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막무가내는 처음이지

금목서, 재떨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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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목서, 재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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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놓아버린 그 여자를 데리고서 태형은 기어코 제 자택의 방을 내어주었다. 애초에 지하를 위한 공간은 일주일 전부터, 그러니까 지하의 집에 찾아갔을 적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셈이다. 같은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그 여자는 말이 없었다. 아무런 말도, 기척도 내어주지 않았다. 기어이 저를 받아내겠다는 남자를 옆에 두고.

그런 지하를 생각하여 태형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시골의 산 속 위치한 자택의 대문을 통과할 때까지. 시동이 꺼지고 재현이 뒷좌석 문을 열자, 반팔에 레깅스 차림의 지하가 순순히 몸을 움직였다. 땀이 식고 해가 지면 추울 법도 한데 끝까지 내색 하나 하지 않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태형은 뒤따랐다. 곧이어 태형이 안내하는 위치로 앞장 서게 되었지만.







”저 근데”

“네.”


마치 여자가 입 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속삭이며 작게 말한 소리에 반응한 태형이 대답했다. 태형이 마련해 둔 지하의 방 문 앞에 다다른 참이었다.




“아무 것도 없어요.”

“…”

“…”

“…”



다시금 말하지만 태형은 남자가 다수일 수 밖에 없는, 그러니까 어둡고 험한 일을 주로 맡는 조직에서 평생을 몸 담가왔다. 무슨 수로 여자의 생활용품까지 챙길 생각을 했겠는가.



“…집에 가야”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한 시간 내로 해결해주겠습니다.”



완고하고 강경한 그의 태도에 지하가 이번은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뭘 챙겨달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기엔 그것도 이상했다. 머물 곳까지 마련해준 그를 그냥 둬보기로 했다. 믿어보기로 했다는 건 너무 큰 의미 같으니까. 그냥 두기로 했다가 적당하겠다.

태형은 곧장 재현에게 전화를 걸며 복도를 따라 멀어졌고, 지하는 점차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 지켜봤다. 모퉁이를 돌아 무어라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작아질 때 즈음, 방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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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일이십니까.“

”어 그래, 재현아.“

”지금 한 시가 급하신ㄷ,“

“이사한 집에서 여자가 필요한 거 전부 다“

”…예?“

”삼십 분 안으로 가져와.“








내가 뭘 들은 거지. 순간적으로 사고 회로가 멈춘 재현이 재차 질문했다. 되묻는 건 자제하는 것이 좋은 이 바닥이라는 걸 알면서도. 뒤에 떨어진 명은 같았다. 그러니까 재현은 삼십 분 안에 추상적인 모든 것들을 구매해야하며, 모시는 분을 목적지까지 태워다주는 임무를 동시에 해내야 하는 셈이 되었다. 페이가 센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늘도 되새기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시동을 거는 재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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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장~”


어둑해진 어느 폐창고. 태형은 저를 경호하는 이들을 모두 문 앞에 세워두고 재현과 함께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정겨운 목소리로 태형을 부르는 중년 남성. 그의 뒤에는 언뜻 봐도 스물은 되어 보이는 패거리들이 위압감을 조장하기 위해 서있다. 태형은 그 광경을 보며 하찮은 게 따로 없다는 듯 입술 위로 조소를 내비쳤다.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힘들게 만든 게 누군데.”

“…하하. 그건 이미 다 설명,“

“간도 크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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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 칠 생각을 다 했어. 기특하게.“









그쪽 아기들이 배 타고 튀려다 재수 없게 걸려서 망정이지, 안 걸렸으면? 나는 손도 못 쓰고 감옥 갔지. 응?

순식간에 얼어붙은 창고 안 분위기에 억지로 웃음을 띠던 중년 남성의 주름도 점차 옅어졌다. 하하. 하는 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살려 보려는 노력 마저 애처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 사정이 있었어.”

“…”

“이번 한 번만, 김 사장. 응?”

“…”

“하라는 거 다 할게. 위험한 일도,“

“하여튼 이 졸렬한 새끼들은.”

“…”

“레퍼토리가 늘. 똑같아.”




흥미 떨어지게. 싸늘한 미소를 지어보인 태형이 제 왼 손목에 차인 시계를 어루만졌다. 지하에게 다가가기 위해 손 봤던 넥타이 마저 답답하다는 듯이 풀어헤치자,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재현은 무언갈 예상한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던 참이었다.

