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뭘 그렇게 봐?"
"네? 아니.. 아니에요."
정국 오빠는 그 이후로 연락을 단 하나도 보내지 않았다. 우리 사이를 놓은 건 나였지만 재회를 원하는 건 오빠가 아니라 또 나였다. 언젠가 오빠가 했던 말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서. 날 떠나보낸 이후로 다른 사람이 절대 좋아지지 않았다고. 내가 없으면, 자긴 정말 죽을 거라고. 너무 내 입장만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자꾸만 자책하게 되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오는 건 아닐까 하며 휴대폰만 붙잡고 있자 윤기 씨는 자신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봐주지 않고 그런 내가 못마땅했는지 입을 삐죽 내밀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다. 그제서야 윤기 씨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너무 심했나? 휴대폰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왜. 뭐."
"삐졌어요?"
"안 삐졌거든."
"아닌데, 삐졌는데."
날 바라보지 않고 계속 등을 돌리는 윤기 씨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고 등에 얼굴을 비비적거리자 윤기 씨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뽀뽀도 한 사이에 아직도 부끄러워요? 윤기 씨는 오늘따라 당돌한 내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너 오늘 이상해."
"그래서 싫어요?"
"······ 아니."
그제서야 윤기 씨는 뒤를 돌아 내 양 볼을 꼬집었다. 그러고는 죽 늘리며 귀엽다면서 실실 웃는다. 원체 볼이 말랑말랑하지 않아 늘려지는 게 아픈 나머지 인상을 쓰며 손을 놓아보려 하니 윤기 씨는 꼬집던 손가락을 다시 펴 볼을 모아 입술이 붕어 모양이 되게 만들었다.

"귀엽다."
"우으, 브!"
"아기 같아."
"흐지 므여!"
"너 이제부터 나 두고 다른 놈이랑
연락할 거야, 안 할 거야?"
안 해요, 안 한다고요! 그제서야 윤기 씨는 날 놔줬다. 그럼 라스트,라며 입술을 맞대었다가 재빠르게 떼었다. 너무 놀라 얼굴이 홍당무가 되자 윤기 씨는 얼굴 빨개졌다면서 날 놀렸다. 근데 지금 날 놀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봐도 윤기 씨 얼굴이 더 빨갰다.
전엔 잘만 하더니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지. 결국에는 둘이서 한참 동안이나 뽀뽀하고 생난리를 피웠다. 역시 내 마음은 모두 윤기 씨에게 향해있는 것 같다. 괜스레 또 오빠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 오빠."

"······."
다음 날, 왜인지 아침부터 날 놔주지 않고 침대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끌어안는 윤기 씨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오후가 되어서야 오늘따라 유독 왜 이렇게 스킨십을 많이 하려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국 오빠가 돌아왔다. 다시 탑 관리자로, 윤기 씨의 매니저로. 언제 갔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와 있었다.
나보다 윤기 씨가 정국 오빠를 보고 더 낯빛이 창백해졌다. 마치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들어보니 석진이가 대충 윤기 씨에게 윤기 씨가 없었던 동안의 일들을 대충 말해줬다는 걸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숨기려고는 해 봤는데. 하지만 석진이의 생각을 하고 있기엔 날 바라보는 오빠의 눈빛이 너무 매서웠다.
"여주한테 또 상처 주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그만두십시오."
"여주···. 네 입으로 그렇게 부르는 걸
보니까 이제야 실감이 좀 나네."
"······."
"내 대답은 '싫어'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든 말든 그건 네 알아서 해."
윤기 씨가 내 어깨를 끌어당겨 날 저의 품에 기대게 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오빠의 표정이 괜찮았지만 내가 굳이 피하려고 하지 않자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난 여전히 오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네가 날 가지고 논대도 좋아. 충분히
장난감으로 쓰일 자신 있어."
"······."
"다른 남자를 만나도 사이에 끼어들
생각 없어. 네가 행복하면 된 거야, 근데."
"······."
"민윤기는 아니잖아."
오빠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오빠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많이, 아파 보였다. 아주 많이. 시간이 지나도 아무 말도 못 하는 나의 오빠가 한숨을 깊게 푹 내쉬었다. 그럼 나랑 둘이서 잠깐 얘기 좀 해. 오빠가 내 손목을 잡고 끌자 윤기 씨가 날 데려가지 못하게 막았다.
"··· 윤기 씨, 놔줘요."
"······."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요. 금방 갔다 올게요."
윤기 씨는 내 말에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런 윤기 씨에게 작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오빠를 따라갔다.
오빠는 정원에 날 데려갔다. 내가 온 이후로 가시나무들이 사라지고 다시 꽃들이 피어났다. 독초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처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빠는 윤기 씨와 있을 때와는 다르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뭔가 불안했다. 오빠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게, 그 무언가가 너무나 불안했다.

"나 오늘 한국 뜰 거야."
"··· 네?"
"그 말 하려고 왔어. 이제 마지막인데
널 못 보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아서."
"아니 오빠.. 잠깐만요···."
"큰맘 먹고 민윤기한테 보내주는
거니까, 보란 듯이 예쁘게 살아."
이런 말 대신하게 해서 미안한데 지금은 상황이 말이 아니라 좀 전해줘. 민윤기 전 신부 민연아, 알아보니까 황태후 쪽에서 처리한 것 같아. 처음부터 황태제와 친하게 지냈던 민윤기가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야. 민윤기가 탑에 없을 때를 노려서 비겁하게 민연아를 죽이려는 속셈이었어. 그리고···.
오빠는 마지막 말을 흐리더니 우물쭈물하며 내 눈을 힘겹게 쳐다보았다. 난 그런 오빠를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오빠는 끝내 입을 열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하고서 말했다.

