 빠른 후계 지목에 관리국은 물론이고 언론은…]
"푸핫-,"
충청남도 당진,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에 뉴스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소파에 파묻은 고개를 살짝 든 석진이 여주의 시선이 재미도 없는 티브이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소녀를 따라 티브이로 시선을 옮겼다. 재밌는 소식이라도 나오나 싶었다. 속보랍시고 흘러나오는 내용에 귀에 익은 이름이 들리자마자 고개를 저으며 다시 머리를 소파에 파묻었지만.
"와, 도련님 출세했네?"
여주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어-, 석진이 여주의 말을 대충 한 귀로 흘려들으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의 영혼 없는 대답에 대한 응징으로 석진의 엉덩이를 발로 한대 까준 여주는 석진의 고함소리를 배경 삼아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에스퍼가 멋있다는 이유로 연구소로 걸어들어온 꼬마 도련님이, 이제는 전국 에스퍼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단다. 여주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하면서.
"뭘 그렇게 웃어요? 뭐 재밌는 거라도 해요?"
여주의 웃음소리에 쫄래쫄래 거실로 기어 나온 태형이 여주의 근처에서 기웃거렸다. 그마저도 뉴스에서 나오는 '에스퍼 관리국'이라는 말에 금세 흥미를 잃었지만.
"뭐야, 센터 얘긴데?"
"응, 간만에 센터 얘긴데도 재밌는 소식이 있길래,"
"왜? 누나 아는 사람이에요?"
태형의 말에 여주가 티브이 화면을 가득 채운 얼굴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글쎄…, 하는 맹숭맹숭한 대답에 태형의 흥미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누나, 가이딩 안 부족해요? 가이딩 좀 해줄까요? 하며 여주에게 찰싹 달라붙어 아양을 떠는 것만 봐도 그랬다.
"김태형 여주 괴롭히지 마라-,"
"아 형!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근데 어디 갔다 와요?"
"요 앞에. 아무래도 누가 들어온 것 같아서 확인 좀 하느라."
편안하던 분위기가 남준의 말 한마디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들어와요? 누가? 방금까지 여주에게 들려주던 애교 섞인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형이 물었다. 남준이 물을 벌컥 들이켜곤 말했다.
"에스퍼 두 명. 하나는 추적, 하나는 이능을 안 써서 모르겠어. 아무튼 꼬리가 잡힌 건 확실한 것 같아."
"…어디까지 들어왔는데? 폭탄은 하나도 안 터졌잖아."
"형은 주택 가까이에 심어놨잖아요. 그렇게 깊게 들어오진 못했어요. 내 이능 뚫는 게 어디 쉽나?"
남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었다. 석진이 안심하곤 한껏 들이켰던 숨을 푸우욱, 내쉬었다. 추적이라, 여주가 소파에 뉘었던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슬슬 장소를 옮길 때가 되긴 했지…."
맥없이 말하는 음성에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간만에 얻은 꽤 괜찮은 보금자리에서 지낸 지가 어연 한 달 반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짧으면 몇 주에 한번 꼴로 이사와 같은 대이동을 하는 그들의 처지와 비교했을 때 꽤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은 맞았다. 짐 싸자-, 하는 여주의 말에 태형이 툴툴거리며 일어났다. 귀찮은데, 하며 입을 댓 발 내민 모습에도 여주는 빨리 짐이나 싸라며 태형을 방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꼬리가 잡힐랑 말랑할 때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다, 저들 같은 도망자들은.
꼭 지금과 같은 전시상황이 아닐 적에도, 관리국의 통제를 벗어나려 부득불 애를 쓰던 에스퍼들은 차고 넘쳤다. 대부분이 관리국의 처참하고 역겨운 이면에 질려 목숨을 걸고 달아나는 이들이었고, 타국과의 전쟁을 벌이는 지금, 관리국에서 도망쳐 나오는 에스퍼들이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결코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관리국은 관리국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에스퍼들을 한데 모아 '도망자'로 분류했고, 그 수가 점차 많아짐에 따라 관리국 내에 도망자 전담 팀을 신설해 통제를 벗어난 에스퍼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 운 좋게 그들의 눈을 피해 장기적으로 도망 다니는 에스퍼들도 존재했다. 마치 여주와 석진, 남준, 그리고 태형이 모여, 나름 BTS라는 팀 이름까지 만들어낸 그들처럼.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BTS에 운 좋게 김태형이라는 가이드가 들어왔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아니었으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에스퍼 폭주 사태'처럼 저들도 운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연준이랑 수빈이는?"
"부산 쪽으로 내려가기로 해서 아침에 나갔어. 너 잘 때."
"그래? 인사도 못 하고 보냈네."
아쉬움에 여주가 혀를 쯧-, 찼다. 짐 싸서 바로 출발해요-, 남준 오빠, 가이딩 충분해? 하며 묻는 여주에 남준이 방문 틈새로 손만 내밀어 OK 사인을 보냈다. 석진 오빠는? 하는 물음에도 괜찮아~, 하는 대답이 들려오는 것을 확인한 여주가 제 방으로 들어섰다.
쫓기는 신세에 짐이랄 게 뭐 있겠는가. 도망가는 길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을 챙긴 여주가 이삿짐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인 크기의 백팩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이미 바리바리 짐을 챙겨 나온 세 사람이 보였다. 다 됐어? 하며 물어오는 석진에 여주가 백팩을 대충 걸쳐매곤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까요?"
여주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남준만 빼고. 남준의 안색이 갑자기 희멀개지기 시작했다. 가이딩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여주의 머릿속에 '경고'란 단어가 떠올랐다.
"망할, 김남준 뚫렸어!"
쾅! 콰광! 하는 폭음이 들렸다. 주택 앞마당에 심어둔 석진의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주택을 둘러싸고 있던 공간 결계가 해제되었다. 결계를 유지할 만큼의 가이딩이 남준에게 남아있기 않다는 신호였다. 튀어!! 기절 직전의 상태인 남준을 들쳐매며 여주가 소리쳤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석진과 태형이 출구로 쓰일만한 공간을 찾아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이런,"
"…한발 늦었네…."
목에 들어온 칼이 아니었다면 폭발로 인해 무너져내린 벽면 너머로 지체 없이 뛰어내렸을 태형이 중얼거렸다. 여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중얼거리며 제 목을 긋기 딱 좋은 위치에 들어선 칼날을 노려본 여주가 남준을 내려놓았다. 무너진 주택의 잔해를 뚫고 흙먼지 사이로 들어서는 수많은 인영들을 본 여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젠장."
남자가 멋들어진 웃음을 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 박살 난 티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남자가 여주의 앞에 서 있었다.
"…찾았다, 한여주."
센터의 후계자가 직접 나섰다. 한여주를 잡기 위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