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밤, 그대를 연모합니다 02
늦은 저녁, 두 사람은 세트로 지어진 궁궐을 두르고 있는 돌담 밖으로 나왔다. 꽤 규모가 커서, 돌담 주변으로 거닐기만 해도 한 시간은 훅훅 지나갈 것만 같은 거리. 여주가 안쪽에서, 그런 여주의 바깥쪽에서 태형이 나란히 발걸음을 옮기며 두 사람은 오로지 대사에 몰입 중이다.
"···어찌 전하는 저에ㄱ, 큼큼..."
그 와중에 내내 목이 건조했는지, 연신 기침을 남발하는 여주에- 태형은 자신이 들고 있던 생수병을 따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마치 애초부터 여주를 위한 물이었다는 듯이, 새 걸로다가.
감사합니다-. 물 받아들자마자 대본을 팔 사이에 끼고 태형의 반대편으로 고갤 돌려 입 떼고 물 마신 여주. 뚜껑까지 야무지게 닫은 후에야 병을 그에게 다시금 내밀었는데··· 너무나도 태연하게 태형도 물 마시길래 여주 속으로 뜨끔했다. 입 대고 마셨으면 큰일 날 뻔했네.

"여주 씨는 언제부터 배우 했어요?"
"···아, 올해 7년 차요."
"아, 그래요?"
네. 근데 그건 왜요? 여주가 발걸음 속도를 늦추며 태형을 향해 바라보자, 자기는 여주가 자기보다 더 선배인 줄 알았다며 싱긋 웃는다. 그러자 여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제가요···? 똘망똘망한 눈으로 물었다.
"워낙 대본 습득력도 남들보다 빠른 것 같고···"
무엇보다 인물 특성 파악하는 걸 너무 잘하시길래. 대놓고 하는 칭찬은 태형도 쑥스러웠던 탓에 뒷목 언저리를 긁적이는 그였다. 아까 같이 연기할 때 느꼈지만, 사소한 하나하나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게 보이기도 했고. 제가 배울 점이 많네요. 나긋나긋하게 속삭이자, 덩달아 칭찬 세례가 부끄러웠던 여주도 시선을 떨군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저도 선배님한테 배울 게 많아요."
"글쎄요···. 나한테 배울 점이 있을지는 모르겠네"
"왜 없겠어요···! 당연히, 있으시죠..."
짓궃게 장난을 섞은 태형의 말에, 여주가 당황하며 안절부절 못하길래 태형이 거기서 또 몰래 웃고.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모호한 기류가 맴돌고 있으면, 괜히 더워진 여주가 손부채질까지 해본다.
그러다가 아까 태형이 여주에게 걸쳐줬던 그의 촬영용 비단 옷이 진흙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 아니나 다를까 기겁하며 재빨리 옷을 집어 드는 여주. 진심으로 놀랐는지 어떡해··· 어떡해요?! 하며 흙먼지를 툴툴 털어내긴 했는데, 중요한 건 진흙 자국은 이미 번져서 손쓸 수가 없다는 것.
"···와, 나 사고쳤네. 이거··· 아직 촬영 안 했잖아요, 그쵸...?"
"아··· 네. 맞아요."
여주가 발 동동 구르며 근심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태형이 올려다보는데, 태형은 다른 옷 입으면 되니까 아무렇지 않지만- 그런 여주 반응 보는 맛에 난처한 표정 짓는 중. 배우라서, 태형은 새삼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한 편, 그런 태형에게 완전히 속아넘어간 여주는 그의 옷을 품에 안은 채로 입술만 잘근잘근 깨무는 중.
"···죄송해요, 제가 입고 있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여주 씨가 미안해할 건 없죠···."
"···진짜 어떡하죠? 방법이 없는ㄷ,"
그렇게 방법을 고심하던 와중,(물론 여주만. 태형은 웃음 참기 중이었고.) 어디선가 갑자기 저 멀리서 나타난 작가가 둘을 향해 소리치며 걸어온다.
"두 분-!! 거기서 뭐 하세요?"
"···어, 김 작가님...?"
"맞네요. 여긴 어떻게 아셨지."
제법 외진 곳이라 우리만 아는 줄 알았는데. 태형이가 저 멀리서 가까워지는 실루엣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리다, 여주가 조용하길래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진흙 자국이 묻은 옷을 조심스레 등 뒤로 감추고 있는 그녀가 보이고.
등 뒤에서 작은 두 손으로 꼼지락꼼지락, 어떻게든 잘 숨겨보려 애를 쓰는 것 같길래 여주와 조금의 거리를 두던 태형이 거리를 좁혀 그의 팔이 여주의 어깨에 닿았다. 워낙 체구가 작던 여주였기에, 옷이 다 숨겨질 리 없었지만 태형이가 붙음으로써 옷은 완전히 가려졌고.
마침내, 작가인 수린이 두 사람 앞에 서자- 누가 배우 아니랄까봐 자연스럽게 여유로운 미소 띠는 두 사람.
"두 분, 곧 촬영 아니에요? 왜 여기 계세요-."
"아, 이제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그쵸, 선배님? 여주가 태형을 향해 올려다 보려 고개를 돌리는데, 어느샌가 자기도 모르게 다소 많이 가까워져 있던 태형과의 거리. 놀라서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도 했지만 태형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은 탓에 무사하게 일을 넘겼고···.
아무래도 남녀 단둘이 있는 사실로부터 작가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음을 눈치챈 태형은 늦기 전에 변명을 시전했다.

