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관전중
악녀라고 해서


나는 만족스럽게 열심히 정원을 돌아 뒷문으로 유토피아로 들어갔다.

그리고 순간 엄청 큰 사실을 자각해버렸다.

이런 젠장, 2학기에 와버렸네!

김태형과 전정국, 민윤기는 내 이름을 몰라서 망정이지. 아니, 한예화라는 인간이 있었는지도 몰라서 망정이지.

만약 알았다면 000 인생 존망이요. 유토피아 퇴출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숙사로 올라갔다.

참, 이곳은 세 군데의 기숙사를 가진 학교이다

왜 세 개나 되냐고? 학교가 존나게 크니까.

…실제로 빙의글 속에도 이렇게 적었었다. 뭘 어떡해, 존나게 큰데.

세 기숙사의 이름은 각각 「레임」, 「리플럽」, 「플러번」이다.

「레임」에는 도도하고 우아하고, 말이 적은 차가운 도시 마법사 스타일 마법사들이 들어간다.

「리플럽」에는 흥미 넘치고 교활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마법사들이 들어간다.

「플러번」에는 말이 많고 사교성 좋은 친절한 마법사들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한예화는 당연히 레임이지.

나는 내 말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레임」이라고 쓰여진 카드를 받아 들었다.

혹시 모르니, 방학이 끝날 때까지는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서 여기의 교과서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 공부도 해둬야겠다.

한예화 방 룸메이트가 누구였지, 미래에 도와준다는 설정을 가진 애였는데.

아, 거. 누구냐. 내가 썼는데 왜 기억이 안 나냐.

역시 금붕어 대가리 000, 지능은 그대로군.

나는 그대로 기숙사 방에 들어갔다.

미친, 미친, 미친 미친 미친!

기숙사 방이! 존나 넓고 존나!

나는 그 글을 쓸 때 기숙사 방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했었다.

고작 두 명이서 지내는 곳인데도 모든 시설이 다 갖추어져 있고, 천상에서 잠을 자는 듯 부드러운 이불은 자신 스스로를 빨래한다고.

방마다 그 주인에 맞추어 스스로의 색을 변화시키는데, 우리 방은 은색과 검은색, 민트색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아니, 방 주인이 뱀이여? 한예화가 이런 색 배치를 아주 좋아하네? 아 유 슬리데린? 그리핀도르!

아무튼, 나는 침대에 누워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한예화의 침대는 이 층 침대였다.

이 층 침대인데도 상당히 넓은 규모였다. 뒹굴뒹굴 정도는 가능할 듯한.

그러니까 이걸 뭐라 그러지, 더블 사이즈? 퀸 사이즈?

아무튼 그 정도의 넓이였다.

나는 「한예화」라고 금색으로 새겨져 있는 검은색 캐리어를 침대 위에서 열어,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근데 얘 글씨체 진짜 예쁘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소설책들과, 교복으로 보이는 검은 셔츠의 옷 세트 두 벌, 필통과 정말 실로 어마무시하게 많은 필기구에.

한예화의 이미지에 딱 맞는 무지하게 큰 가방이 있었다. 검은색에, 아무 장식이 없고, 칸은 무려 세 칸이나 있다. 맙소사.

이걸 들고 다니면 학창시절 문방구 학생으로 이름을 날리겠구먼?

나는 그 가방에 대체 뭘 넣고 다니는 것인지 알기 위해 캐리어 아랫 칸을 뒤졌다.


한예화
아아니, 미친!

엄청난 양의 무기들이 쏟아진다. 대체 이걸 캐리어에 넣고 어떻게 기어나온 거지 싶을 정도로.

단검은 기본이고 접히는 칼에, 주사기들 몇 개와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 병.

미니 톱과 철 망치, 휴대하기 쉬운 전기충격기에다가 이건… 세상에, 미술 하다가 손가락 잘라먹을 수도 있다는 위험물체 일 위 아트나이프?

이런 미친? 한예화는 무기 중독자였나 보다.

그야 한예화가 설명으로만 「눈이 멀 듯한 미녀에, 속은 악독하기 그지 없는 까마귀같은 열여덟 소녀」같은 식으로 묘사되어있는 데다가 실제로 등장한 적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긴 하지.


한예화
한예화가 좋아하는 소설책들은 뭐지?

나는 책들을 쳐다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이런 시발 이게 뭐야? 이천년대 인소 감성인가, 한예화?

제목들은 하나같이 《그녀와 뱀파이어》라느니, 《나의 전생이, 일진의 아내?》라느니…

아니, 심지어 《세계 서열 0위인 남자친구를 뒀습니다》에다가 《사랑하니까아》?

이건 뭐… 내 초등학교 시절 같구만. 응.

나는 그 중에서 양장본의 두꺼운 책을 찾았다.

펼쳤더니, 일기장이었다.

이야싸! 한예화의 성격을 알아보는 시간이 있다!


한예화
푸른달 이레.

말도 참 이쁘게 하네, 한예화 요 녀석.

오 월을 푸른달이라고 하는 사람 현실에서 처음 본다.

따지고 보면 여기도 현실이 아닌가? 아무튼.


한예화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연금술 시간에 칭찬을 받았다.


한예화
내 능력의 전혀 반댓상황인데. 이걸 어떻게 칭찬을 받았지.


한예화
나 자신이 너무 신기하다.

뭐지? 한예화의 자존감이 이렇게 극악이라고?

예쁘다고 칭찬받는 설정이라 콧대가 존나 높을 줄 알았는데?


한예화
푸른달 열사흘.


한예화
박지민이 방학 때에는 함께 놀이공원에 가자고 했다.


한예화
난 그러지 못한다고 했다. 마쳐야 할 작업이 있으니까.


한예화
지금 상당히 삐져 있는 거 같다. 지금 건드리면 터질지도.


한예화
차라리 터트릴까?

그래, 맞아. 박지민!

박지민이 뭐시야, 그, 그거였어! 범인이었어! 한예화 방 룸메이트였어!


한예화
그래도 겨울방학이 시작하면 같이 가자고 했다.


한예화
같이 첫 눈도 맞고, 겨울 바다도 보러 가자고 했다.


한예화
내가 곧 죽어도 가을까지 이 작업을 마치겠다고 설득했다.


한예화
그제서야 지민이가 웃는다. 설득은 힘든 일이다.

…한예화가 누굴 설득한다고? 말도 안 돼.

하기야, 악녀라고 모두에게 나쁘기만 하진 않겠지.

뭔데 이 다음 페이지는 이렇게 얼룩이 져 있냐. 다 구겨졌네. 읽어 볼까나.


한예화
푸른달 서른날.


한예화
박지민이 밤중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다음 날 물건을 훔쳤다고 적발되었다.


한예화
분명하다. 「?」가 그를 조작했다.

아니, 미친. 이게 번지냐. 하필이면.


한예화
「?」는 우리가 벌이는 일을 다 알고 있음이 확실해졌다.


한예화
어쩔 수 없다. 지민이를 돕기 위해서면.


한예화
추호도 「?」가 뿌리는 얕은 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한예화
난 이렇게 해서라도 나쁜 사람인 척 해야 한다.


한예화
끝까지.


한예화
박지민, 너만은 나를 돕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