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관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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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대답해 봐. 이걸 왜 가지고 있는 거야?

이후로 김석진이 나에게 한 얘기는 가히 충격적인 것들뿐이었다. 동생에게 폰이고 노트북이고 없어서 동생이 읽고 싶어하는 빙의글을 프린트해서 보여줘 왔다는 것이다.

그날은 프린트된 57 화를 들고 학교에 간 날이었다고 한다. 학교의 책상 서랍에는 57 화가 들어가 있는 상태로, 물을 마신 순간이었다고.

그럼 나와의 마법학교를 가진 상태로 물을 마신 사람들만 변하는 건가? 아니, 그게 돼?

그 순간,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000
- ……한예화를 어떻게 짜야 하나아.


한예화
그래, 등장인물!


김석진
뭐?


한예화
네가 가지고 있던 그 57 화에 나오는 등장인물! 들고 오면서 조금이라도 읽었을 것 아니야. 이여주랑 민윤기는 차치하고, 너. 아는 등장인물이 누구야?!


김석진
그, 그게.



김석진
류컬스 나인느였던 것 같은데.

퍼즐이 맞춰졌다. 왜 류컬스가 아닌 김석진이 강다다의 조력자 파트를 맡게 되었는지. 한예화의 서브남주가 류컬스가 되었는지.

류컬스 나인느는 이미 세계관에 있기 때문에 김석진이 류컬스가 될 수는 없는 거였다. 그래서 강다다에게 도움을 주는 김석진이라는 캐릭터가 하나 새로 생긴 거겠지.

하지만 그건 자신의 의지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일 텐데? 나는 이미 조지안이 내 동료가 되는 걸 겪었는데.


한예화
그런데 왜 내가 이여주를 망치고 도망친다는 소문을 퍼뜨린 거야?


전정국
이 새끼가.


한예화
치, 치지 마!

나는 목을 까닥, 움직이는 전정국에게 손을 뻗었다. 전정국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아오. 소문 하나 퍼뜨렸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니가 양아치냐?


한예화
증언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전정국
지능이 없지는 않네.

조금만 더 싸가지 있게 만들 걸 그랬어. 한숨을 푸욱 쉬고, 김석진을 쳐다봤다.


김석진
이여주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한예화
……너, 한국의 정이 없어?!


김석진
있었지. 네가 이곳을 썼다고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정국
뭐?

전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을 바라본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걸 남주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여태까지도 많이 무너졌는데, 남주까지 알아버리면 내 안위도 위험하다. 나는 중딩의 머리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을 뽑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예화야, 마법 같은 거 공부 열심히 했잖아! 이럴 때 써야 안 억울하지 시발!


한예화
저번에 내가 가져왔던 글이야! 저, 뭐냐,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이여주가 세뇌를 했거나 뭐 그런 거 아닐까?

간절한 눈으로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전정국 역시 고개를 돌려 김석진을 바라본다.


김석진
그럼 왜 나가려고 하는 건데?


한예화
내가.

아무래도 김석진은 이여주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당했거나, 아니면 민윤기와 친했기 때문에 민윤기가 좋아하는 이여주의 말을 믿는 것일 테다.

그럼 설명을 이여주주의적으로 하는 게 좋겠지.

뭐여, 나 알고 보니 라임이 뛰어난 여자?


한예화
내가 여기 있으면 죽을지도 몰라. 강다다도 그렇고, 라테아르도 그렇고 다들 김태형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전정국이 좋아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잖아?

아. 걔네 나 좋아한다고 했. 아니야, 정신 차리자. 한예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한예화
그리고 박지민은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치려고 하지. 공부하러 왔지, 싸우러 온 거 아니잖아.


전정국
뭐?


한예화
쉿.

응 너 유토피아에 공부 안 하러 온 거 하늘이 알고 땅이 앎. 그러니 부디 닥쳐주세용.

나는 손가락을 올려 입에 갖다 댔다가, 최대한 진지하고 선생님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프로다. 나는 남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한예화다.


한예화
그러니까 싸움의 중심에 있고 싶지 않다 이거지. 사실 나도 한국인이니까 이렇게 마법 오가는 거 너무 불편하고 싫어.


김석진
…그렇지.


한예화
그러니까 내가 나가려는 걸 막지 마.


김석진
응.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정국도 나를 따라왔다. 후, 좋았어. 아주 말을 잘 했어! 한예화로서 부족하지 않았다!

어쩐지 꽃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플러번의 쉼터에서 나가려고 발을 떼는데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렇다면 김석진의 능력은 뭘까?

새로 들어온 사람인데, 설마 무능력은 아니겠지? 그런 마음에 뒤를 돌아봤는데.


한예화
김, 석진.



김석진
왜.

김석진의 몸이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다. 사라진다기보다는, 회색이 되어가고 있다. 일그러진 표정이지만 여전히 잘생긴 얼굴도 뭉개지고 신체의 특징 하나하나가 무뎌진다.

뭐야, 뭐. 사라지는 능력이야? 이런 것도 가질 수 있었나?!

도망치는 건가 싶어서 김석진의 팔이라도 붙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전정국이 나를 막았다. 핏줄 돋은 팔이 떨렸다.


전정국
아니.


한예화
아, 제발 목적어 좀요.


전정국
사라지는 게 아니야.

나는 잠깐 숨을 참았다. 서서히 흐려지던 김석진은.

엑스트라
예화? 너, 여기서 뭐 해?

엑스트라가 되었다.

