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빙의글] 세 번째 결말

9화. 역할이 바뀌었다

2회차에선 다 알아냈을 때 이미 늦었다.

이번엔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위험한 도박이라는 건 알았지만, 가만히 있다가 또 같은 날을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퇴근 시간, BND 쪽 유리문 앞에서 기다렸다.

동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려고 서 있는 건 처음이었다.

 

얼마 안 가 낯익은 얼굴이 나왔다.

아직 앳된 얼굴, 가벼운 걸음걸이. 2회차에서 몇 달에 걸려 겨우 알아낸 얼굴을, 이번엔 이름도 모르는 채로 먼저 알아봤다.

 

"…저기요."

 

"…네? 저요?"

 

운학이 당황한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불러 세웠으니 당연했다.

 

"김운학 씨, 맞죠."

"…어, 제 이름을 어떻게……."

"선일 캐피탈 계좌 쪽, 승인란에 번호 올리고 계시죠. 끝자리 5321로 끝나는 번호로."

 

운학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도망치려는 듯 반걸음 물러섰다.

그 반걸음에 심장이 덜컥했다. 여기서 그대로 돌아서서 뛰어가 버리면, 다음 할 일은 뻔했다. 성호 쪽에 전화를 거는 것.

 

"…누구세요, 그쪽."

"적은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쪽이에요. 그 번호, 성호 실장 쪽에서 당신 끌어들일 때 쓴 거잖아요. 지금이라도 발 빼고 싶으시면, 저랑 얘기 좀 하세요."

 

말이 너무 많이, 너무 빨리 나갔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까지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 적은 없었다.

이제 와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운학이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 버리면, 다음 순간 성호 쪽에서 무슨 수를 쓸지 알 수 없었다.

 

운학이 한참 나를 쳐다봤다.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도망칠지, 소리쳐 사람을 부를지, 아니면 다른 수를 쓸지 가늠하는 눈이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조여들었다.

 

한참 뒤에야 그 눈에서 겁먹은 기색과 함께, 뭔가 들켰다는 안도 같은 것도 섞여 나왔다.

 

"…그쪽, 진짜 뭐예요. 회사 사람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회계사무소 직원이에요. 그냥, 알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만 해 두죠."

"그걸 어떻게 믿어요."

"안 믿어도 돼요. 대신 하나만 물을게요. 지금처럼 계속 가면, 끝이 좋을 것 같아요?"

 

운학이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벌써 답이었다.

 

"믿든 안 믿든, 지금 당신한테 가장 위험한 사람은 저쪽이에요. 제 쪽은 아니고요."

 

운학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사이,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내일 오후에 다시 뵐게요. 자료실로 오세요. 아무도 없을 시간에."

 

 

 

*

 

 

 

그날 밤, 사무소에 혼자 남아 모니터를 켰다.

선일 캐피탈 장부, 2억 4천만 원이 비어 있는 그 줄이 그대로 떠 있었다.

 

저 구멍을 메우는 데 운학이 손을 댔다면, 증거도 그 손에 있다는 뜻이었다.

내일이면 알 수 있을 거였다.

 

 

 

*

 

 

 

다음 날 아침, 사무소 커피포트 앞에서 동민과 마주쳤다.

머그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동민이 머그를 받지 않고 나를 봤다. 표정이 복잡했다.

 

"…왜 이러세요."

 

핑계를 댈 말은 많았다. 커피 내린 김에, 지나가다 생각나서. 전에는 늘 그런 말로 둘러댔었다.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동민씨한테 관심 있어서 드리는 거예요."

 

동민의 눈이 흔들렸다.

받을까 말까 손이 한 번 떠올랐다가, 결국 그대로 내려갔다.

 

"…저 바빠서요."

 

짧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가 떨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봤다.

받고 싶으면서도 받지 않는 손이었다.

2회차에서 자신이 수없이 했던 손짓과 똑같았다.

 

거절당한 머그를 든 채로 서 있다가, 그래도 웃었다.

그때 자신이 왜 그렇게 손을 거뒀는지 이제는 너무 잘 알았다.

