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 야 넌 왜 맨날 강원도로 술을 마시러 오라..ㄱ 너 울었냐 ? “
” .. 울었으니까 좀 앉아봐요. “
” 헤어.. 진거야 ? “
” .. 헤어진 것도 아니죠. 사귀었던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
“ 대체 왜 ? 아니 누가 먼저 ? ”
” 그 사람이요 .. “
” 뭐 ?!! “
” … ”
역시 주변 사람이 들어도 아주 놀랄 소식인 것 같다. 그렇겠지. 날 그렇게 좋아하고 또 표현했던 사람이 .. 지금은 날 그렇게 밀어내고 있다는 게
당사자인 나도 당장 믿기지가 않는데 저 선배는 얼마나 더 안 믿기겠어.
“ 너 .. 그래서 이렇게 “
” 제정신이면 자꾸 울기만 하니까요. 좀 미치면 웃기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 “
” 김여주 .. “
“ 그러니까 오늘은 좀 나랑 마셔줘요. ”
“ .. 하 그래 알았다. “
그렇게 난 선배와 한 잔씩 계속 기울였고 그렇게 마시다보니 혼자 5병 넘게 마셨다. 선배는 워낙 주량이 센 편이라 괜찮아보였지만 나는 역시나 만취해버리고 말았다.
“ 흐 .. 흐흑 나 진짜 어떡해요 “
” 야 ..! 세상에 남자는 많다. 금방 잊을 수 있을 걸 “
” .. 윤정한 잊는 것도 그렇게 오래 걸리고 그 오랜 시간동안 빠짐없이 아팠는데 “

” .. 그런 윤정한을 그 사람으로 잊을 수 있었다는 게 좀 문제지. ”
“ … ”
그렇다. 내가 그 사람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다시는 물들일 수도, 꾸밀 수도 없을 것 같이 적막하던 내 세계를 그렇게 예쁘게 꾸밀 수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

