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진짜 많이
민들레《17화》


1926년


김동현
후우........

김동현
웅이가 떠난지 어느덧 4년이 되었다

김동현
그동안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김동현
민족을 위해 싸운 일........

김동현
그 일을 하느냐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다

김동현
그런 와중에도 항상 그 아이는 생각이 난다........

김동현
슬프게도.......



박우진
...........


김동현
왜?


박우진
황제께서......승하하셨다


김동현
ㅁ.....뭐........?


김동현
승하하셨다고.......?


박우진
국왕의 장례식날 만세운동을 할 생각인가봐


김동현
그게 언제야?


박우진
6월 10일


김동현
알겠어

우진이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박우진
웅이형....... 아직...... 못....잊겠어?


김동현
............


김동현
과연 내가 잊을 수 있을까?ㅎ


김동현
준비나 하자


박우진
응........

1926.06.10


김동현
이번에도 많이 왔네.......


박우진
그러게


이대휘
진짜......많이 왔네요

그리고 어김없이 일본군이 무력으로 제압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대한 독립 만세!''


김동현
이번엔 학생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박우진
그러게.......


이대휘
어린 나이에 다들 대단한거 같아요

''대한독립만세!''


김동현
대한 독립 만세!


박우진
대한 독립 만세


이대휘
대한독립 만세!


순사
[일본어로] 잡아!!!!

퍽퍽퍽

결국 사람들에 밀려서 우진이와 대휘, 동현은 떨어졌다


이대휘
형!


김동현
이따가 봐!


혼자 떨어진 동현의 뒤를 누군가 쳤다

퍽


김동현
윽

무방비한 상태로 당한 동현이는 힘없이 쓰러졌다

촥

누군가 동현이에게 물을 뿌렸다


김동현
윽.........

그리고 동현이가 깨어났다


유타
[일본어로] 너지? 전웅이 좋아하는 애가


김동현
[쿵]

동현이는 자신의 심장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유타
[일본어로] 맞지?


김동현
[일본어로] 살아.....있어?


유타
[일본어로] 뭐야.....?


유타
[일본어로] 그것도 몰라?


유타
[일본어로] ㅋ


유타
[일본어로] 죽었어


김동현
[철렁]

동현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었다

그런 동현이어 모습을 비웃은 다음에 유타가 나갔다

쿵


김동현
ㅇ......웅......웅이........

패닉에 빠진 동현이를 누군가 흔들었다


유태양
이보세요!!


김동현
네.....?


유태양
정신차리세요


김동현
웅이......웅이가 ㅈ....죽었데요.......


유태양
아직 안 죽었습니다


유태양
전투에도 나가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죽습니까?


김동현
다행이네요

그리고 태양이가 동현이에게 쪽지를 건냈다


김동현
뭡니까?


유태양
외어야지 삽니다


유태양
동현씨도 사령관님도

동현이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쪽지를 받았다


김동현
언제.....입니까?


유태양
벌써 파악하셨군요?


유태양
연극 날짜는 내일입니다


김종현
건내주고 왔습니까?


유태양
네


김종현
하..........


김종현
감사합니다........


유태양
꼭 성공하길 바라겠습니다.......


김종현
네


유태양
준비하신건 어떻게 됬습니까?


김종현
완벽하게 준비해두었습니다


유태양
많이 소중한 사람인가봅니다


유태양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고.......


김종현
네


김종현
많이 소중한 사람이고


김종현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김종현
ㅎ


김종현
이제서야 제대로 형 노릇을 하네요........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온 학생들의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학생운동이 결집된 소산으로 나타난 항일운동이었다

그래서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담당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다.

제위에 오른 지 4년 만인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자조와 실의 속에 살다가 1926년 4월 26일 죽은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에 대한 전국민의 애도는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언비어와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심지어 육해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부산과 인천에 함대를 정박시켜 놓기까지 하였다.

이에 군중들도 합세하여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학생 중 취조받은 자가 106명, 수감된 자가 53명이었으나, 어느 정도 시위가 가라앉자 이들 대부분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11명은 제령 제7호와 출판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그 해 11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