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여주 하나로 죽고 못 사는 남사친 두 명이 너무 보고 싶네요.
지금은 길가에 사람 하나 걸어다니지 않는 새벽이라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한 아파트 단지에 저의 세단을 길가에 대충 세운 지민.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내리며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려 하는데, 그때 마침 뒤따라온 태형의 세단. 정차하기 무섭게 조수석에서 내려 지민에게로 뛰어오는 여주였다.
"박지민··· 잠깐만."
지민의 앞에 숨을 고르며 선 여주. 지민은 이럴 시간이 없다는 듯 그냥 지나쳐 현관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여주가 지민의 두 팔을 붙잡았다. 지금은 아니라고. 지금 이렇게 찾아와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그러면 지민이는 고개 오른쪽으로 돌리며 한숨 쉬었다. 답답하다는 듯이.

"내가 대체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데."
"·········."
자기 행복하자고 하는 연애에, 그따위로 감정 소모하고 있는 너 보는 내 심정은 오죽했겠냐고. 네가 나서지 말래서 나 여태 가만히 있었잖아. 근데 지금은 그 새끼 때문에 네가···. 언성을 높이려다 말을 차마 다 잇지 못한 지민은, 여주의 뒤에 있던 태형이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궜다.
여주는 지민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애꿎은 그의 소매만 더 꾹 붙잡았다. 지민과 친구가 된 이후로, 이렇게까지 제 자신에게 정색을 하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직감적으로 말려야할 것만 같았겠지. 가지 말라는 여주의 뜻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제 의지를 굽힐 생각은 전혀 없었고.

"···지금 니가 한세운 감싸고돌면 우리만 병신 되는데."
"······내가 언제..."
여주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서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은 지민과 태형. 지민은 상체를 낮추더니 여주와 눈높이를 맞추며 이내 입을 열었다.

"···한세운한테 남은 감정은 없지, 여주야."
"·········."
"없으면 다행이고."
"······어?"
"있으면 우리가 너한테 빚 좀 지겠다."
여주가 지민의 말에 당황해서 무슨 뜻이냐고 재차 묻기도 전에, 둘의 발길은 이미 공동현관을 지나쳐 아파트 안, 그리고 엘레베이터까지 탑승한 상태. 뒤늦게 정신 차린 여주가 따라가려 해보지만, 엉망이 된 그녀의 구두굽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리고선 재빨리 핸드폰으로 세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이 시간에 자고 있을 그가 받을 리는 없고.

태생부터 남들과 다른 삶을 누리며 살아온 지민과 태형 둘에게는, 다른 사람의 집 주소를 비롯한 신상을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비서한테 시키면, 그게 뭐든 간에 무조건 그 내용을 보고해오곤 했으니. 학업에 전념할 나이에 이미 회사 경영에 몸을 담근 두 사람은, 어릴적부터 그게 그들의 일상인줄로만 알았다. 손 하나 까딱하면, 한 사람 인생 망쳐주는 거? 그건 일도 아니라는 거.
주변 어른들이 그렇게 가르쳤고, 돈이 아니라면 안 되는게 없다고 주입식 세뇌를 받아온 두 사람에게는 비슷한 구석이 넘쳤다. 인간 관계가 없다는 것, 어릴적의 기억이 없다는 것, 가족에게 애정따위는 없다는 것. 그러다보니 두 사람이 친밀감을 가지고 친구 관계를 형성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이 두 사람의 과거는 나중에 마저 푸는 걸로 하고, 이들은 지금 304라 적힌 문 앞에 서있다. 뒷조사를 통해 이곳이 세운의 집이라는 걸 알아낸 두 사람은 몇 달을 기다리기만 하다 결국 오늘에서야 세운을 만나러 온 것.
지민은 문 옆의 초인종을 눌렀다. 한 번에 만족하지 않고, 연이어 계속해서. 당연히 누구든 자고 있을 시간이었기에, 세운의 잠 깨워주는 셈 치고 멈출 생각이 없었는데···. 초인종을 누른지 3분이 지나갈 때즈음 강하게 열리는 현관문.
"···어떤 미친놈이 자꾸···!"
현관문이 열리기 무섭게 한발짝 뒤로 물러선 둘. 세운이 덜 뜬 눈으로 그들을 스윽- 훑어본 후에 그냥 문 닫으려 하자 태형이 현관문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세운을 밀치며 집 안으로 먼저 들어선 건 지민이었고.
"아니 진짜 뭐하는 놈들인데."
"어떤 미친 새끼가 한밤중에···!!!"
세운의 말이 끝맺음 짓기도 전에, 불 꺼진 집안에는 둔탁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바닥으로 고꾸라진 세운이었고. 지민은 그런 그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한 대 더 내려쳤다. 뒤이어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태형이는 불을 켜곤 침대 위에 걸터 앉았고.

