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원― 가원(家園)

[보넥도 빙의글 /나페스]은하원-가원(家園) 2화 : 장맛비

 

문제될 시 삭제, 아티스트 비하 의도 없습니다.

모든 내용은 현실과 무관합니다.

 

<BGM 과 함께 보시면 좋습니다!>


 

졸업식 날 아침엔 첫 장맛비가 내렸다.

종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둔하게 울렸다.

창밖의 청보리밭은 하룻밤 사이에 회색으로 젖어 있었다.

이상하게 조용한 아침이었다. 

세 번째 종이 다 울렸는데도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나 '뭐지..? 조용하네..'

항상 아침마다 밝게 뛰어오던 운학이 오지 않았다.

교복을 챙겨 입고 남자 기숙사 쪽 복도로 갔다. 

운학의 방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운학은 창가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비 내리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하나  "운학아, 오늘 아침엔 고기 나온데 졸업식 날이라고"

운학  "누나"

운학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운학 "유리 누나, 진짜 문밖 가는 거지?"

하나 "당연하지 왜?"

운학 "그냥... 꿈에서 유리 누나가 울고 있었어.. 소리도 안 내고, 왜 우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

나는 웃으며 운학의 젖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하나 "에이 괜찮을 꺼야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

웃었는데, 등 뒤가 서늘했다. 

어젯밤 숲 너머에서 깜빡이던 불빛이 떠올랐다.


식당엔 졸업식 날에만 나오는 아침 월명차가 잔마다 김을 피우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서로 한 잔 더 달라고 아우성일 텐데, 오늘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성호조차 잔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여느 때처럼 달았다. 

마시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까 운학의 꿈 얘기가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강당엔 일 년에 한 번 섬에 오는 원장 선생님이 와 계셨다. 

검은 우산을 든 키 큰 남자 


얼굴은 늘 그렇듯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

원장 "너희는 은하원의 별이다. 별은 언젠가 하늘로 돌아가야 하지."

 

매년 듣는 축사였다. 

매년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말이, 오늘은 어딘가 걸렸다.

 

원장 "채유리. 앞으로."

유리 언니가 단상에 올라 졸업장을 받았다. 

 

우리는 박수를 쳤고, 언니는 손을 흔들었다.

 그 손목에 늘 차고 다니던 별 모양 매듭 팔찌가 없었다.

 

식이 끝나고 아이들이 차례로 언니와 작별 인사를 했다. 

내 차례가 오자 언니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오래, 생각보다 세게.

유리 "하나야."

언니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유리 "내 방 정리, 꼭 네가 해줘. 너만."

대답하기도 전에 언니는 몸을 떼고 환하게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윤 선생님이 언니의 어깨를 감싸고 우산 아래로 데려갔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

 

우리는 현관 처마 밑

에 나란히 서서 둘의 뒷모습이 빗속으로 흐려지는 걸 지켜봤다.

처마 끝에서 떨어진 빗물이 내 어깨를 적셨다. 

재현이 말없이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선착장 쪽을, 무언가를 확인하듯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한 "배 소리 들려?"

이한이 작게 물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뿐이었다.

 

태산 "이상하네."

태산이 안경에 맺힌 빗방울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태산 "선착장 가는 길인데, 왜 발자국이 숲 쪽으로 꺾여 있지?"

 

성호 "비 와서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성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태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진흙 위의 발자국을 끝까지 눈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옆을 보니 리우가 웃고 있지 않았다.

 

늘 웃던 리우가, 선생님들의 뒷모습

을 이상할 만큼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자습 시간, 나는 윤 선생님께 유리 언니 방 정리를 하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잠깐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방이었다. 

이불은 반듯하게 개어져 있고, 책상 서랍도 비어 있었다. 

언니가 이 방에 칠 년이나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 밑을 쓸던 빗자루 끝에 뭔가 걸렸다.

별 모양 매듭 팔찌

그리고 네 번 접힌 종이 한 장

기억 시험 때 쓰는 갱지였다. 