탕ㅡ.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소음기가 장착되지 않은 총이었다. 소리에 예민한 태형이 일시적으로 한껏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에, 재현이 태형을 온 몸으로 감쌌다. 이 모든 게 순간이었다.

중년 남성의 재킷 안 주머니에서 나온 무기였다. 고작 이런 걸 대비라고 들고 왔나. 일말의 용서를 고민하던 태형이 허무함에 찬 숨을 뱉었다. 물론 그 순간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김태수!“




안광이 없던 그 검은 눈동자가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조금 더 가라앉았다. 이 전개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재현의 표정 역시 감추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태형의 표정은 어떠한 비밀을 들켰다는 조바심 보다는, 마침내 당위성을 얻어 개운한 눈빛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영리하게도 뭘 알아낸 눈치구나. 그런데,

그걸 이딴 식으로 쓰면 안 됐지.





“김태수 죽음.”

“…”

“네 짓인 걸 알고 있다.“




태형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궁지에 내몰려 용서를 구하다 제 입지를 깨닫고 협박으로 바꿔보는 그 우스운 꼴을 감상할 뿐. 무슨 말을 뱉어야 이 배신자 새끼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내주는 게 좋을까. 총성이 울린 상황에 그런 여유로운 고민을 하며 남자는 가만 혀를 굴려보았다.






“우리 어르신께서 하나만 알고”

“…”

“둘은 모르셔. 안쓰럽게.”

“…”

“어르신 죽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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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짓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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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잠시 눈을 붙인 태형이 재현의 목소리에 깬 참이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텐데 문득 제 셔츠 깃에 물든 핏자국이 걸리적거려 검지로 문질러도 보았다. 집 앞에 도착했음에도 차에서 안 내리고 헛짓거리를 하는 제 상사를 보며 재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그 여자를 들이며 시작된 거라고.


“부탁한 건.”

“이미 안지하 씨 편으로 건네뒀습니다.”

“…그랬겠네.”



준비하라 말한 시점으로부터 어언 세 시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차에서 내린 태형은 구두 코 앞에 붙은 흙먼지를 바닥에 치는 식으로 툭툭 털어내었다. 어둑한 밤임에도 셔츠에 덕지덕지 눌러붙은 검붉은 핏자국이 너무나도 잘 보이는 것이, 누가 봐도 정상적인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님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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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하 씨. 접니다.“


똑똑, 예의를 차리는 순간이라곤 삶에서 손가락에 꼽아야 하는 남자가 노크를 하며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혹여나 잠에 들었을까 여자를 고려한 작은 소리였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언가에 정신 없이 부딪히던 소리가 나더니 활짝 열리는 방 문.



“그렇게 두고 가서 미안했습니다.”

“됐어요. 그런 말 듣자고 열어준 거 아니니까.”




둘 사이 정적이 가라앉았다. 지하는 재현의 피 나는 노력 덕분에 샤워 후 갈아입을 속옷과 잠옷을 구할 수 있었고, 간단한 스킨케어 화장품까지 마련해준 덕에 잘 준비를 마친 듯해보이는 상태였다. 원래도 화장 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더 선명해진 듯한 청초한 얼굴에 태형은 동요하는 듯도 했다.

지하는 남자의 소매 군데군데에 묻은 핏자국을 차례로 훑으며 생각했다. 그래 내가 이런 남자의 집에 살겠다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왔었지. 불규칙하던 호흡을 고르고자 숨을 한 번 들이켜는 순간 끈적하고도 비릿한 피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그들이 강에서 만났던 때와는 달리 한껏 헝클어져 내린 머리를 보며 무슨 큰 일이 있었겠거니 짐작을 해보는 지하였다. 김태수도 저렇게 죽었을까.




“필요한 건 편하게 말해요.”

“…김태형 씨.”



내내 어둡던 그의 눈동자가 일순 작게 흔들렸다. 첫 만남 때부터 느낀 거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의 한 구석을 간질이는 듯한 힘이 있었다. 그 일시적 느낌도 잠시, 태형의 시선은 작게나마 움직이는 지하의 입술을 좇기에 바빴다. 그녀의 모든 말을 담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김태수를 왜 죽였나요.”









그녀의 입술을 좇던 검은 눈동자가 제자리에 멈췄다. 연이어 움푹 파인 인중, 오똑한 코, 적당히 차오른 광대를 타고 올라간 시선이 그녀의 갈색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기어코 그 많은 말들 중에 가장 어려운 질문을 택한 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