"잠깐 대사 좀 맞춰봤어요. 시간이··· 이제 가야겠네요."
"두 사람 혹시···?"
수린의 보랏빛 뿔테 안경이 콧대를 타고 내려오는가 싶더니, 검지로 다시 올려주니 제 자리를 찾은 안경. 도수가 제법 되어 보이는 안경알에서는 왜인지 반짝거리는 빛이 났다. 게슴츠레- 뜬 수린의 눈빛과 함께. 마치 무언갈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작가님이···!! 뭘 상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닙니다!"
절대로요. 절대. 물론, 의심이 더 커지기도 전에 여주가 칼 차단해 버렸다.
여름밤
밤은 더 깊어졌고, 도심가가 아닌 지방 쪽에 위치한 곳이라 그런지 탁하지 않은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이 유난히 더 잘 보이는 밤이었다. 그런 와중에 성벽 앞과 궁 앞을 장식하는 중인 조명들.
그 사이, 밤 늦게까지 촬영을 이어가는 중인 배우들. 그리고 여전히 눈이 빠지도록 화면 앞에만 앉아 모니터링 중인 윤기.

"···나이를 먹었나, 밤 되면 눈이 침침하네."
컷! 목소리 가다듬던 윤기가 헤드폰을 내려놓으며 배우들을 향해 소리치면, 몇 군데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와 함께 살짝씩 섞여있는 환호성.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봐요!
물론 그 속에서 갓 촬영을 마친 여주와 태형도 서로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는 중이다.
"수고하셨어요-"
"여주 씨도요-."
태형이 말을 더 덧붙이려 하기도 전에, 어디 갈 곳이 있는지 여주는 쌩- 재빨리 스탭들과 윤기에게 인사를 건네고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게 된 태형은 방금까지 있었던 사람이 사라지니 꽤 허전했는지, 애꿎은 옷소매만 만지작.
"어! 슈퍼스타 김 배우님-"
그렇게 이제 자신도 가야겠다고 마음 먹고 발걸음 옮기려 하면, 태형의 앞을 막아선 윤기 덕에 꼼짝 못하고 그는 이곳에 발이 묶여 버렸다.
"도대체 왜 그렇게 부르는데요."
"어후- 그야 당연히 내 후배가 자랑스러운 배우니까요-"
"난 당신 같은 선배 둔 적 없네요."
픽, 바람 빠지듯 웃은 태형이가 윤기를 지나쳐가자 뒤에서 윤기가 외친다. 오늘 네 스타일리스트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이더라- 사고 쳤냐? 그의 말에 아- 하며 윤기를 향해 뒤돌아보는 태형이고.
"진짜 사고 쳤나 보네."
"음... 그렇죠?"
"뭐야, 무슨 사고."

