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아고물
1화


여주의 아버지는 사업을 했다.

일은 잘 풀리고 사업의 크기는 커졌다. 그리고 망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여주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세상을 뜨자마자 여주는 길거리에 내려앉을 위기에 처했고, 활발했던 여주는 점차 말을 잃었다.

백현은 그런 여주의 옆집에 살았다.

지금은 고등학생인 여주를 중학생 시절부터 봐왔던 백현에게 여주는 친한 옆집 동생이었다.

혼자 살았던 백현은 패닉에 빠진 여주를 보며 고민하다 말했다.


백현
..우리 집으로 와.

여주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학교에서도 친한 친구가 별로 없었고, 친인척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여주는 백현의 집으로 들어갔다.

백현의 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여주는 서서히 활기를 되찾았다.

다시 활발해진 여주는 백현을 귀찮게 하는 데에 선수였다.

여주
아저씨 뭐해요?


백현
..일.

여주
와.. 영어 짱 많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백현의 옆에 자리잡은 여주가 화면에 빼곡히 자리잡은 영어들에 혀를 내둘렀다.

그냥도 글 쓰는 건 힘든데 어떻게 영어로 글을 쓰지? 연신 감탄하는 여주에 백현은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백현
들어가서 공부나 해.

여주
싫어요. 전 그냥 바로 취직할래요.


백현
공부를 해야 취직을 하지.

여주
히잉..

백현의 말에 여주는 결국 터덜터덜 제 방으로 향했다.

널찍한 방에 몇 안 되는 가구들은 백현의 취향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침대에 드러눕자 얼마 안 가 잠이 밀려왔다.

꽤나 성공한 젊은 CEO였던 백현은 회사 일로 집을 오래, 자주 비웠다.

덕분에 여주가 혼자 있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오늘도 아저씨는 늦나..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던 여주는 멍하니 하얀 벽지만 바라봤다.

그때였다. 도어락의 잠금을 푸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여주
아저씨????


???
아닌데.

여주
........

당연히 백현일거라고 생각하고 달렸건만 여주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백현이 아니었다.

잘 차려입은 여자. 낯선 여자였다.

여주
누구세요?


???
나? 백현이 애인.

여주
네...?


???
이름은 한여은.

여은은 멘탈이 나간 여주를 지나쳐 거실로 들어섰다.

능숙하게 옷걸이에 걸치고 있던 옷을 건 여은은 여전히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여주에 피식 웃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진한 이목구비에 키 큰 사람이 취향이었던 건가..? 그럼 나는 틀린 거야..? 여은은 그런 여주의 반응이 재밌어서 괜히 더 심술을 부린다.


한여은
아 백현이가 호텔로 오라고 했었나.. 아닌가? 집이 맞나..

여주
....ㅇㅁㅇ!!

여주는 이제 거의 울 지경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백현이 나타났다. 그런 백현에 여은은 순식간에 달려가선,


한여은
자기~~~~♡


백현
뭐래. 미쳤냐?

백현은 여은을 단칼에 밀어냈다.

뭐야, 애인이 아니었어..? 여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백현
박찬열이 네가 걔한테 질린 것 같다고 질질 짜던데 왜 여기있어.


한여은
아. 차녀리? 밀당 중이야~~ 오늘은 너한테 줄 거 있어서 왔고. 저번 여행에서 사온 거야.


백현
그냥 사람 보내지.


한여은
정 없게 그럴래?

백현은 어이가 없었다.

여은은 찬열과 연애 중이고, 꽤 유명한 게임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여주가 또 괜히 이상한 오해를 했겠구만. 백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여주
아저씨 애인 아니에요...?


백현
절대 아냐.

여주
....!!

누가 봐도 티가 나게 기뻐하는 여주에 지켜보던 여은의 입꼬리가 흥미롭다는 듯 올라갔다.

저녁 준비를 위해 여주는 부엌에 가 있었고, 거실에는 백현과 여은이 남아 있었다.

여은은 백현에게 장난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슬쩍,


한여은
야. 저 고딩이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백현
뭔소리야.


한여은
왜. 예쁘고 귀엽구만.


백현
미친놈. 쟤가 몇 살인 줄 알아?

여주가 싫은 게 아니었다. 단지 여주가 너무 어렸을 적부터 여주를 봐와서 별다른 감정이 안 드는 것 뿐.

백현에게 여주는 그저 귀여운 옆집 고딩이었다.


백현
(쟤랑 어떻게 연애를 해. 말도 안 돼..)

백현은 고개를 저었다.


한여은
흐음.. 그래?


백현
어. 그럴 일 없어.


한여은
근데 쟤는 꿈이 뭐야? 공부는 잘 해?


백현
글쎄. 확실한 건 공부는 못 해. 그림은 좀 그리던데.

여주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걸 아는 이유는, 여주가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백현에게 그림을 보여줬기 떄문이었다.

그림을 잘 그려? 여은이 잘 됐다는 듯 미소 짓자 백현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백현
야, 너 설마..


한여은
얘! 네 그림 좀 볼 수 있을까?

여주
...네..?

갑작스런 여은의 외침에 부엌에 있던 여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거실에 닿았다.

다른 건 아니고, 내가 작은 게임 회사를 하나 하는데 이번에 신작을 준비 중이거든. 네 그림 좀 보여주라. 응?

여주
어..어....

여주는 망설이다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두꺼운 노트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여은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여은
네 그림 너무 독특하고 귀엽다. 어쩜 이래?

여주
..아 감사합니다!

어느덧 여은에게 가졌던 적대심은 다 풀려버린 여주가 여은에 계속되는 칭찬에 헤실헤실 웃었다.


백현
지랄 났네..

백현은 그런 둘을 아니꼬운 눈으로 관망했다.


한여은
너, 언니랑 일할래?

여주
ㅇㅁㅇ...정말요?


한여은
그래. 언니랑 일하자. 언니가 돈도 주고 사랑도 줄게.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은은 잔뜩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백현
야. 왜 내 허락은 안 받는데? 평소엔 늦게 자는 것도 내 허락 받더니.

여주
아.. 맞다. 아저씨. 저 언니랑 일해도 돼요?


백현
언제 봤다고 언니 언니... 맘대로 해.

여주
결국 허락해 줄 거면서 괜히 그래 ㅡㅡ...

여주가 툴툴거리자 백현은 눈을 흘겼다.

안 그래도 앞 날이 막막했던 여주였는데 이게 웬 행운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