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트로피컬 미드나잇

#09_일부러 그래요?

아침에 눈을 뜨자 익숙하게 보인 천장에 허망함을 느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듯 흐릿했고 아득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금방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팔로 눈을 덮었다.

자신을 둔 채 먼저 자리를 뜨던 동현의 모습만 아른거렸다.

그렇다고 사랑하냐 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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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

사랑의 갈증이 만든 거짓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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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아니 그래도. 김동현 그 멍청이는 좋아하면 가지 말라고 내 옆에서 자기 좋아하게 도와주겠다고 좀 해주지.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충 시간을 확인하고는 수두룩하게 밀려있을 문자를 확인하려 카톡에 들어갔다.

기다리는 내용은 없었고 쓸 데 없는 문자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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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옆에 두고서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야 됐는데. 나 잊고 있어, 널 사랑해서 갈게가 뭐니? 전웅 멍청이.

무슨 세기의 사랑을 찍으며 장대한 서사가 펼쳐질 것만 같은 이별을 했지만, 결국 평범한 대한민국 20대 남성들의 멍청한 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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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나는 동현이를 사랑해야 되고, 동현이는 복수를 해야 되며 날 좋아하고. 근데 동현이는 여리니까 상처받았을 거고.

웅이 몸을 일으키고는 이불을 걷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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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난 들이댈 수 있지.

자존심 세다던 사람을 녹이는 건 결국 가장 지독한 감정이었다.

형이랑 밥 먹을랭??

다만 썼다가 지웠다. 그냥 스스로 너무 미친 새끼 같아서.

어제 마지막으로 동현과 주고 받은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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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형, 이제 먼저 들이대면 미친놈 쓰레기인 거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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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알지, 동현이도 멍청이 되지 말고 있어. 금방 다시 보자.'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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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나 좋아하면 그냥 좀 먼저 연락해 주면 안되냐?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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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아니, 나 사랑하겠다며. 그럼 내 옆에 있어야지. 어쩜 오후가 됐는데도 연락 하나 없어!

겨우 12시 1분 된 시점이었다. 동현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폰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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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나 멍청인가? 좋아하지도 않는 놈한테 뭘 바라는 거야. 지금쯤 지 사랑해 줄 좋은 남자 만나서 나는 잊었을 텐데.

한참을 앞서나간 채 머리를 쥐어뜯어 두피가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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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시발 차라리 그냥 미친척하고 잘걸. 그러고서 말할걸.

마음은 못 뺏으니 몸이라도 뺏겠다는 약간의 사악함이 담긴 말을 내뱉으며 이불만 뻥뻥 차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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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어쩜 연락 한 통도 없어? 쓰레기는 되기 싫다 이거야? 사랑이 고작 그거야 전웅?

두 방의 거리는 2층하고도 왼쪽으로 3칸. 이 사이에 끼인 사람이 있다면 숨 막혀 창문에서 뛰어내릴 만큼 서로를 향해 살벌한 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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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하, 나 진짜 오늘은 연락 안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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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김동현 내가 연락 하나 봐라.

.

다른 공간에 있지만 돈 썩히긴 아깝다며 똑같이 생각하고는 바다를 향했다.

서로가 근처에 있음은 알았지만 절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신의 장난을 닮은 우연과 날카롭게 세워진 육감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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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썅, 저 형이 왜 여깄어. 어제 내가 주고 간 옷은 왜 입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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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하, 김동현 마주한 김에 진짜 한 번 도발해 봐?'

겹칠 듯 겹치지 않게 시선을 유지하던 중, 웅이 동현이 건넸던 옷의 지퍼를 내리고 허리에 둘렀다.

까맣게 탄 피부를 지닌 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순두부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그는 근처에 있던 이들의 잔잔한 관심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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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저 정신 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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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더 정 떨어지면 어떡해. 시발 어차피 모 아니면 도야.'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가 바닷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바닷물이 일렁이며 모래가 붕 떠올랐다.

동현의 멘탈도 모래처럼 흐트러지며 위로 붕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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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멍청이 되지 말자 멍청이 되지 말자.

애써 고개를 돌리고 더럽게 맛없던 코코넛 주스만 쪽쪽 빨아댔다.

여기저기서 붙임성 좋은 아메리칸 피플들이 웃으며 칭찬을 보내는 소리가 들렸다. 물에 젖으니 도가 지나칠 정도로.

예뻤다, 물에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넘기는 손마저도 너무나 고왔다.

게다가 섬세하게 박힌 근육들은 시선을 떼기 어려울 만큼 동현을 미치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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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흠, 김동현 나 신경 쓰긴 하는데. 멍청이는 어지간히 되기 싫나 보네.

동현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물을 가르기 시작했다. 동현은 웅이 자신 쪽에서 고개 돌린 것을 보고는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원래 사랑에 빠지면 지겹도록 예리한 촉이 생기지 않는가, 자신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인데 꼭 이상한 기운을 둘러싼 이들이 존재한다.

그저 관광객 6쯤으로 볼 수 있을 한 사라이 유난히 신경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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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아 그니까 옷 좀 입으라고 미친놈이.

코코넛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발이 푹푹 빠져 뛰기 어려운 모래 해변을 무작정 달렸다.

웅을 향해 걸어가는 암흑 덩어리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팔이 저리도록 헤엄을 쳐 웅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평소같이 맑은 눈으로 동현읗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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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전웅. 너 진짜. 진짜 일부러 그래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도망치지 못하게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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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뭐가? 근데 왜 왔어.

특유의 얄미운 표정과 여우 같은 몸짓으로 동현의 기분을 더 망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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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멍청이 되려고요. 개 멍청한 호구 새끼 되려고 왔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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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음, 그래? 형은 쓰레기 되려고 하던 중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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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쓰레기 됐네. 축하해요.

크게 감정이 상한 동현이 물 밖으로 찰방찰방 걸어나갔다. 웅은 눈치 없이 허리에 두른 옷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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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이거 옷 가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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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못으로 살가죽에 박아버리기 전에 곱게 그냥 입어요.

말을 하면서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던 동현이 웅의 한 마디에 붉어진 볼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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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동현아. 나 아무래도 네가 옆에 있어야 널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애완용 인간처럼도 괜찮으니까 옆에 둘래?

사랑에 절은 이는 눈썹을 마구 찡그렸고 사랑을 하지 않는 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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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웅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죽일 듯 싸워도 하루 뒤에 이상한 놈 돼서 화해하는 거잖아.

웅이 천천히 걸어가 손가락을 잡았다. 허약한 앙탈이며 절대 거부할 수 없음을 안 교활한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