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믄 안된다 안카나!

1. 결혼했수다.

화창한 어느 아침.

누군가가 미리 열어놓은 창문으로 햇살이 들이친다.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침실.

간간히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쁘게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그리고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여주의 코골이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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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아우..아니야아..아냐,최승처얼...

무슨 꿈을 꾸는건지, 오늘따라 잠꼬대가 소란스럽다.

여주는 그로부터 한참을 뒤척거리고,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꿈 속 누군가와 장렬한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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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등신...그 나이 먹구...히히..

그리고 마침내 본인이 이겼는지, 여주는 만족스레 웃었다.

그리고 반짝 떠지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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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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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아, 꿈이구나.

여주는 졸린 눈을 부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도 모처럼 푹 자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아침인가! 여주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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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아, 근데 얘는 아침 댓바람부터 어딜 간기가...

그러다 문득, 텅 빈 침대 옆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늦잠이라면 밥 먹듯 하던 놈인데...

여주는 휴대폰을 찾아들었다. 승철에게 전화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정신이 나간게 아니라면 아침 8시에, 그것도 일요일 아침부터 어딜 나갈 사람은 아니었다. 승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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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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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아이씨...와 안 받는데...

길어지는 통화 연결음에 여주는 그만 그 전화 마저도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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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그래, 뭐 어디 가가 뒤지기라도 했겠노...

여주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거리던 여주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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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오늘 진짜 일요일 맞나?

사실 오늘을 일요일이라고 치기엔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긴 했다.

항상 토요일에 밤새 노는 자신이 일찍 기상한 것부터가 이상했고,

주말 아침 치고 소란스러운 창 밖이 수상쩍었으며,

무엇보다 항상 침대 머리맡 협탁에 올려두던 승철의 차키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주는 다시 휴대폰을 켜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휴대폰 잠금 화면엔 반듯한 서체의 폰트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9:39 | 10월 3일 월요일

월요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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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씨발!

욕 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여주는 곧장 화장실로 튀어가 씻기 시작했다.

화장은 평소에도 짙게 하지 않는 편이니 썬크림과 립밤 정도만 바르고 머리 또한 대충 묶었다.

옷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너무 후즐근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챙겨입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다행이 지하철은 금방 도착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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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잠시만, 지나가요...죄송합니다-

벌써 열시가 다 되어가는 지하철은 결코 한산하지 않았다.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에 겨우 몸을 싣고, 여주는 물밀듯 밀려오는 자괴감에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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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내가 미쳤지, 미쳤어...이번엔 진짜 안 찔리는게 다행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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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최승철이 고 머시마한테 또 깨지겠구마이...

정말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럴 여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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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저 내려요! 잠시만요, 지나갑니다아-

죽기 싫으면 달려야 했다.

그리고 여주는 지금 딱 죽을 위기였다.

서울 근교의 한 회사 사무실.

그곳에선 한창 오전 미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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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흐억,헉...허억...늦어서...헉, 늦어서 죄송합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여주가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마침 열시에 잡힌 미팅을 알리는 알람음이 울렸다.

그렇다. 지금은 정확히 열시였다. 여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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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다들 미팅 참석하시죠.

그제서야 이동하는 팀원들.

여주만 어쩔줄 모르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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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여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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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아, 네!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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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저랑 같이 얘기 좀 할까요?

빙그레 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소름 끼쳤다.

여주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도 위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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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그래 뭐, 와 늦었노? 변명이라도 해 봐라, 내 들어는 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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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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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할 말 읎제?

단순히 할말이 없는 것을 떠나, 지금 지신이 마주하고 있는 승철은 여니껏 자신이 알고 있던 승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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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니 몇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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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스물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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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근데 와 아직도 혼자 못일어나는데. 니가 얼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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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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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얼라가 아니믄, 초딩이가? 그래서 맨날 내가 깨워야 일어나고 그러는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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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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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그럼 뭔데!

(쾅-)

여주가 몸을 크게 움찔거리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래, 지금 승철은 여주가 알고 지내던 승철이 아니었다.

잠 많고 장난스런 최승철이 아니라,

마케팅팀 팀장 최승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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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박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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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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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대답 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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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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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하......

땅이 꺼져라 쉬는 한숨에 여주의 고개도 점차 숙여졌다.

고개를 숙이니 그와 눈을 맞출 필요가 없어졌고, 그가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나왔다.

지금 상황에선 억울하고 슬픈게 정상이었지만...그래도 눈물이 나는건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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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니 지금 몇신줄은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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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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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너 일어났을땐 몇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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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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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아주 푹 주무셨네?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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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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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야, 니 인제 대리다. 인턴 아니고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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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뭐 인턴이라고 봐줄것도 아니었지만서도... 그래도 인제 대리 달았으면 그 값은 해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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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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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니 얼라 아니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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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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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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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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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그래, 가서 일 봐라.

잘버텼다. 그래도.

자리로 돌아와 앉은 여주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소리는 몇번 지르지도 않았고, 평소보다 금방 끝나기도 했다.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며, 여주는 애써 웃음지었다.

오래 기억해봤자 기분 좋을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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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어휴, 그래! 자꾸 생각해서 뭐하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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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빨리 끝내고 밥이나 먹으러가야제...

의자를 당겨 앉으며 여주는 작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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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주

-...금마 좋아하는거라도 사들고 찾아가야 하나...

여주는 승철의 화를 풀어줄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제 시간 안에 맡은 일을 다 끝마치지 못하면 야근은 따 놓은 당상이었고, 그렇게 되면 화해는 물 건너갈 것이다.

여주는 주먹을 불끈 쥐며 남모를 다짐을 했다.

그게 곧 다가올 승철과의 점심 시간을 위한 마음의 준비인지,

한심한 본인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마음인지

알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