"한복 협찬 측에서 준 한복, 더럽혀서 못 입었어요-"
그래서 방송국 소품실에서 급하게 구해온 거 입었고. 불현듯 떠오른 아까의 여주 기억에 또 한 번 장난스럽게 웃은 태형. 윤기는 이제야 스타일리스트의 화난 표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을 한 두번 지켜봐온 게 아니라는 듯 이제 가면 또 혼나겠네~ 너스레 떠는 건 덤.
"근데 어째 사고 친 사람치곤 표정이 좋다?"
"아. 그런가?"
좋은 일이 있나 보죠, 뭐. 둘러댄 태형은 내일 뵙겠습니다-! 큰 소리로 소리 치고선 촬영장을 벗어났다. 그것도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름밤

"······피곤하다, 집으로 바로 갑시다. 형."
대기실에서 깔끔하게 메이크업까지 지우고, 환복까지 한 태형은 거의 반쯤 잠겨가는 목소리로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의 매니저에게 말했다. 뒷좌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채우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그의 좌석 옆에 타있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으니···
"···김태형 진짜 너 죽을래?"
"아, 뭐야. 누구세요!"
"누구세요오-? 누구세요?"

"아··· 누나?"
차 안 불빛을 켜기 전까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급한 대로 핸드폰 손전등을 의문의 누군가에게 가까이 비추니 나타나는 친숙한 얼굴. 태형에게는 두려움의 존재, 그 이름하여 김시하. 태형의 친누나이자, 그의 스타일리스트.
운전석에 앉아있는 매니저 형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보지만··· 애써 외면해버리는 매니저의 태도에, 태형이 속으로 'ㅎ...망했네'만 되풀이 중.
"야, 그거··· 와.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와."
"화 좀 가라앉히는 게 어때."
"·········."
"그래. 그건 좀 아니지. 미안."
으휴... 이내 태형에게서 시선을 돌린 시하는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지. 그 한복이 얼마짜리인데··· 심지어 주문 제작인데··· 김태형 몸값보다 비쌀텐데···.
"협찬이라며."
"그래... 협찬. 내가 제조사 측에 굽신 여겨가며 받아낸 협찬."
내가 제조사 설득하는 데만 들인 피땀눈물의 가치가 니 몸값보다 비싸다고!! 질 좋기로 소문난 곳에서 종영까지 한복 받기로 약속했는데... 첫 스타트가 이래서 되겠냐고! 곧 귀가 터질 지경으로 소리 지르는 시하에, 피곤했던 태형이 이젠 그러려니 수긍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난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최면을 걸며.
그렇게 이제 잠이 드나··· 싶었는데, 시하의 입에서 들려오는 여주의 이름. 반사적으로 눈을 뜬 태형이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뭐라고?
"임여주··· 배우분? 아까 나한테 찾아오셨어."
"···그 사람이 왜?"
"너랑 같이 있으면서 자기가 바닥에 떨궜다고··· 미안하다고."
대기실까지 찾아와서 배상금 필요하면 얼마든지 주겠다고, 나보다 더 울상이 되어 왔길래 그냥 괜찮다고 돌려보냈어.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난데. 한숨 푹- 쉬며 시하가 말하자, 촬영 끝나자마자 달려간 곳이 자기 대기실이었다니. 울상이었을 여주 표정을 상상한 태형이가 피식,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웃어?"
"···내가? 아닌데. 우는 중이야."
"말이나 못하면."
그러니까 네가 진작에 간수를 잘했어야지. 애먼 사람 잘못으로 돌리면 어떡해! 태형이 팔뚝 퍽 치며, 시하가 쉬익쉬익거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래. 내가 잘못했네. 하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 태형이가 오늘따라 유독 더 이상하다고 느낀 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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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하는 심각한 반면에 태형은 여주 생각만으로도 웃음 짓게 됐고.
여름밤
애미야. 분량이 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