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19 사랑


***

김희연의 말을 듣고 거의 미동도 없이 절망스런 표정을 지은 채 정한은 고개를 떨군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

자신의 죽음이 아닌 여주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지.

그저 계약 관계일 뿐인 그녀와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것인지 정한 본인도 의문이다.

한 여자의 죽음이 이렇게까지 두렵고 슬프고 화날 줄은 몰랐다.

이제서야 그는 이것이 사랑인 것인가를 의심한다.

곧 있으면 서로 못 보게 될 텐데.

이제 와서야 사랑이란 걸 의심한다.

너무 늦었는데도.


윤정한
나를 죽이는 건 상관없어.


윤정한
어차피 죄를 많이 진 몸이라 누군가한테는 죽어야 하거든.


윤정한
근데 여주 씨는 안 돼.

김희연은 풉, 소리를 내며 비웃는다.


김희연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봐?


김희연
웃기네.


윤정한
정…이라기 보다는


윤정한
사랑인 것 같은데.

김희연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그리곤 큰소리를 내 웃음을 터트린다.

누가 봐도 이건 비웃음이다.

네 주제에 무슨 사랑을 해? 라는 의미가 담긴.


김희연
그래서 사랑하는 너희 둘이 같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게 해 주겠다잖아. 응?


김희연
그럼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개소리 집어치우라는 말을 당장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정한은 그러지 못 했다.

이젠 여주만은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니까.

자존심이고 뭐고 원한이고 뭐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은 살려야 하니까.

사랑이란 대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일까.

영원한 게 아닌데도.


윤정한
…여주 씨는 살려주면 안 돼?

김희연은 코웃음을 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희연
아쉽게도 나는 여주를 사랑하지 않아서 안 될 것 같은데.


김희연
사랑하는 네가 잘 해 봐~


윤정한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닌 걸 보니까 살릴 수는 있나 보네?

김희연은 정곡을 찔린 듯 당황한다.


윤정한
내가 뭐든 할 테니까 여주 씨는 살려줘.

정한은 경호원 두 명에게 붙잡힌 채로 고개를 숙인다.


윤정한
이렇게… 부탁할게……

고개 숙인 그는 남몰래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원수이기도 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부탁을 하다니.

게다가 뭐든 하겠다고 말을 하다니.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김희연
뭐든 하겠다고?


김희연
그거 좋네.

김희연의 눈빛이 미치광이처럼 빛났다.

그녀는 서랍에서 어떠한 서류들을 꺼낸 후 탁자에 올려놨다.


윤정한
뭐야, 이 서류들은…


김희연
너랑 망할 네 친구들 덕분에 도망쳤던 실험체들이야.


김희연
그래도 다행히 그때 처리했던 애들이 많았더라고?


김희연
근데 너희처럼 쥐새끼같이 잘 빠져나간 애들이 자꾸 우리 실험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거야.


김희연
그 기사들 다 막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김희연
그래서 지금 다 찾아내서 죽이고 있어.


윤정한
…정말 당신은 미친 사람이야.

김희연은 생긋 웃는다.


김희연
칭찬 고마워?


김희연
여하튼.


김희연
이쯤이면 아마 짐작이 올 거야.


윤정한
설마…


김희연
응, 네가 남은 애들을 찾아서 죽이면 돼.


김희연
참고로 남은 애들은 네 친구들뿐이야.


김희연
그 애들 시체까지 내 앞에 데려와야 한다?

정한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를 쳐다본다.

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김희연
하기 싫음 말고.

지금까지 미소만 지었던 그녀가 정색을 하며 실험체들의 정보가 담긴 서류들을 서랍에 집어넣는다.


김희연
그럼 네가 사랑하는 걔는 뭐… 못 사는 거고.


윤정한
…할게.


윤정한
하면 되잖아.

불안함에 여전히 흔들리는 동공 속에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김희연이 보인다.


김희연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