"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될까."
"······."
"너도 내가 쉽게 내린 선택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내가 조심스레 오빠를 안자 오빠는 날 껴안고서 눈물을 쏟아냈다. 첫사랑이라는 게 참 지독하면서도 마음이 아픈 것인 것 같다. 만약 내 첫사랑이 정국 오빠였다면 그땐 또 달라졌을까.
"··· 뭐···?"
"들은 거 그대로예요. 연아라는 분을
죽이려고 한 게 황태후라는 거."
정국 오빠가 말해준 그대로를 윤기 씨에게 전했다. 내 말을 들은 이후로 윤기 씨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졌다. 나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정국 오빠의 첫사랑이 나였기에 그 모든 걸 알 수 있듯이 윤기 씨의 첫사랑은 연아라는 여자니까. 내 첫사랑이 윤기 씨였기에 지금 윤기 씨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다 이해하려 했다. 시한부라는 판정을 받아 같이 보낼 시간이 얼마 없었음에도 그 시간을 무시하고 불태워버린 사람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여주야.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줄래?"
"······."
"너한텐 모질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너를 사랑한 만큼 연아를 사랑했어."
"······."
"··· 어쩌면 난 평생 그 애를
못 잊을지도 몰라. 근데 난,"
"다녀와요. 가서 그분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윤기 씨는 말없이 날 꼭 안았다. 고마워. 진짜 너무 고마워 여주야. 난 그런 윤기 씨의 등을 토닥였다.

윤기는 여주가 잠이 든 그날 밤 모든 황태후를 완전히 망가뜨리기 위해 모든 인력을 동원했다. 신부가 많이 바뀌어서 많은 뱀파이어들이 윤기를 잘 아는 게 아니라, 윤기 자체가 황태제와 절친한 사이인 만큼 꽤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여주의 말대로 모든 상황을 황태후에 맞춰보니 역시나 그런 짓을 할 인물은 황태후밖에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쳤다. 연아가 죽은 뒤로 갑자기 황태제와의 교류가 끊겨 의아했다 싶었는데, 결국엔 그 여자였구나.
성으로 쳐들어가기 전 윤기는 연아가 있는 납골당에 들렀다. 오랜만에 재회한 연아의 모습. 연아는 4년 전과 똑같았다. 윤기는 예쁜 꽃들로 가득한 꽃묶음을 연아의 유골함 옆에 놔두고는 예쁘게 찍힌 연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연아야, 네가 전에 나한테 그랬었지.
네가 내 곁에서 사라지면 너보다 날
더 사랑해 주는 여자 만나라고."
"······."
"··· 나 그런 사람 만난 것 같아. 이젠
다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
"내 마음 이해하지?"
그렇게 윤기는 납골당에서 나왔다. 이제 당분간은 연아를 잊고 살 계획이었다. 성 안에는 윤기가 심어놓은 스파이들이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윤기의 부탁에 미국에 있는 크리스도 한국 인력을 총동원해 황태제와도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보고 우리
어머니를 폐위시키라고?"
"죽일 수도 있던 걸 폐위로
결정했으니 다행으로 아시지요."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죄명 다
따지면 폐위는 원래 기본이고 사형 각이야."
다 보는 앞에서 맛깔나게 망신시키고 싶은 건가? 뭐 순화했다고 하니 원래는 네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던 거고. 황태제의 말에 윤기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황태제께서는 아직도 여전히 개사이코새끼시군요. 윤기의 말에 황태제가 깔깔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러는 넌 신부를 세 명이나 죽였고?
"그래서 그게 황태후 때문이니까 이
일을 벌이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미친놈. 오케이 네 뜻대로 해."
어차피 난 양자인데다가 그 여자한테 학대란 학대는 모조리 받아왔으니까. 내 성깔이 이 모양인 데도 그 여자가 한몫하겠지? 그 사이 크리스의 인력으로 황태후가 죄명을 듣고 포박당해 있었다. 황태제는 그런 황태후에게 '피스'를 날리고 성 안에서 유유히 빠져나왔다. 저 또라이새끼, 별 도움도 안 됐네.

"내 어디가 그렇게 맘에 안 드셨길래
내 신부를 건드립니까."
"··· 그때 민연아 그년이랑
같이 죽였어야 했는데."
"연아 그 더러운 입에 담지 마세요.
날 죽였으면 죽였지 그 애를 건드린
건 황태후께서 실수하신 겁니다."
탕- 총소리가 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이후로도 탕, 탕, 탕, 탕, 탕-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늙은 여자 하나로 온통 피바다가 되어버린 탓에 다른 뱀파이어들이 윤기를 겨우 말리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결국엔 뜻대로 이루었는데, 그리 통쾌하지만은 않았다.

시작이 어떻든, 끝이 어떻든. 정원은 독초가 모두 사라진 채 예쁜 꽃들만 남았다. 정원의 식물들이 윤기 씨였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상태가 좋아져만 가는 정원은 윤기 씨가 행복하다는 뜻이었다.
"여주야. 우리 이제 행복하기만 하자."
"······."

"진짜 나의 마지막
신부가 되어줄래?"
이 끝은 과연 종지부일까 또 다른 시작일까. 나에겐 또다시 신부가 되어달라는 물음이 건네져왔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결말은,
"좋아요."
언제나처럼 '예'일 것이다.
와우 드디어 뱀신부 끝 ㅠㅠㅠ 계속 미루고 미뤄서 언제 완결이 날까 싶었는데 결국 끝나긴 하네요! 그럼 우린 나중에 시즌2로 봐요 0_<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