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10. 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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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오후5시



32

“씻고 와. 수건은 욕실에 있어.”

“석진 씨도요.”

“응”

 

 

말이 끝난 여주는 더 말하지 않고 석진이 방으로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혼자 남자 여주는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그런지 긴장이 이제야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여주는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는 대충 말렸지만 아직 물기가 남아 있어서 수건을 목에 걸친 채였다. 후드와 반팔을 입으니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그 상태로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 끝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석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다 여주를 보고 멈췄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주의 머리로 갔다.

 

 

“여주야. 머리.”

“네?”

“덜 말렸어.”

“아 끝 쪽 덜 말랐나 보네..”

 

 

석진은 말없이 여주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이리 와.”

 

 

석진의 방문에 서있던 여주는 잠깐 망설이다가 석진 쪽으로 다가갔다. 석진은 드라이기를 가져와 콘센트를 꽂고 전원을 켜자 낮은 소음이 조용한 건물 전체를 채웠다.

 

 

“뜨거우면 말해.”

“네.”

 

 

석진은 여주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볍게 나눴다.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을 넣으며 말렸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여주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조금 숙였다.

 

 

“이런 거.”

“응”

“되게 익숙해 보이네요.”

“익숙하진 않아.”

“너무 능숙한데?”

“설명서 읽은 적은 있어.”

“...? 이런 설명서를 어디서 구해요.”

“인터넷.”

“푸하! 뭐에요 그게!-”

 

 

여주는 웃음을 참다가 결국 웃었다. 석진은 그 소리를 듣고 드라이기 바람을 조금 줄였다.

 

 

 

“웃으면 더 안 말라”

“그래요?ㅎㅎ 그럼 조용히 있을게요.”

“...말은 걸어 계속”

 

 

 

 

33

석진은 드라이기를 끄고 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뺐다. 바람 소리가 멎자 갑자기 집 안이 더 조용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여주는 고개를 들고 자연스럽게 손으로 머리 끝을 만졌다. 흠 완전히 빠삭하게 말랐군. 여주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방 안도 복도도 너무 깔끔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요”

 

 

석진이 수건을 접으며 고개를 들었다.

 

 

“응”

“그때 데려간 식물 있잖아요.”

“아.”

“안 보이길래요. 설마…”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지만 표정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석진은 짧게 웃었다.

 

 

“설마는 아니고”

“그럼요?”

“아래층에 있어”

 

 

여주의 눈이 바로 반짝였다.

 

 

“보러 가도 돼요?”

 

 

석진은 잠깐 망설이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주인이니까.”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이번에는 여주가 앞에 섰다. 아까 올라올 때보다 발걸음이 조금 빨랐다. 괜히 들뜬 티를 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폭만 살짝 앞섰다. 석진은 그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층 거실은 이층보다 조금 더 생활감이 있었다. 가구 배치가 여유롭고 창이 넓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쪽에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화분 하나가 있었다.여주는 그걸 보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어....”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화분 안의 식물은 처음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잎 색도 짙어졌고 줄기는 위로 곧게 뻗어 있었다. 관리가 꽤 잘 된 상태였다. 여주는 천천히 다가가 화분 옆에 섰다. 손을 뻗을까 말까 하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잎 끝만 살짝 건드렸다.

 

 

“잘 컸네요? 이쁘다”

“노력 좀 했지”

“되게...”

 

 

석진은 여주 옆에 서서 식물을 같이 내려다봤다. 가까이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어깨가 거의 닿을 만큼의 거리였다.

 

 

“처음엔 솔직히.”

 

 

여주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며칠 안 가 시들면 어쩌나 했어요.”

“나 그렇게 무책임해 보여?”

“그런 뜻은 아니고요! 그냥 바쁜 사람같았어서? ”

 

 

석진은 식물을 보며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신경 썼어.”

“왜요?”

“바쁘기도 했고..너한테서 산 거니까”

 

 

그 말에 여주의 손이 잠깐 멈췄다. 대답은 바로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잎을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이번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 집에.”

“.......”

“내가 아는 게 있다는게 좀 좋네요”

 

 

석진이 고개를 돌려 여주를 봤다. 여주는 여전히 식물을 보고 있었다.

 

 

 

 

34

식물 앞에 서 있던 여주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오늘 하루를 떠올리면 석진이 안 피곤할 리 없었다. 물 새는 집부터 기사 부르는 과정까지. 그리고 지금은 이 집의 조명 아래까지.

 

 

“이제 진짜 들어가서 쉬어요.”

“괜찮아.”

“괜찮다는 말 아까부터 다섯 번째예요.”

“아직 네 번째야.”

“그럼 곧 여섯 번째.”

“석진씨도 얼른 씻고 자야죠.”

