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관전중
이데아 (IDEA: 理想)


사나는 녹음기가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소리를 저장하고 그것을 낼 수 있는 기계라는 점을 설명하자 비슷한 것이 있다며 활짝 웃었다.

그것은 바로, 정말 현실에서는 죽어도 보지 못할 마법의 소라고둥!

아, 아니, 귀 달린 소라다.

철로 만든 정교한 소라에 마법의 힘 1 % 만 불어넣어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귀 달린 소라는 녹음도 되고, 스피커 기능도 있는 삼삐전자 급의 기술력을 지니고 있다고 함.

무튼. 그걸 내일까지 찾아 오겠다는 사나의 약속도 들었으니, 나는 이제 이여주를 어떻게 불러낼지만 연구하면 된다.

사실 이여주를 못 본 지도 어언 몇 년 된 것 같다. ……그것까지는 아닌가? 근데 실제로는 좀 비슷.


한예화
어휴. 내가 뭐라는 거냐.

개고생을 했더니 헛소리가 절로 나오네. 아이구, 삭신이야아.

화를 풀기 위해 천천히 발을 플러번 쪽으로 들였다. 이왕이면 이대휘라도 마주쳐서 기운이 좀 났으면.


한예화
……왜?

그래, 뭐 알고 있었어. 보통 여주가 이렇게 힘을 내려고 하는 순간에 악역이 나타나서는 여차저차 쿠당탕! 뭐 그러는 거지.

그건 클리셰라기보다는 예언에 가깝다. 클리셰는 깰 수도 있는 건데 이건 완전 딱딱 들어맞으니까.


예수비
네가, 네가 어떻게.

근데 이건 시발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냐고!

플러번 쪽으로 들어온 김에 겸사겸사 지은이 방도 찾고 있었는데…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예수비 때문에 기겁을 했다.

악역들에게 선한 인상 만들면 괜히 나중에 내 편을 들 수도 있으니 최대한 무시할 참이었지만, 저 새끼는 다르다.

분명 아체스타 그 기지배와 함께 박지민 하나 때문에 나를 괴롭혔겠다?


예수비
미안. 지나가, 지나가 줘!

게다가 예수비는 한 손에 이상한 물건을 들고 등뒤로 숨기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냥 가냐고!


한예화
예수비.


한예화
너 손 안에 뭐야?!


예수비
무,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없어!

예수비는 고개를 저으며 팔에 힘을 주고 안 빼려고 했다. 네가 그렇게 나오시겠다?

악역은 못 참지. 그거 안 내놓고서는 절대 못 지나가게 해 주겠어!


한예화
그래, 뭐. 됐어.

나는 괜히 지은이의 방을 찾는 척 어깨를 으쓱하고 뒤로 돌아갔다. 예수비는 나를 경계하면서 팔을 내렸다.

지금이다!


한예화
있잖아!

나는 예수비의 손에서 두꺼운 종이 뭉탱이를 뺏어들었다. 예수비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쓰러졌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이게 대체 뭐길래……


한예화
……이거,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클립으로 집힌 A4용지 무더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게 유토피아에 있을 리 없다. 클립부터 용지까지 전부.

게다가 그 용지에 적혀 있는 것들은.


한예화
이거, 이건, 이걸 어떻게!

나와의 마법학교.

그것도 딱 57 화, 그 한 화를 복붙해서 프린트되어 있었다. 왜, 어떻게?


한예화
이걸, 이걸 니가 왜 가지고 있는데! 니가 왜.


예수비
난, 꺄악! 무슨 소리야! 나는 전달을 명령받았을 뿐이야!

내가 예수비에게 다가가자 예수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나를 밀쳤다. 나를 밀치든 말든, 정신이 없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어떻게 이걸?

제본한 적도 한 번 없는데. 어떻게 이걸!


한예화
누가 명령했는데?


예수비
……그건.


한예화
누가 명령했냐고, 씨발!


한예화
강다다야? 아니면, 이여주?

말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여주가 여기가 빙의글 속이라는 걸 어떻게 알겠냐고! 그렇게 개같은 과거가 있는데……

예수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뭔가 말할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동안 나는 프린트된 글의 내용을 읽어보고 있었다. 글은. 와……

다섯 장 전체에서 정말 세상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아니, 뭐지? 이 편을 왜 프린트했을까? 등장인물간의 달달한 연애도 없고, 악역이 나타나서는 주인공을 견제하는 장면도 없고, 심지어 새로운 남자 주인공이 나타나는 화도 아니다.

그냥 착하고 선한 여주가 수업하다가 물건을 쏟아서 치우려고 나가는 내용이 끝이다.

물론 쓴 건 더 있지! 있는데, 중심 내용이 저거밖에 없다는 뜻이다. 취향이 이상한 사람인가?


한예화
야.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소설 안 세상에, 소설의 본래 내용이 있냐 이거지. 말이 되나?