(( 역시 우린 운명인 것 같습니다. ))
정말로 운명 같았던 사람이라서. 지구 반바퀴를 돌아 다시 만날 정도로 운명인 것 같았던 사람이라 더욱 잊을 수가 없다.
“ 정말 운명이 맞았다면 .. 정말 그런 거였으면 눈 앞에 딱 한 번만 나타나줬으면 좋겠어요 .. ”
“ 김여주 .. ”
또르륵,
” 정말 .. 내 눈 앞에 한 번만 .. 흐 “
” … “
” 한 번만 나타나 제발 .. “
이 한 마디를 끝으로 내 기억은 완전히 끊겨버렸다.
다음날,
” .. 으 머리야 “
눈을 뜨니 집이었고 화장도 지워져있었다. 옷은 그대로인데 .. 그 와중에 피부는 지키고 싶었나보네
나는 빠르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해장을 하러 갔다. 근데 이 선배는 우리 집 아니면 어디서 잔거야 ..?
” 저 여기 선지해장국 하나요 ~ ”
“ 네 ~ ”
어제의 마지막 기억으론 분명 아직 달리고 있었는데 .. 물론 질질 짜고 있긴 했었지만
잠시 후, 해장국이 나왔고 난 더럽혀진 속을 달래고자 국물을 먼저 떴다.
그 순간,
(( 찌개 같은 이 나라 음식입니다 ))
” .. 왜 또 이딴 기억만 ”
우르크에서 함께 해장을 하러 갔던 때가 떠올랐다. 이젠 난 뭘 하던 그 사람 기억 밖에 없구나. 이제는 해장도 못하겠네 진짜
결국 국물만 좀 마시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 모든 일상 속에는 그 사람과의 추억들이 있었고 내 세상이 온통 그 추억들로 가득 차버려 적당히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꿈 속에서 마저도 난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잠에 들면 늘 헤어지던 그 순간이 반복재생처럼 계속 생각났고 눈을 뜨면 온통 눈물 범벅이었다.
정말 병에 걸린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을 듯한 아주 지독한 병이다. 그것도 아주 아픈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지금은 오히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답이다. 생각을 하면 무조건 그 사람 생각 밖에 안 떠오르니까
이런 식으로 난 2주란 시간을 보냈고 정말 바보처럼 그 슬 픔의 고통에 무뎌졌다. 아니 무뎌진 것이라고 스스로 세뇌시켰다. 그래야 병원에 나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 김 선생님 다음 환자 분 들어오십니다. “
” 네 ~ “
환자도 더 억지로 많이 받았고 진료시간도 일부러 늘렸다. 밥도 안 먹어가며 일만 하니 몸무게는 나날이 줄어갔다. 하지만 뭐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사람 생각으로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으니까.
정신적인 고통보다는 차라리 신체적인 고통이 훨 낫다고 생각했다.
이 상사님은 얼마 전 퇴원하셨다. 혹시라도 마주칠 수 있을까 퇴원하시던 날 병실에 계속 있었지만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있을 거란 걸 미리 예상했겠지. 전부터 참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 좋은 머리를 왜 이럴 때도 쓰는지 참 얄미웠다.
” 김 선생님 요새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
” 괜찮아요. 전 병원에서는 이것보다 더 무리해봤어요. “
” 그래도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보세요. “
” ㅎ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
수 간호사님의 열렬한 걱정으로 난 결국 조퇴 조치를 받았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평소 취미도 없었던 나라 갑자기 생겨버린 여유가 꽤나 곤란했다.
쉬라고 해서 일찍 퇴근한거지만 난 그 어느 곳에서도 쉴 수 없다. 그 사람이랑 있을 땐 늘 쉬는 것 같았는데 ..
” 이봐. 또 그 사람 생각 하잖아 “
정말 불치병 같다. 어떤 발악을 해도 고쳐지지가 않는다. 이제는 오히려 다 포기한 상태이다. 뭘 해도 고쳐지지 않으니까.
매번 울고 지쳐 잠들고를 반복하는데 왜 그 사람을 잊지 못할까.
내게 어떤 저주를 퍼붓고 비난을 해도 좋다. 그냥 지금은 그 사람이 너무 보고싶다. 날 미워해도 좋으니 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눈 앞에 .. 제발 ..
그 순간,
핑,
"..!! "
콰당,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삐소리와 함께 난 그 자리에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
스윽,
“ .. 여기는 ”
눈을 떠보니 익숙한 병실이었다. 바로 우리 병원이었던 것이다. 아 .. 나 쓰러졌었지
그때,
드르륵,
” 정신이 좀 듭니까? 나 누군지 기억나요? “
” 네 .. 병원장님이시잖아요. “
” 하 .. CT상 정말 다행히 머리엔 아무 이상 없어요. 어떻게 의사가 길바닥에서 쓰러져서 자기 병원 응급차를 타고 지금 .. “
” .. 죄송합니다. “
” 그런 말 듣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난 .. “
"..?"
“ .. 걱정했습니다. 꽤 ”
“ ..!! 걱정이요 ..? “
병원장님이 내 걱정은 왜 ..? 그렇게 개같이 노동시킬 땐 언제고 ..?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
“ 그래요. 그러니까 앞으로 당직 맡는 거 힘들면 힘들다고 말씀하십쇼. 오늘처럼 이렇게 목숨 걸로 시위하지 마시고요. ”
“ .. 아 네. 유념하겠습니다. “
내가 과로사해서 병원 이미지 안 좋아질 걸 걱정했단 뜻이겠지. 그래 .. 근데 걱정 안해도 되는데 내가 원해서 했던 거니까.
“ 제 짐은 .. ”
“ 아 짐은 아까 보호자 분이 정리하셨습니다. 아마 캐비넷에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보호자분이 안 보이시네요. 아까 엄청 걱정하시고 계셨는데 “
” 제 보호자요 ..? “
내 보호자가 여기에 어디있어 ..? 엄마나 아빠일리는 없고 아 최 선배인가 ..?
“ 그 흑발에 쌍커풀 있는 남자인가요? ”
“ 아니요. 그때 그 사람 말입니다. ”
“ 그 사람 ..? “
”그때 그 군인 분 말입니다. 김 교수한테 떼 쓰던 .. “
” ..!! 뭐라고요 ..? “
” 성함이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데 그 .. ”
그때,
드르륵,
” 아 벌써 회진 시간입니..까 “
“ .. 거짓말 “
” 거짓말이요 ? 저 분이 그때 그 군인 분 맞지 않습니까 ? “
” 아니요 .. 그게 거짓말이라는 게 아니라 “
” … “
” 저 사람이 내 눈 앞에 있는 게 거짓말 같아서요. “
난 조심히 병상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걸어갔고 떨리는 손으로 조심히 그의 뺨을 만져보았다. 혹시라도 또 꿈일지 모르니까. 날 힘들게 했던 그 꿈들일지 모르니까.
하지만 순간 느껴지는 기분 좋은 따뜻함에 몸의 힘이 쭉 풀리는 것 같았다.
” 진짜 .. 진짜잖아 “
” … “
” 진짜 .. 당신이야. ”
주르륵,
스윽,

“ … ”
내가 그토록 보고 싶던 내 운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