끌리는 마음을 들키면, 어떻게든 끌려 들어가게 될까 봐 그랬던 거였다.

그 마음을 알아 버린 이상, 밀어내도 상관없었다.

이번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

 

 

 

오후, 복도 끝 자료실에서 운학과 다시 마주 앉았다.

어제 그 자리에서 못박아 둔 약속이었다.

 

"…그쪽 사무소에서 보는 선일 캐피탈 장부, 거기 비는 돈 있죠. 그 계좌들, 제가 직접 옮긴 것도 몇 개 맞아요."

 

운학이 그렇게 인정했다.

하지만 손에 쥐고 내놓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증거까지 넘길 생각은 없는 눈치였다.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지금 당장 뭘 내놓으라는 거 아니에요. 생각할 시간, 필요하면 가지세요. 대신 너무 오래는 안 돼요."

"…왜 저를 믿고 이런 얘길 하세요. 제가 그냥 성호 쪽에 다 전해 버리면요."

"그럼 그런 거겠죠. 그래도 말은 걸어 봐야 했어요."

 

운학이 한참 나를 보다가, 결국 시선을 내렸다.

 

"…생각해 볼게요. 그것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지금은."

 

확답은 아니었다.

그래도 거절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때, 유리문 너머로 지나가던 동민과 눈이 마주쳤다.

운학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다른 그림으로 보일 법도 했다.

 

동민의 걸음이 멈췄다.

순간 스친 표정이, 방금까지의 그 무심함과는 완전히 달랐다.

눈매가 살짝 좁아지고, 걸음을 떼려다 한 번 더 멈추는 게 보였다.

 

'…저거, 설마.'

 

동민이 금세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어갔다.

걸음이 아까보다 조금 빨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틈에 본 얼굴은, 숨기려 해도 다 숨겨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까 커피를 거절할 때의 그 무심함과는 전혀 다른, 날이 선 얼굴이었다.

 

운학이 그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뭔가 알겠다는 듯 작게 웃었다.

 

"…저분, 지금 완전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죠."

"안 풀어 주실 거예요?"

"저희가 뭘 하는지는 말할 수 없잖아요...."

"아무래도 비밀스럽긴 하죠."

 

장난처럼 웃으며 넘겼지만, 실제로 오해를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진짜 이유를 말하려면 운학을 캐고 있다는 것부터, 왜 그러는지까지 전부 설명해야 했다.

그건 동민을 끌어들이지 않기로 한 다짐을 그 자리에서 깨는 거였다.

 

차라리 질투로 오해하게 두는 쪽이 나았다.

그 오해가 동민을 더 아프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은 그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

 

 

 

퇴근 무렵, 복도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동민과 마주쳤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사이인데, 동민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운학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딱딱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넘기려 해도 될 질문이었는데, 묻는 투에 날이 서 있었다.

 

"…그냥, 업무 얘기 좀 했어요."

"업무 얘기를, 자료실에서, 그렇게 붙어서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민 스스로도 아차 싶은 얼굴이 됐다.

방금 그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뒤늦게 깨달은 눈치였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요. 그런 뜻으로 안 들었어요."

 

사실은 정확히 그런 뜻으로 들렸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동민이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평소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가려 했지만, 귀 끝이 조금 붉어진 건 숨기지 못했다.

 

"…그냥, 신경 쓰여서요. 그 녀석이 좀 그렇잖아요. 사람한테 들이대는 거."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 변명도 아니었다.

신경 쓰인다고, 그냥 그렇게만 말하면 됐을 텐데.

굳이 운학 핑계까지 가져다 붙이는 게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손목의 깨진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예전엔 자신이 그랬다.

좋으면서도 좋다는 말 한마디를 못 해서, 괜히 선을 긋고 거리를 뒀다.

 

지금은 동민이 그러고 있었다.

신경 쓰인다는 말 한마디면 될 걸, 그 말을 똑바로 못 해서 엉뚱하게 운학 핑계로 돌리고 있었다.

숨기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자신인데, 정작 못 하는 말을 끌어안고 있는 건 저쪽이 된 셈이었다.

 

역할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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