예수비
……이야.


한예화
아 제발 니네는 말을 좀 크게 해!


예수비
김, 김석진이!

아니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여기저기 날뛰면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이여, 무슨 홍길동인?!

쫓아가기도 벅차네!

나는 김석진을 찾기 위해 리플럽 쪽으로 달렸다. 지금 힐링이 무슨 상관이여, 평생 힐링 못 하게 생긴 판국에!


한예화
아씨, 어디 있는 거야……

나는 김석진을 찾아 헤맸다. 어쩌면 이유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왜 내가 여기에 왔는지, 왜 걔는 그 몸 그대로 온 건지. 왜 내가 이 세계를 썼다고 말했는데 이여주를 망가뜨리는 거냐고 물었는지.

전부 다!


한예화
어디, 어디 있는 거야.


한예화
아!

순간 발끝이 찌릿해서 비틀거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시발, 뭔, 뭐지? 왜 갑자기 아프지. 천천히 서 있던 곳을 흘겨보자…

그곳에는 수많은 유리조각들이 퍼져 있었다. 딱 그 가운데를 내가 밟았고. 유리조각은 정확히 사람 발 두 개만 들어갈 크기 정도 퍼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노린 것처럼 유리조각이 깨져 있을 수가 있나?! 다른 곳에 떨어져 있을 수도 있었잖아!

나는 나의 가공할 여주인공력에 기겁을 했다. 이제는 거의 적응한 거칠게 베인 상처가 가득 생긴 발을 보는데, 조각이 뭔가 익숙하다.

……이거 설마, 비커?


한예화
강다다?

고개를 들자, 강다다가 있었다. 아니 얘는 왜 내가 김석진 찾을 때만 튀어나오고 지랄?

일단 이렇게 부상 입은 상황에서 강다다에게 적대적인 건 좋지 않은 방법이다. 아주 좋지 않은 방법이지. 지금은 빡치지만, 쉼표 정도로 숙이고 넘어가기로 했다.


한예화
……무슨 일이야?


강다다
너 김석진 만나러 가는 거 알아. 멈춰.

아니 얘네는 개나소나 마인드 리딩을 하네.


강다다
그거 죽어도 돌려주지 마, 씨발!

강다다는 내가 쥔 너와의 마법학교 캡처본을 가리키며 울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나, 뭔데? 이번에는 또 무슨 이해 관계가 있는 건데? 뭐 내가 하는 게 한순간도 제대로 되지를 않는구만. 왜 나 꽈찌쭈는 행복할 수 없어!


한예화
왜인지 설명해. 그럼 닥치고 넘어갈 테니까.


강다다
니가 지금 그런 말 할 입장인 것 같니? 확 여기서 죽여버린다!

오모나, 이게 뭐람? 이 친구는 내가 다치면 다친 사람 대가리,

…아니. 전 씨 이름을 부르면 걔가 달려오는 걸 몰랐는가 보지? 각인했다는 소문 다 퍼졌다던데 의아스럽구만.

뭐 어때, 그 각인은 현재로선 나에게 아주 유리했다. 저 새끼를 아주 호되게 혼내 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강다다는?

내 기억상, 전정국을 좋아하니까!


한예화
야. 니가 자꾸 나대면 그 정준국 불러온다.


강다다
뭔 소리야, 그게 누군데?


한예화
김석진 있는 곳 안 알려 주면 부른다고. 왜 있잖아, 니가 좋아하는 걔~ 분홍 머리에 눈은 검은색이고.

혼신의 힘을 다해 머릿속으로 전정국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각나지 마라, 생각나지 마라. 지금 부르면 완전 낭패다.

강다다는 천천히 인상을 찌푸리더니 비커 조각 하나를 쥐어 나에게 휘두르려고 다가왔다. 저 정도면 비커가 능력 아닌지.


한예화
능력?

잠깐. 강다다의 능력인 로터리는 사용한 시점으로부터 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다. 왜 강다다가 김석진을 만나지 말라고 하는 걸까?


한예화
아.


한예화
김석진이 나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는구나! 맞지?

강다다는 숨을 멈췄다가 나에게 유리 조각을 들이밀었다.

워억, 시벌! 아니 예고는 하고 들이미셔야지! 나한테 무기가 없는 줄 아나, 이 미친 칸타타.


한예화
나, 전정국이랑 각인했다!


강다다
각, 인을, 해……?

먹히나 보다. 강다다가 손에 힘을 푼다.


한예화
어! 각인했어. 게다가 걔랑 나 사랑하는 사이야. 사실 연애도 함. 결혼도 할 거고, 거 뭐냐.

거짓말이 술술 나오네. 이게 빙의글의 짬밥이다, 이것아. 내가 또 한 빙의글 써 봤다 이거야. 슈가프리의 재능을 잊지 마로라.


