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4화. 곁을 내주다

보름 남짓 지났을 뿐인데, 범규의 상처는 몰라보게 아물어 있었다.

처음 왕진 왔던 의원조차 다시 들러서는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로 깊었던 상처가 이리 빨리 붙다니, 원래 몸이 남달리 강골이신가 봅니다."

"…그런가 봅니다."

 

범규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단련된 몸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

 

 

"거기 앉아 계셔도 돼요. 딱히 할 일도 없으실 텐데."

 

여주가 수틀을 꺼내 들며 말했다.

범규는 못 이기는 척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가만히 바늘 놀리는 손을 구경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매화네요."

"어머, 아세요?"

"…아니요. 그냥 그렇게 보여서요."

 

여주가 피식 웃었다.

 

"기억도 없으신 분이 꽃 이름은 용케 아시네요."

"눈으로 보고 아는 거야 별개니까요."

 

능청스러운 대답에 여주는 대꾸할 말을 잃고 다시 바늘을 놀렸다.

한 땀 한 땀 놓일 때마다, 범규의 시선도 그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자꾸 그렇게 보시면 손이 떨려서 삐뚤어져요."

"보지 말라 하시면 안 보겠습니다만, 딱히 다른 볼 게 없어서요."

"저 놀리는 거 재밌으세요?"

 

"아가씨 얼굴 빨개지는 거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여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바늘을 내려놓으며 흘겨보았다.

그런데도 화가 나기는커녕,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애를 먹었다.

 

"됐고요, 손님은 심심하면 저기 마당이나 쓸고 계세요."

"아가씨 옆에 있는 게 제 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누가 그런 일을 시켰대요."

"아가씨 표정이요. 방금 아주 흡족해 보이셨는데."

 

여주는 어이가 없어 픽 웃고 말았다.

말싸움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는 걸 요즘 들어 부쩍 실감했다.

이런 시간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

 

 

그날 오후, 여주는 바람을 쐬러 마당을 거닐었다.

어느새 범규가 슬그머니 뒤를 따라와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둘 다 미처 피하지 못한 채 흠뻑 젖고 말았다.

범규가 부리나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처마 밑으로 데려갔다.

"괜찮으세요?"

"…네, 갑자기라."

 

숨을 고르며 마주 본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빗방울이 그의 이마에서 턱으로 흘러내렸다.

젖은 옷깃 사이로 옥패가 살짝 드러났다가, 그가 손으로 슬쩍 여미며 감췄다.

여주는 그 손짓을 보고도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비가 꽤 오네요."

"그러게요."

 

별다를 것 없는 말인데도, 둘 사이엔 묘한 여운이 남았다.

 

"손님은 젖어도 괜찮으세요?"

"소인이야 이미 한 번 죽다 살아난 몸인데, 비 좀 맞는다고 어떻게 되겠습니까."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여주는 어쩐지 마음이 저릿했다.

빗소리만 한참 처마를 두드렸다.

 

 

*

 

 

사랑채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유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딸이 저리 편하게 웃는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낙향한 뒤로 늘 조심스럽고 어딘가 그늘져 있던 아이였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걸렸다. 이유 모를 불편함이었다.

저 사내의 어디가 그리 신경 쓰이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별일 아니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지만, 그 찝찝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마주한 듯한,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었다.

 

 

*

 

 

저녁, 비가 그친 뒤 여주는 무심코 물었다.

 

"고향이 그립지 않으세요? 기억은 없어도, 그런 건 마음으로 아는 거라던데."

 

별생각 없이 던진 물음이었다.

그런데 범규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웃음기가 걷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여주는 분명히 보았다.

그 텅 빈 눈빛을.

"…글쎄요.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주는 괜한 걸 물었다 싶어 얼른 말을 돌리려는데, 범규가 먼저 옅게 웃어 보였다.

"농담입니다. 기억도 없는데 그리울 게 뭐 있겠어요."

 

그 웃음이 조금 전 그 표정을 지우기엔 부족했다.

여주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말없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범규는 잠시 그 온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이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이상하네요."

"뭐가요?"

"기억도 없는 놈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는 이유가요."

 

여주는 잠시 대답을 고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손님이 여기 있는 게, 저는 좋아요. 뭔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요."

 

여주가 멋쩍은 듯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

 

범규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언가 말하려다, 결국 삼켰다.

 

"아가씨도 참 이상한 분이십니다."

"그러게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 그 웃음 안에 감춰진 것들은, 서로 알지 못한 채였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위로도 있다는 걸, 여주는 그날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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