펴보니 은하원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본관, 기숙사, 운동장, 선착장...

언니다운 꼼꼼한 선이었다. 

 

그런데 지도 위쪽, 아무것도 없어야 할 북쪽 숲에 작은 네모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네모 안에는 한 글자

 門

 

지도 귀퉁이에 언니의 급한 글씨가 있었다.

 

유리 '하나야 월명차 마시지 마'

손끝이 차가워지고,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천천히, 이 방을 향해

나는 숨을 삼키고 종이를 교복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팔찌는 손목에 밀어 넣었다. 

빗자루를 다시 쥔 순간 문이 열렸다.

"다 했니, 하나야?"

윤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눈이 방 안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침대, 책상, 그리고 나

"네 거의요"

"그래 수고했다 저녁엔 따뜻한 월명차 끓여줄게"

선생님이 다정하게 웃고 돌아섰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숨이 쉬어졌다.

창밖을 봤다. 

선착장엔 배가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나는 우산도 없이 뛰었다.

태산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태산 '선착장 가는 길인데, 왜 발자국이 숲 쪽으로 꺾여 있지?'

 

발자국이 숲 쪽으로 꺾여 있었다던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청보리밭을 지나, 들어가선 안 되는 북쪽 숲으로

 빗물이 교복 안으로 스며들었다. 

 

발밑의 흙이 미끄러웠다. 

안주머니의 종이가 젖을까 봐 가슴을 끌어안고 달렸다.

어젯밤 불빛이 깜빡이던 방향만 생각했다.

 

숲이 끝나는 곳에 언덕이 있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

이끼로 반쯤 덮인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문 앞에 검은 우산 두 개가 보였다. 

원장 선생님, 그리고 윤 선생님

 

유리 언니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비에 젖은 채, 이상할 만큼 조용히..

마치 잠든 사람처럼

 

윤 선생님이 철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문 너머는 까맸다. 

 

그냥 어두운 게 아니었다. 

빛이 닿는 곳에서 뚝 끊긴 것처럼, 문턱 한 뼘 너머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벽도, 바닥도, 길도. 쏟아지던 빗줄기마저 그 앞에서 멈춘 듯 문 안으로는 한 방울도 들이치지 않았다.

 

문틈으로 찬 바람이 흘러나왔다. 

한여름 장맛비 속인데도 등골이 시릴 만큼 차가운 바람

젖은 쇠 냄새가 났다.

 

 

"은하원은 너의 가원이다."

윤 선생님이 언니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문밖에 나가도, 잊지 마라."

언니가 한 걸음, 문턱을 넘으려던 순간이었다.

 

언니의 몸이 갑자기 휘청였다. 

줄 끊긴 인형처럼 무릎이 꺾이더니, 그대로 진흙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비명을 삼키느라 내 손등을 깨물었다.

윤 선생님은 놀라지 않았다. 

원장 선생님도 

 

두 사람은 마치 늘

 있던 일처럼, 쓰러진 언니의 양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언니의 발끝이 진흙 위에 두 줄을 그으며 끌려갔다. 

문턱을 넘는 순간, 언니의 모습이 먹물에 잠기듯 그 까만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였다.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

언니였다.

"싫어, 놔! 살려줘! 누가 좀… 살려줘!"

내가 아는 유리 언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늘 웃던 언니가, 울부짖고 있었다.

 

철문이 닫혔다.

쿵

비명이 뚝 끊겼다.

 

빗소리만 남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밖 가면 꼭 편지할게 라던

어젯밤 잔을 부딪치며 웃던 언니의 얼굴이, 방금 그 비명 위로 겹쳤다.

 

그동안 우리가 박수 치며 보낸 선배들은 전부, 저 문 안에서 저렇게 사라졌던걸까

숨이 막혔다. 

 

뒷걸음질 치다 발밑의 나뭇가지가 뚝 부러졌다. 

윤 선생님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가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내 입을 막았다.

 

"쉿. 하나야, 나야."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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