한예화
유리 섬에서 천년만년 행복하겠다고 함. 사실 걔 내가 첫사랑이고, 그 뭐더라. 아무튼 이 학교 떠서 행복하자고 함.


한예화
여기는 너 같은 날파리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나가려고 하는 거임~ 알겠냐?

강다다의 눈빛이 흔들린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어 유리가 박히지 않은 발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감히 키워 준 악녀를 건드리려고 해? (물론 나 말고 작품에서의 한예화.)

발에 힘이 들어갔다. 콱!


강다다
꺄악!

얘랑 예수비랑 소리치는 사운드가 똑같은 것 같다면 착각일까?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최대한 유리가 박힌 뒤꿈치를 바닥에 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걷기 시작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김석진에게 알려서 무슨 일이라도 변화가 생긴다면.

왜 하필 독자들 중에서도 걔가 여기로 왔는지 알아내고 대화로 풀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발바닥이 뒈지게 아팠다. 으으윽.

걸어! 한예화 다리, 아니 다리 님, 예쁘고 얇은 다리 님. 제발 걸어 주세요 제발…!!

하지만 힘이 풀렸다. 정신은 맑은데, 다리가 안 움직인다. 어유 시발 튼튼한 000 어떻게 여태까지 이런 다리로 살았는지?

발을 맞고 비틀거리다 도망친 강다다. 그 여자애가 서 있던 자리를 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한예화
전정국.

좋아한다고 했지?


한예화
전정국.

지금 나타나서 나를 도와 줘.


한예화
전정국!

눈 앞의 공기가 살짝 흐려졌다.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떴다.

앞이 안 보인다.

이 새끼가 불러 줬더니 실명을 시켜?! 설마, 혹시나 또 미러로 떨어졌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위치는 그대로 유티 옆 숲 속이다.

그럼 뭐지? 이 따뜻한 커튼의 정체가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한예화
엥.


전정국
왜.


한예화
왜 불렀냐고? 야, 너 강다다한테 관심 없지. 걔가 나 죽일라고 왔었어 인마. 에휴, 내가 뒈질 뻔했다니까.


한예화
그래서 발 다쳤졍. 고쳐 줭. 너 사기캐잖,


전정국
왜 그렇게 간절하게 부르는데.

와, 나 전정국이 한 번만에 제대로 된 문장 말하는 거 처음 본다. 나는 놀라기보다는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뭐가 간절?



전정국
왜 그렇게 씨발 곧 죽을 것 같이 부르냐고.


한예화
니 안 왔으면 진짜 곧 죽을 뻔 했어.


전정국
진짜 죽나 해서.

전정국은 고개를 떨구고 한참 있다가 나에게 팔을 둘러 안는다.

엥? 엉? 응? 이거 갑자기 스킨십? 분위기가 왜 이래, 나 김석진 찾으러 가야 해서 부른 건데.

하지만 으레 빙의글이 그렇듯 로맨스 씬에 방해꾼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허허, 슈발. 도대체 내가 언제부터 그런 클리셰에 들어맞게 된 건지.


전정국
각인할 때 니가 하는 말 개무시하고 대가리 날린다는 조항도 적었어야 했나.


전정국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예화
에바야. 미래에도 넣지 마라.

응. 제발 평생 넣지 마라. 나가면 그 각인은 풀고, 응.


전정국
어디 가는데.


한예화
발이 나아야 어디를 가든지 가,

다친 발을 들어 보이는데 흔적도 없다. 시벌, 뭐여! 이거 언제 다 나은 거냐? 설마 안고 있는 그거 잠깐 사이에 유리 빼고 봉합시키고 다 해먹은 거임?


한예화
야, 너 서울대 의대.


전정국
뭐?


한예화
헛소리야.


전정국
누구 만나러 가.


한예화
그, 뭐더라. 김석진! 맞아, 내가 김석진이랑 해야 될 얘기가 있다. 진지하다. 진짜 진지함. 별표 스물아홉 개 쳐.

그리고 돼지 꼬리도 뿅뿅 올려 줘야 하지.


전정국
싫은데.


한예화
가야 돼. 중요해.

나는 이번에도 내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이 (아주 잘생긴) 개새끼 사기캐에게 짐짓 중요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한예화에게 정말 세상 와 우주 최강 울트라 메가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면 이 녀석도 집착을 좀 덜 하겠지. 덜 해야 할 필요도 있고. 아나, 니가 박지민이세요?


한예화
진짜 중요해. 이거 해결 못 하면 나 유토피아 못 나가. 어? 알겠냐 이제?


전정국
그렇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는 거겠지? 당연하지!

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전정국이 국민체조처럼 가볍게 목을 돌려 풀더니 사라졌다. 그러니까, 내 시야에서 잠깐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배경이 사라졌다. 오? 엥?? 뭐야? 이렇게 반짝반짝 바뀌어도 되는 건가.

변화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석진
와악! 뭐야 너?!

김석진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