 

 

석진은 식물 잎을 한 번 더 보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여주 바로 옆에 너무 자연스럽게 붙어 서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린 것처럼 한 발짝 물러섰다.

 

 

“알겠어.”

 

 

마지못해라는 말투였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진짜로?”

“응. 진짜로 ”

 

 

그 말에 여주는 손을 흔들었다. 석진은 계단 쪽으로 가다가 한 번 더 돌아봤다.

 

 

“너도 얼른 들어가서 불 끄고 자.”

“네네.”

“휴대폰 보지 말”

“집주인 잔소리~”

 

 

석진이 여주의 개구쟁이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계단을 올라가고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여주는 거실에 그대로 서 있었다. 집이 다시 조용해졌다. 조명이 식물 잎 위에만 남아 있었다. 여주는 소파에 앉았다. 몸을 깊게 묻자 그제야 하루가 끝났다는 감각이 왔다. 머릿속이 비어 있었다. 피곤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정신은 또렷했다.

 

이제 방으로 들어가야지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짧고 분명한 알람음이었다. 개인 메시지 알림이었다. 여주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데까지 한 박자 걸렸다.

 

엄마

 

메시지는 길지 않았다.

 

 

내일 시간 돼니
잠깐 얼굴 좀 보자
병원 근처 00카페에서

 

 

여주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 다음에 천천히 내쉬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순간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몸이 먼저 반응했다.

 

부모님과의 연락은 완전히 끊긴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쪽에 가까웠다. 의대를 나와 병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주가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부터였다. 꽃집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그나마 남아 있던 여유마저 사라졌다. 의사 집안에 꽃집이라니 그 한마디에 대화는 바로 싸움이 됐다.

 

왜 굳이 그동안 쌓아온 걸 다 버리냐는 말. 잠깐의 방황일 뿐이라는 단정. 너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냐는 압박. 여주는 그날 처음으로 끝까지 말을 했다.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남들이 보기 좋은 인생 말고 자기 인생을 살겠다고.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집을 나왔다. 가출이나 다름없는 선택이었다.

 

여주는 메시지를 한참 보다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내일 보자는 말은.. 다시 꺼내지 않기로 했던 이야기들을 꺼내자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피할 수는 없었다.

여주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요

 

 

 

 

35

문자를 보내고 여주는 계단을 올라와 이층 복도에 섰다.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간접등만 벽을 따라 낮게 번지고 있었다. 낮에는 단정하다고 느꼈던 공간이 밤이 되자 조용히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발걸음을 옮기다 석진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잘 자라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데..
이미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문을 두드리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로 여주는 한 박자 늦게 숨을 골랐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가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너무 의식하면 괜히 이상해질 것 같아서일부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냥 오늘을 끝내자고 마음속으로 정리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맞은편 방문이 먼저 열렸다.

석진이 나와 있었다. 샤워를 막 끝낸 듯 머리가 아직 덜 말라 있었고 물기가 남은 머리칼이 이마 쪽으로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다. 깔끔한 셔츠 대신 편한 티셔츠 차림이라 낮에 보던 모습보다 훨씬 느슨해 보였다. 집 안에서만 허락된 모습 같았다.

석진은 여주를 보자 잠깐 눈을 깜빡였다. 놀랐다기보다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아주 짧은 시간이 필요한 얼굴이었다.

 

 

“아직 안 잤어?“

“이제 자려고요.“

 

 

석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주가 서 있던 위치에 머물렀다. 딱 자기 방 앞이었다.

 

 

“무슨 일 있어?”

 

 

여주는 잠깐 망설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뭐?”

“무서우면 오라고.”

 

 

석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래서.”

 

 

 여주는 말꼬리를 살짝 늘였다.

 

 

“생각보다 집이 조용하네요. 그리고 오늘 하루가 좀 길어서요.”

 

 

석진은 잠깐 여주를 내려다보다가 낮게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그래서 무서워서 온 거야?”

 

 

여주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음..반은? 맞을지도..”

“그럼 나머지 반은.”

 

 

여주는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석진을 봤다.

 

 

“잘 자라고 말하려고요. 그리고 혹시 진짜 무서우면 어떻게 해야 하나 확인하러.”

“확인 결과는?”

“같이 자야겠네.”

 

 

말을 던진 뒤에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인식한 것처럼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석진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는 작았지만 어깨가 확실히 흔들렸다.

 

 

“하하.. 여주야”

“어어, 네?”

 

 

 

“미치겠다. 너 때문에”

“어..얼른 자요! 잘자요!! 나 갑니다!”

 

 

부끄러 도망가려던 여주의 손목을 붙잡은 석진은 여주를 당겨 머리를 쓰다듬고 귓속말을 했다.

 

 

“잘 자. 그리고.”

“........”

“겁 많다는 거 비밀로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