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가족

러브 미로 04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습관적으로 물부터 찾았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큰 잔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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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집에 왔으면 손부터 씻어야지.”

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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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가방도 좀 내려놓고.”

여주

“학교⋯ 안 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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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갔다 왔지. 학생회 회의만 없었을 뿐. 나도 물 마시게 잔 좀 줄래?”

예상치 못한 대면이었다. 김석진은 학생회 회장이라 항상 회의로 늦게 들어왔기에. 나는 위로 올라올 것 같은 물을 꾸욱 삼키며 김석진에게 새로운 잔을 건넸다.

여주

“⋯아.”

잔을 건네는 과정에서 김석진의 손과 내 손이 살짝 스쳤다. 아주 미세하게 닿은 것이었지만, 나는 황급히 손을 떼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잔은 김석진의 순발력으로 빠르게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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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누가 보면 내가 더러운 줄 알겠어. 너무 티나게 피하는 거 아니야?”

여주

“⋯죄송합니다.”

나는 김석진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레 김석진의 태도가 살갑게 변한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 태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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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괜찮아. 과외 선생님 오셨을 텐데 얼른 올라가 봐.”

여주

“⋯네.”

나는 김석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바삐 옮겼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무작정 주먹을 날리는 김태형보다 살갑게 웃는 김석진이 더 무서웠다.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내 뒤로, 수돗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흐르는 소리 사이사이 욕설도 간간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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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시발⋯. 더럽게시리⋯. 닿았잖아, 시발⋯.”

내 앞에서 미소 지었던 김석진의 얼굴과 욕설을 내뱉는 김석진의 얼굴이 함께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쾅.

“아, 깜짝이야. 문을 그렇게 세게 닫으면 어떡해, 여주야.”

도망치듯 올라온 방에는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화장을 고치고 있는 과외 선생님이 있었다. 검은 미니스커츠에 어깨를 드러낸 오프숄더, 빨간 립스틱, 그리고 망사 스타킹까지.

여주

“⋯.”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빠르게 뛰던 심장이 갑자기 차분해지고 뜨겁게 달아오르던 볼이 차갑게 식었다. 학교나 집이나, 하나같이 눈에 보이는 뻔하디 뻔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다.

대놓고 다가와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려나. 하. 헛웃음이 나왔다.

“학교 끝나고 놀다 왔어? 웬일로 오늘 좀 늦었어?”

여주

“⋯누구랑 좀 얘기하다가요.”

“누구? 석진이? 남준이? 태형이?”

여주

“⋯.”

“아, 누구! 셋 중에 한 명은 맞지?”

저게 과외하는 학생에 대한 올바른 태도일까. 어느새 수업 준비를 다 하고 마주앉은 내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이미 빨간 입술에 입스틱을 다시 한 번 펴바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니까 학벌 말고 인성도 봐야 한다니까.’

다음 과외 선생님을 구할 때는 꼭 인성도 봐달라고 말해야겠다 마음 먹었다만, 행동으로 실천할 용기는 없었다. 아버지가 일본으로 간 후에 내 학업과 관련된 모든 것은 김남준이 맡았으니까.

여주

“선생님.”

“여주야, 선생님은 잠깐 물 마시러 아래에 좀 갔다올,”

여주

“그대로 나가세요.”

“⋯어?”

여주

“짐도 챙겨서 그대로 나가시라고요.”

더 이상 시간이 뺏기는 건 원하지 않았다. 의자에 꼿꼿하게 앉아 문제를 풀며 시선 하나 주지 않고 말하니, 어이가 없다며 헛웃음을 터트리는 과외 선생님, 아니 지나가던 행인1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주야, 나만한 사람 구하기 힘들어. 잘 알면서 왜 그래? 나 한국대 경영학과 다니는 사람이야.”

여주

“네. 배웅은 안 해 드려도 되죠? 안녕히 가세요.”

“야!!!!”

분에 이기지 못한 여자가 씩씩대며 내게 다가왔을 때였다. 자기가 들어온다는 걸 티내는 듯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노크 소리도 없이 방 문이 벌컥 열렸다.

“야. 내 전화 존나 씹으니까 맛있냐?”

김태형이었다.

이제 하얀 필터가 사라졌네요? 눈 개안한 듯… 깔끔해서 너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