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들이 왜 그럴까
02 : 차근차근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간 후, 초연해진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어차피 날뛰어봤자 바뀌는 것도 없으니까. 그래, 진정해. 김달래.

혹여나 다시 들어올까 그 남자가 나간 문을 살폈다. 책장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공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티끌 하나 없는 공백임을 확인하고 샤프를 갖다 댔다. 일단 남주들부터 정리하자.

첫 번째 타자, 김태형.


지금이 2025년이라면 아직 소설이 시작하기도 전이니까···. 17살이 맞겠지.

대강 아는 내용들만 적긴 했지만 허전해 보였다.

김달래
뭐라도 더 적어볼까.. 그렇다고 사건들을 적기에는 너무 이른데.

김달래
게다가 김태형은 여주랑 있는 비중보다 정국이랑 있는 장면이 더 많았잖아. 거의 대부분 싸우는 거였지만.

김달래
···우리 정국이가 뭘 잘못했다고.

괜히 속이 상해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살짝 골려주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말은 거세게 나갔고, 난 이를 암에도 계속해서 적기만 했다. 나열되는 글자들을 보고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왜 내 최애를 건들어서.


김달래
특이 사항이라고 적고 분풀이라고 읽는 거다, 이 놈아.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다음은 우리 정국이로 해볼까. 종이를 한 번 넘겼다.


김달래
크···. 웃통 까고 수영한다는 지문을 봤을 때 얼마나 좋아했는지.

김달래
친구라도 되고 싶지만 워낙 속을 알 수 없으니까.. 그래. 이 할미는 너랑 여주가 꽁냥꽁냥 대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자기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애가 행복해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진정한 팬심이지. 솔직히 속으로는 몇 번을 아쉬워했지만 말이다.

···그럼 마지막은 그 남자인가.


넓은 등판을 떠밀며 나가라고 소리쳤을 때 남긴 이름. 김석진. 나이는 몇 인지 추리하기 힘들다. 꽤나 어려 보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성숙함이 묻어있었으니까.

근데 어째 익숙한 이름인데. 누구더라.


김석진
김달래! 와서 아침 먹어!!

김달래
ㅇ, 어? 알겠어!

얼떨결에 대답을 해버렸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책을 덮었다. 문을 열자마자 음식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식욕은 멀쩡한지 군침이 돌았다.

02 : 차근차근

ᅠᅠᅠᅠ

···와, 대박. 완전 어색해.

벌써 5분째다. 서로 대화는커녕 눈조차 마주치고 있지 않은 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조금씩 먹고 있음에도 맛있는 건 느껴졌지만.

혼자서 이 정도로 만든 걸 보면 요리랑 관련 있다는 거겠지? 진로나 직업이 이쪽인가. 근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김달래
···에휴. 내 팔자야.


김석진
뭔 일 있냐?

김달래
어? 아니, 그냥.. 내일 첫 등교잖아. 조금 걱정돼서.


김석진
걱정할 게 뭐 있어. 언제는 그렇게 좋아해 놓곤.


김석진
너 아까 이상하게 굴었던 것도 그거 때문이구나?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왠지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님아···. 난 당신 친동생이 아니에요..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얼굴을 돌린 내 눈에 한 도시락 통이 들어왔다. 저건 또 뭐람. 방금 막 쌌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입을 우물대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김달래
그.. 오빠. 저건 뭐야?


김석진
알면서 뭘 물어. 전정국 거잖아.

김달래
···예?

시방, 이게 뭔 소리여.


김석진
너 내일 일찍 가야 하는 거 알지? 예전이랑 똑같이 수영부 가서 주고 교실 올라가.


김석진
또 길 잃고 울지나 말고.

아무런 소리가 안 들렸다. 저 남자 이름이 익숙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근데 이 몸이 정국이랑 아는 사이라고? 소설에서는 안 나왔었잖아. 적어도 남주랑 연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끼워 넣어줬을 텐데. 대체 뭐야···!!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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