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75화. 새로운 인연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기차를 타기 전에 훈지씨에게 이메일을 썼다.

지금이 아니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의 방 앞에 메모를 남겨 놓을까도 생각했지만,

스태프들도 그 호텔에 묶고 있어서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먼저 볼까봐 걱정이 됐다.





[제목: 답장하지 않아도 돼요.


 훈지씨...

 오늘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몇 개월 만에 당신 봐서 너무 좋았어요.

 나는 그동안 당신에 대한 마음이

 많이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다 정리되기 전까지

 만나지 않았어야 했는지...

 아마도 후자인 것 같아요.

 서로 마음의 정리가 될 때까지 연락하지 말도록 해요.

 앞으로 메일도 확인하지 않을 거에요.

 우리...각자 잘 지내다가

 나중에...

 서로 봐도 아무렇지 않을 때,

 그 때 봐요.]

 



메일을 보내 놓고, 랩탑을 닫았다.


그때, 누군가 한국말로 나에게 물었다.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아까부터 나를 보는 듯 해서 신경쓰였던

바로 그 남자였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어제 우리 마주치지 않았나요?"





"글쎄요...저는 기억에 없는데..."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훈지씨와 마주치고 멍하니 서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밀치고 나가면서 중심을 잃었었다.



그 때 나를 잡아 준 사람이 있었는데

자세히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 같기도 했다.




"혹시 어제 저를 잡아주신 분인가요?"




"맞죠?

 어제 그러고 나서도 벤치에 한참 앉아 계시길래

 어디가 편찮으신 줄 알았어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실까 봐

 근처에 조금 머물러 있었어요."





"정말요? 그렇게까지 신경써 주신 줄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맞은편 의자를 빼 주었다.

감사한 마음에 커피라도 대접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앉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행 중이세요?"





"네...루앙으로 가는 기차 기다려요.

 괜찮으시면 커피 드시겠어요?

 저도 식사 마치고, 마시려던 참이에요."





"좋아요. 그럼 제가 주문할께요."





그가 바로 서버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한국에서 오신 거죠?"




"저는...지금은 스페인에서 머물고 있어요."




"아...정말요?

 저는 어렸을 때 프랑스로 이민왔어요.

 파리에서 살고 있구요.

 휴가차 루앙으로 가는 기차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랑 같은 곳을 가시네요.

 전 루앙은 처음인데 가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저도 처음이에요."




그 때, 커피가 왔다.



"어제 도움도 주셨는데

 별거 아니지만 커피는 제가 살께요."




"아니..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는데요.

 그럼...

 루앙 도착해서 함께 점심 먹어요.

 프랑스에 여행 오신 걸 환영하는 의미로

 제가 대접할께요."




"네? 아니에요.."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사래까지 쳤다.




"너무 단호하게 거절하시니까

 제가 민망하네요. ㅎ

 제가 싫으셔서 그런 건 아니시죠?"




그의 민망한 웃음에

내가 더 미안해졌다.




"아니...그런 게 아니라..."




"어차피 혼자 가려고 했던 식당인데,

 같이 가시면 저도 덜 심심할 것 같아서요.

 제가 미리 검색해 놓은 유명한 식당이 있거든요."




"아...네..."




거절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이런 상황이

나는 늘 당황스럽고, 불편하다.




그와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기차 플랫폼까지 함께 걸어갔다.




어렸을 때 프랑스로 이민을 와서 살다가

부모님은 최근에 한국으로 다시 역이민을 가시고,

파리에 혼자 남아 지내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돼요?"




"저는...그림 그려요."




"아..."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구요."




"네..."




"그런데...

 표정을 보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신 것 같아요"





"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많이 슬퍼 보여서요.

 어제 벤치에 앉아 계실 때

 어떤 남자분이랑 잠깐 대화하시던데..."




나는 아무 대답 없이 불안한 마음에

그 남자를 쳐다봤다.




'혹시 훈지씨를 알아 본 건가...'




"말을 안 하고 쳐다봐도

 표정으로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가만히 있어 보세요.

 속으로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죠?

 이 남자가 지금 나한테 플러팅을 하고 있는 건가?

 어떻게 떼어버리지?"





"네? 아니에요. 그런거.."




"하하...농담이에요."



유쾌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나도 한결 긴장이 풀렸다.




그와 같은 기차를 타기 때문에

서로 티켓을 확인해 보니,

내 옆자리였다.




"와...이거 보통 인연이 아니네요.

 그렇죠?"




그는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내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네요..."




사실 난 그와 옆자리이건 아니건

신경쓰이지 않았다.




파리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훈지씨 생각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나는 그가 말을 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책을 꺼내 폈고,

그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조용히 음악을 들으면서

루앙으로 향했다.




루앙에 도착 후,

그가 미리 렌트를 해 놓은 차를 함께 타고,

점심 식사를 위해 이동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그는 최근에 k-pop이 프랑스에서 얼마나 핫한지

체감한다면서 여러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제 연애가 엄청 쉬워졌어요.

 프랑스 여자한테 한국 남자라고 하면

 우선 플러스 점수를 얻고,

 노래까지 부르면 줄서요.ㅎㅎ"




나는 물을 마시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물을 뿜었다.




"풉!!! 어머..죄송해요. 죄송해요.

 이걸로 닦으세요."




"아...마침 더웠는데 잘 됐네요.

 덕분에 더위는 싹 날아갔아요.ㅎㅎ"





"죄송합니다. 어떡해요..."




"괜찮아요.

 덕분에 웃는 것도 봤잖아요."




그의 말 한 마디로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걸 느꼈다.



"맛있는 점심 너무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혼자 심심하게 먹을 뻔 했는데

 즐거운 식사였어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호텔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어디에서 묵으세요?"




"저랑 만나보는 거 어때요?
 
 그 사람 잊게 해 줄께요."    <76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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