잠깐 다리가 바닥에 붙은 듯이 멈추어 있다가, 전정국의 팔을 세게 잡았다. 이번에도, 내 발바닥의 상처가 맞닿게 된 곳은 미러이다.

김석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왜, 어쩌다가 사라진 거였을까? 나는 끊임없이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강다다가 나를 막아선 이유가 김석진이 사라질까 봐서였어? 맙소사…


한예화
걔 찐사랑이었구나?


전정국
찐사랑.


한예화
……그, 사랑보다 더한 거. 있어. 아무튼.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럴 때가 아니면 사기캐를 언제 써먹겠나 싶어서 손을 뻗었다. 음. 아닌가? 평소에도 자주 써먹나? 새삼 미안해지네.


한예화
야.

전정국은 말 없이 내 눈을 쳐다본다.


한예화
김석진은,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전정국
없어.


한예화
……죽은 거냐? 설마.


전정국
죽은 건 아닌데.

이 세계에서 나갔다 이거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면야 다행이지만, 그냥 그대로 사라진 거면 어떡하지.

나는 주저앉은 채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고민하는 척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왜 사라졌는지 감이 잡혔다. 김석진은 아마도 내가 이곳을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토리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비에게 종이를 가져와 달라고 했겠지.

죽지 않고 엑스트라가 된 이유는 안 봐도 뻔하다. 이제 목적이 사라진 것이다. 나에게 원망도 없고, 이여주에게도 원망이 없고, 강다다도 미워하지 않은 데다가 자신이 유토피아에 왜 왔는지도 알게 되었으니.

그럼 난 왜 못 나가는 거지? 뭐, 벌이라도 받는 건가? 아니 빙의글 좀 쓴 게 뭐가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전정국
무슨 말이야?


한예화
엥? 뭐가.


전정국
여기를 썼다는 건.

잠깐 나와의 마법학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가, 최대한 머릿속으로 생각을 덜 하면서 거짓말을 뱉으려고 노력했다.


한예화
어어엉 그게, 여기가 마법학교잖아.


한예화
여기랑 비슷한 그, 소설이 있어. 너와의 마법학교라고 왜 시장 가면 팔거든?


전정국
못 봤는데.

아오. 니가 책을 읽긴 하냐?


한예화
아무튼 그게 그, 실런에서 파는데, 그 소설을 쓴 사람이 내가 아는 이모 분이시거든! 어어. 그걸 들켜가지고.


전정국
실런.


한예화
그래! 아니, 김석진이 그 소설의 팬이라지 뭐야? 그으, 나도 잘 몰랐는데 그렇다더라고.

전정국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심하지만, 어쩐지 그 꾹 다문 입이 나를 안 믿는 것 같다. 괜히 양심에 찔려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 여기가 시설이 좋네. 어! 고급 시설이여.

허허…… 아오. 내가 빙의글을 쓰지 말았어야 했나? 돌아갈 수도 없어진 지금 와서 할 후회는 아니긴 하다.

그렇게 가만히 미러멍 때리고 있었다. 사실 멍했다기보다는 할 생각이 많았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빙의글에서라면 나도 목적이 사라지면 돌아가는 거 아닌가?

아니구나. 예화 언니는 거기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겠구나…… 목적이 너무 확실하게 있네. 시발.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붙잡혀 있으려니, 몸이 붙들려 일어나지는 것이 느껴졌다. 발끝이 바닥에 닿을락말락한다.


한예화
우어어어억! 썅, 깜짝 놀랬잖아 이 놈아!


전정국
놀라?


한예화
아니 왜 갑자기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 멱살을 잡고 지랄이야.


전정국
불렀는데 안 일어나길래. 한예화.

이름이 들리자 풀어져 있던 몸이 한 번 더 전정국 앞으로 날아갔다. 팔다리가 굳어서 허공에 멈춰 있는 기분이 뭔가 편하기도 하다.


한예화
예이, 쇤네가 대령했습죠~. 뭐 하실 말씀은?


전정국
가자.

혹시 유리 섬에서는 기초 한국어, 아니 기초 공용어 이런 걸 안 가르쳐 주나? 뭐지?


한예화
제발 목적어 좀.


전정국
목적? 없는데.


한예화
예?



전정국
목적 없어. 가자.

목적 없이 올라왔다면서, 눈을 뜨자 노을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의 옥상이었다. 펜스 너머로는 온실로 들어가는 레임과 리플럽 학생들이 보였다.

근데, 이러면 전정국도 수업을 째는 셈 아닌가? 얘 그래도 수업은 좀 똑바로 하지 않았어?


전정국
어.


한예화
…많이 쨌구나? 근데 너 내 마음 안 읽는다고 약속하지 않았.


전정국
흠.

전정국은 괜히 헛기침을 해 목을 고르더니 저 멀리 있는 벤치 쪽으로 걸어간다. 은은한 주홍빛 뒷배경에 푸른 구름 아래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조금씩 멀어진다.

항상 생각한 거지만 저 어깨는 딱 노을일 때 제일 잘 어울리더라고. 이참에 여기서도 전정국 빙의글이나 써 볼까? 책으로 내면 실런의 역사가 될 텐데.

머릿속으로 표지는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고민하며 나는 천천히 전정국을 따라갔다.

그런데, 누구와 얘기하는 모양으로 보인다.


전정국
웬일로 네가 여기에 있네.


김남준
항상 그 방에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김남준
너도 알 텐데, 여주의 시선 밖에 있기가 얼마나 답답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