"이건, 미친 새끼가 때리는 거라 합법."
"···뭐?"
지민이 한 번 더 팔을 높게 들어올리자, 이제는 바닥을 구르며 그 위치를 벗어나는 세운. 꽤 아팠나 보다. 지민은 세운의 터진 입술 한 번 보더니 쓴 웃음을 짓는다. 벌써부터 겁먹으면 재미없는데. 지민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자, 지켜보기만 하던 태형이 일어나 몸을 움츠린 세운의 발목을 툭툭 건드렸다. 니가 여태 김여주한테 벌인 짓 다 갚으려면 멀었어. 그리곤 하나씩 다 읊기 시작했지.
매번 갖가지 핑계를 대고 불쌍해 보이는 행세하며 김여주 돈 뜯어간 거. 사귀는 도중에 다른 년이랑 잔 거. 만날 때마다 김여주 울린 거. 김여주 생일 때 연락 한 번 없이 클럽 간 거. 말 하나하나로 김여주한테 상처 준 거. 김여주를 장난감만도 못한 취급한 거. 시간을 줬음에도 반성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았다는 거.
태형이 점차 제 다리에 무게를 실어 세운의 발목을 짓누르자, 소리도 못 지르고 표정만 찌푸린 채 발버둥치는 세운. 그러다 태형이가 조금 힘을 풀면 제가 저지른 만행을 어떻게 아냐는 듯한 눈빛으로 태형을 올려다 봤다.

"그러니까 좀 적당히 나댔어야지."
지 주제를 모르고 김여주를 탐해. 쓰레기 따위가. 말 끝나기 무섭게 발목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짓누르는 태형이다. 지민은 다리를 굽혀 앉아, 세운의 옆에서 아프겠다며 걱정 비슷한 표정으로 묘하게 웃음 띠고 있고.
"···내가, 내가, 미, 안. 내가, 다, 잘못했, 어!!!!"
세운의 말이 들려오기 무섭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지민. 우린 사과를 바란 적이 없어. 이미 많이 늦었거든. 지민이 비릿한 미소를 짓자, 거친 숨만 몰아내쉬던 세운은 그제서야 가까스로 무릎을 꿇었다. 계속해서 통증이 몰려오는 발목은 신경쓰지도 않고.
"내가, 뭘. 어떻게 할까."
"와, 끝까지 말 놓네."
"뭘 어떻게... 할까...요."

"김여주한테 빌어."
"······."
"용서받을 생각은 말고."
"······."
"그 다음엔···"
"······."
"죽어야지, 아무도 모르게."
사람 한 명 조용히 묻는 건 나한테 일도 아니라서. 섬뜩하게 덧붙이는 말에, 세운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저 무릎 꿇은 채로 가만히. 그때 마침, 초인종이 한 번 울리며 문이 쾅쾅 두들겨지는 소리에, 세운이 고개를 들었다. 벽에 기대어있던 지민은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침대에 앉아있던 태형은 고갯짓으로 현관을 가리켰다.
직감적으로 여주임을 깨달은 세운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기어가다시피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여주에 세운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다시금 여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오빠!"
예상은 했지만,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세운을 마주한 여주는 어쩔 줄 몰라하며 덩달아 쭈그려 앉아 세운의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 그러면 세운은 두 손 모아 빌며 잘못했다고 외쳐댔고. 그런 두 사람을 가만 보던 지민과 태형은 생각했지.
여주가 아직도 세운을 못 버리고 걱정하는 걸 보면 세운에게 진심이었다는 말인데, 그 진심어린 사람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아버린 세운을 꼭 제 손으로 죽여야겠다고.

세운은 여주에게 빌고 또 빌었다. 잘못했다고. 여주는 그런 세운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하고 그저 일관된 무표정으로 들어주기만 했을 뿐. 집 안에 있던 지민과 태형은 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야 현관 쪽으로 걸어 나왔고, 태형은 이만하면 됐다는 듯 여주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났다.
한참을 그곳에서 세운을 내려다보던 지민은, 마지막 한 마디를 끝으로 미소 지으며 손인사를 건네주었고.

"오늘은 안 죽이니까, 너무 쫄지 말고."
[짚고 넘어갈 점]
여주는 아직 세운이가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다 알지 못해요... 마냥 저 자신에게 상처준 걸로
상처 받았지. 사귀는 중에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건... 몰라요!
지민이랑 태형이는 안 말하겟됴... 아마.
셋의 삼각관계가 불붙기 시작하는 시점이
아마 다음 화...? 느리면 다다음 화일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